서울 마포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김해준은 공부하고 연구하고 경험하며 “사실감을 살려 웃음과 따뜻함을 주는 캐릭터를 계속 선보이고 싶다”고 말했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그는 이런 사람이었다. 끼니를 놓치면 “바보야, 밥도 안 먹고 뭐 하는 거냐”며 걱정해줬고, 지친 표정을 읽고선 “일이 많이 힘들었구나”라며 위로해줬다. 그러고는 “어? 오늘도 예쁘네”라며 ‘내’가 사랑받는 존재임을 늘 확인시켰다. 2020년 유튜브 채널 ‘피식대학’에서 ‘비(B)대면 데이트’를 했던 카페 사장 최준은 코로나19 시대를 맞아 불안해하던 우리를 지탱해주는 위로의 존재였다.
그런 최준이 최근 다시 누리꾼들 사이에서 소환되고 있다. 코로나19 장기화와 경제 상황 악화 등으로 답답한 시절이 계속되면서 위로가 필요한 이들이 늘어난데다, 요즘 예능프로그램에서 ‘본캐’(본래 캐릭터) 김해준의 활약이 더해지면서, ‘부캐’(부가 캐릭터) 최준의 가치가 새삼 더 빛나기 때문이다. 최준은 상대에게 끊임없이 좋은 얘기를 하고 믿음을 주면서 자존감을 세워준다. 원초적인 웃음을 유발하면서 무게를 잃지 않는데, 이런 캐릭터를 선보이기는 쉽지 않다.
■ 종이신문 보며 세상 파악 ‘공부하는 코미디’
몸은 오그라드는데, 구겨진 마음은 펴지는 코미디. 김해준이 지금껏 ‘피식대학’ 캐릭터를 통해 선보인 개그의 특징이다. 김해준은 최준을 시작으로 동대문 옷가게 사장 ‘쿨제이’, 뮤지컬 배우 ‘김민준’까지 다양한 부캐를 선보였다. 플랫폼이 다양해지면서 의미 없는 웃음, 남을 깎아내리며 나를 높이는 웃음이 늘어나는 시대에 그는 유치함과 따뜻함이 공존하는 코미디를 완성해내며 자신만의 입지를 공고히 다져가는 중이다.
김해준은 “이런 코미디는 전달자의 무게가 중요하다고 생각해” 내면을 채워나가려고 한다. 그가 꾸준히 신문을 읽는 이유다. 모바일로만 뉴스를 접하지 않고, 종이신문을 구독하고 있다. 최근 <나 혼자 산다>(문화방송)에서 매일 아침 신문을 완독하는 모습이 공개되면서 시청자의 눈길을 끌었다. “1년8개월 전부터 구독했어요. <코미디 빅리그>(티브이엔) 녹화장에서 보면, 장도연 선배님이 메이크업을 받으면서 늘 신문을 읽으세요. 말씀도 잘하시고, 코미디 전체의 흐름을 꿰뚫는 분이잖아요. 선배님이 잘되는 데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고, 그런 점을 배워보고 싶어서 선배님처럼 종이신문을 구독하기 시작했어요.”
신문을 정독하면서 시야가 넓어지고 마음이 깊어졌다고 한다. 앞쪽 면에 배치되는 기사와 뒤쪽 면에 배치되는 기사, 같은 면에서도 크고 작게 배치되는 기사의 차이 등을 생각하게 됐다. 그는 “모바일로만 볼 때는 주로 한가지 사건만 집중했는데, 종이신문으로는 그날 전국에서 일어난 다양한 일을 놓치지 않고 파악할 수 있다”며 “아직 글자가 쉽사리 눈에 들어오지는 않지만, 꾸준히 읽다 보면 내 안에 무언가가 자연스럽게 채워질 것 같다”고 했다. 정치적인 이슈뿐만 아니라 신문 한쪽에 짧게 실린 감동적인 이야기까지 창작자로서 얻는 게 꽤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참고할 만한 내용은 그때그때 휴대전화 메모장에 빼곡하게 적어둔다. 메모하는 습관은 지금의 김해준을 있게 한 원동력이다. “버스를 타고 목적지 없이 떠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해요. 버스에서 이런저런 아이디어들이 떠오르는데, 그런 것들을 잘 메모해두죠. 지금껏 선보인 코미디 중에서도 버스에서 태어난 게 많아요.”
유튜브 채널 ‘피식대학’에서 ‘카페사장 최준’을 연기한김해준.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김해준은 2018년 공개코미디 <코미디 빅리그>로 데뷔했지만, 2020년 유튜브에서 ‘캐릭터 플레이’를 선보이면서 주목을 받았다. 짜인 것보다는 리얼리티가 살아 있는 것, 디테일을 살려 사실감을 높이는 코미디가 결과적으로 그에게 더 잘 맞았다. 최준 캐릭터도 <코미디 빅리그>를 할 때 창조했으나, 빛을 못 보다가 유튜브에서 통했다. 그는 “아무리 웃긴 캐릭터라도 나 스스로는 진지하게 다가가려고 한다. 그래야 보는 이들도 캐릭터를 진지하게 바라보게 되고 그 안에서 진짜 웃음을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디테일에 신경 쓰며 캐릭터의 사실감을 살리는 데 공을 많이 들인다. ‘동대문 쿨제이’는 말투부터 표정, 손짓까지 실제로 현장에서 일하는 분들과 비슷해 화제를 모았다. ‘뮤지컬 스타 김민준’만 해도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의 곡(넘버)을 부르는 영상을 보면 ‘가사는 어떻게 외웠을까’ ‘연기연습은 얼마나 했을까’ 등 갖가지 생각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 ‘뮤지컬 스타 김민준’ 1편을 만들기 위해 그가 곡을 익히고 연기연습 등을 하는 데 대략 1주일이 걸린다고 한다.
코미디언이 되기 앞서, 그는 다양한 경험을 많이 했다. 이런 경험이 자산이다. 코미디언 지망생이었던 6년 동안, 냉동 탑차를 몰고 학교에 간식을 배송했고, 은행에서 청원경찰을 하기도 했다. 떡갈비 공장에서 일한 경험도 있다. 그는 일상에서 만난 사람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유심히 관찰하고, 자신의 경험을 반추했다. 그는 “동대문 종합쇼핑몰 옷가게에서 일한 적도 있는데, 쿨제이는 중학교 때 강매당한 일 등 살면서 겪은 사례들을 종합해서 표현한 캐릭터”라고 말했다.
세심한 관찰과 경험 등을 토대로 믿고 볼 수 있는 캐릭터가 창조되니, 그가 하는 꼭지에는 출연자들이 손 들고 나온다. 최준이 가수들과 함께 노래하는 유튜브 프로그램 ‘니곡 내곡’에는 베테랑 가수들이 먼저 출연 요청을 했다. ‘니곡 내곡’에서 최준은 콧소리를 한껏 내뿜고 못 부르는 척하며 ‘웃음’을 담당한다. 이 역시 마냥 가볍게만 느껴지지 않는 게, 실제로 김해준은 노래를 잘하기 때문이다. 연습으로 노래를 ‘못’하게 만든다. 곡에 따라 잘 불러버리는 ‘실수’를 할 때도 있다. 진짜 못 부르기 어려운 곡은 하동균의 ‘그녀를 사랑해줘요’다. “원래 제가 좋아하던 곡이었어요. 20대 초반에 이별했을 때 이 곡을 정말 많이 불렀죠.(웃음)”
코미디언 김해준이 서울 마포구 홍대앞 거리에서 팬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코미디언이 된 뒤에도 힘든 시절이 있었다. 지망생 생활 6년을 거쳐 데뷔했는데, 2년 반이 지나도록 ‘터지지 않을 때’는 답답했다. “처음에는 <코미디 빅리그>에서 스타가 돼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데뷔만 하면 다 되는 줄 알았는데 끝이 아니더라고요. 2년6개월 동안 잠도 거의 안 자고 아이디어를 짰는데도 잘 안 풀렸어요.” 노력하는데 성과가 안 나니, 문득 ‘내가 지금 나를 갉아먹고 있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면서 유튜브 등 다른 곳도 돌아보게 됐다. 2020년 초중반의 어느 날이었다.
동료들에 견줘 유튜브 진출이 늦었던 그는 공개코미디와 활동을 병행하는 승부수를 던졌다. 유튜브에서는 스타가 됐어도, 대중적으로는 덜 알려진 이들도 많다. 김해준은 유튜브 성공과 동시에 두마리 토끼를 다 잡았다. “<코미디 빅리그>와 병행하는 게 힘들었지만, 플랫폼마다 보여줄 수 있는 게 다르다고 생각했어요. <코미디 빅리그>는 단체로 하는 개그이고, 유튜브는 개인이 할 수 있는 걸 최대한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 조금 더디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다 보면 또 다른 기회가 올 것으로 생각했어요.”
또 하나의 차별점으로는 본캐 김해준의 매력이 부캐를 더욱 탄탄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부캐로 인기를 얻은 이들은 본래의 모습으로 활동하는 것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자칫 부캐의 인기마저 사그라들 수 있기 때문이다. 김해준은 조바심 내지 않고 본캐의 내실을 다지면서 적절한 시기를 기다렸다. 최준의 활동 범위를 ‘비대면 데이트’에 한정하지 않고, ‘니곡 내곡’과 티브이 예능프로그램으로 서서히 넓히며 시청자들이 김해준에 익숙해지는 시간도 줬다. “내 모습을 좋아해주실까, 조심스러운 마음은 있었어요. 내 얘기를 하고 내 것을 표현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서 저 역시도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고요.”
김해준은 “자존감을 높이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나 스스로 날 깎아내리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 준이 없을 때 직접 해주세요 “어? 예쁘네”
그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태권도를 했다. 부모는 그가 체육 교사가 되기를 바랐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코미디언이 되려고 연극영화과에 지원했다. 부모는 반대했다는데, 그가 정작 코미디언을 꿈꾼 데는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아버지께서 제게 마술을 보여주신 적이 있는데, 정말 행복했어요. 그래서 그 마술을 주변 친구들에게 그대로 보여줬는데, 친구들이 저를 보면서 똑같이 행복해하더라고요. 그게 좋아서, 그때부터 코미디언을 꿈꿨어요.” 그렇게 그는 ‘행복을 주는 사람’으로 자라났다. 어쩌면 그것이 아버지의 진짜 ‘마술’이었는지도 모른다. ‘코미디로 사람들에게 무엇을 주고 싶은가’라는 물음에 그는 “웃음과 따뜻함”이라고 답했다.
그의 코미디는 상대에게 자신감을 불어넣는다. 최준은 음치인데 자신감 하나로 가수의 곡을 내 곡처럼 만들어버린다.(‘니곡 내곡’) ‘뮤지컬 스타 김민준’은 조금은 어설퍼도 노력하면 누구나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 같다. 김해준도 최준으로 활동하면서 자신감을 얻었다. “최준의 에스엔에스 디엠(다이렉트 메시지)으로 어떤 분이 장문의 메시지를 보낸 적이 있어요. 우울증으로 약을 먹었는데 최준 때문에 더는 안 먹게 됐다고. 위로를 받으셨나 봐요. 당시는 최준한테 오는 디엠의 30%가 비슷한 내용이었어요.” 그는 “캐릭터의 중요성과 책임감을 더 느끼게 됐다”며 “앞으로도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캐릭터를 계속 고민하고 만들어나가고 싶다”고 말했다.
우리 곁에 늘 최준이 있을 순 없다. 일상에서 ‘최준 효과’를 느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자존감을 높이는 데 가장 중요한 건 나 스스로 날 깎아내리는 말을 하지 않는 거라고 생각해요. ‘오늘도 예쁘네’ ‘할 수 있어’처럼 나를 사랑하고 응원하는 말을 하면 내가 들어요. 내가 나를 사랑해야 남도 나를 사랑해줘요. 의식적으로라도 자신을 위한 말을 해보세요. 긍정적인 생각이 좋은 결과를 만든다고 믿어요. 말의 힘이 있어요.” 김해준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