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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윤은혜, 주눅 든 소녀는 어떻게 칭찬 받는 ‘금손 언니’가 되었나

등록 2023-03-23 07:00수정 2023-03-23 13:25

[쉼톡] 충분히 잘하고 있는, 배우 윤은혜
자존감이 매우 낮아요
중3, 준비 안된채 가수 데뷔
스스로한테 자신이 없었다
무대위 주눅 든 소녀가
‘멋진 언니’ 흉내내던 시절

‘여기서 잠깐, 쉼톡’은 각자의 삶에서 가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해온 대중문화인의 이야기를 담은 기획입니다. 소소하더라도 자신만의 한 가지를 가진 이들의 이야기는 듣는 이의 마음을 데웁니다. 타인의 삶을 자신의 잣대로 결론 내리지 말자는 취지이기도 합니다. 대중문화인의 진솔한 이야기에 귀 기울이다 보면, 나의 삶에 스며드는 것도 있지 않을까요.

제이아미엔터테인먼트 제공
제이아미엔터테인먼트 제공

그가 가진 재능에 견줘 평가가 가혹했던 것은 아닐까.

윤은혜를 만나 든 생각이다. 그는 여러 방면에서 잘해온 ‘올라운드 플레이어’였다. 중학교 3학년 때인 1999년 걸그룹 베이비복스로 데뷔해 가수로 사랑받았고, 22살에 드라마 <궁>(문화방송)을 시작으로 배우로도 성공했다. <일요일이 좋다-엑스맨>(에스비에스)으로 대표되는 예능프로그램에서 활약은 또 어떻고. <아가씨를 부탁해>(한국방송), <보고싶다>(문화방송) 같은 드라마에서 ‘윤은혜 패션’이 화제가 되며 유행의 아이콘인 적도 있었다.

그런데도 ‘윤은혜’ 하면 그가 ‘잘한 일’보다 ‘부족했던 순간’이 더 많이 회자됐다. 지난달 17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난 윤은혜도 이렇게 말했다. “데뷔하고 가수로 활동하면서 칭찬받은 적이 없어요. 전 평가에 약해요. 칭찬 한마디에 힘을 얻어 나아가고, 그걸 못 들으면 너무 많이 좌절해서 멈추는 유형이에요. 그래서 늘 칭찬에 목말랐어요.” 연기도 “가수 시절 카메오로 출연했더니 ‘잘한다’는 소리를 들어서 용기 낼 수 있었다”고 했다.

그 목말랐던 ‘칭찬’을 윤은혜는 최근 몰아서 듣고 있다. 지난해 <놀면 뭐하니>(문화방송)에서 정지소, 박진주 등과 프로젝트 그룹 ‘더블유에스지(WSG) 워너비’로 활동하면서 시청자들은 잊고 있던 그의 음색을 떠올렸다. 최근에는 유이, 오마이걸 효정, 손호준과 함께 출연한 <인생에 한 번쯤, 킬리만자로>(티브이엔)에서 남을 챙기는 배려심으로 눈길을 끌었다.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의 영향으로 그가 출연한 드라마 <궁> <커피프린스 1호점>(문화방송)이 다시 소환되어 배우 이력도 재평가되고 있다.

칭찬을 갈망한 이유

“<놀면 뭐하니> 이후 예능에 나갈 수 있었던 것도 잘했다는 칭찬 덕이 커요. 전 말의 힘을 믿어요. 제가 칭찬에 갈증 내는 것도 그 힘을 알기 때문이에요. 활동할 당시에는 ‘나는 그런 의도가 아닌데’ 하면서 속상했지만, 돌아보면 제가 자존감이 낮아서 남의 말에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일 수도 있어요. 전 스스로한테 자신이 없어요. ‘잘한다’, ‘이게 맞다’ 늘 확인받고 싶어해요. ‘잘 한다’는 소리로 확인받고 싶었던 것 같아요.”

10여년 만에 언론사와 단독 인터뷰를 한다는 그는 불쑥 이렇게 고백했다. 많은 사람 앞에서 늘 자신감 넘치는 당당한 모습으로 서있어야 하는 ‘셀럽’이 “자존감이 낮다”는 속내를 털어놓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는 “과거에는 이런 모습 감추려고만 했다면, 이제는 이런 나 자신을 인정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칭찬 덕에, 칭찬 때문에…
나를 배우로 만든 한마디
‘잘한다!’
채경, 은찬, 혜나로 떴지만
도전 앞에선 또 머뭇댔다
‘잘해낼 수 있을까?’

“칭찬을 갈구하는 건 인기와는 관련 없는 것 같아요. 스스로한테 자신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죠. 전 너무 어린 나이에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데뷔했어요. 그래서 지금 그 시절의 제 모습이 부끄러워요. 우리 때는 완벽하게 준비하고 데뷔하는 시스템이 아니었어요. 방송을 해나가면서 콘셉트를 정하기도 했죠. 특히 전 오디션에 합격한 뒤 바로 투입됐어요. 춤이나 노래, 비주얼적으로도 얼마나 부족했겠어요.”

베이비복스는 요즘 걸그룹이 추구하는 ‘걸크러시’의 선구자다. ‘멋진 언니’ 이미지로 특히 여성팬이 많았다. ‘와이’, ‘킬러’처럼 강렬하고 섹시한 곡들이 주로 사랑받았다. 그 안에서 주눅 든 한 소녀가 ‘당당한 여성’을 흉내내고 있었다는 사실은 누구도 알지 못했다. “나이에 맞지 않는 옷을 입어야 해 괴로웠던 적도 있어요.” 10대 연예인에 대한 배려가 없던 시절에 그는 춤추고 노래하면서 발목 부상과 무릎 통증 등 고질병을 얻었다.
윤은혜의 기록들. 왼쪽부터 2006년 &lt;궁&gt; 신채경, 2007년 &lt;커피프린스 1호점&gt; 고은찬, 2009년 &lt;아가씨를 부탁해&gt; 강혜나. 문화방송·한국방송 제공
윤은혜의 기록들. 왼쪽부터 2006년 <궁> 신채경, 2007년 <커피프린스 1호점> 고은찬, 2009년 <아가씨를 부탁해> 강혜나. 문화방송·한국방송 제공

“되도록 가수 활동 시절 이야기를 안 하려고 해요. 방송에서 하면 자료화면으로 싫다는 장면을 다시 보여주니까요. 자료화면을 굳이 쓰겠다면 차라리 ‘인형’이나 ‘게임오버’로 활동할 때 영상을 사용해주면 좋겠어요.(웃음) 다 힘들었는데 이 두 곡은 재미있게 활동했어요.” 베이비복스는 5집 <인형> 때부터 이전 콘셉트와 다르게 발랄한 느낌을 더했다. 이때 윤은혜의 잠재력이 나타났다.

칭찬이 ‘배우’를 만들다

말 한마디는 그를 움츠러들게도 했지만, 기지개를 켜게도 했다. 윤은혜는 목말랐던 칭찬 한마디를 좇아오면서 연기자의 길에 들어섰다. “가수 시절 카메오로 여러 작품에 출연했어요. 현장에 있던 분들이 제 연기를 보고 잘한다고 하더라고요. 칭찬을 엄청 해주시는 거예요. 어린 마음에 신이 난 거죠. ‘내가 정말 그렇게 잘했나?’ 싶어서 모니터를 봤더니 ‘이 정도로 내가 칭찬을 받아?’ 싶은 거죠. 그러면서 생각했어요. ‘내가 더 노력해서 더 잘하면 더 좋은 이야기를 해주겠구나.’ 그래서 재미있어졌어요.” 칭찬이 ‘배우 윤은혜’를 키워낸 동력이다.

그러나 연기력이 칭찬을 먹고 늘지는 않는다. 윤은혜는 노력했다. 그가 데뷔작 <궁>에서 ‘채경’을 맡게 됐을 때는 원작 만화 팬들의 반대가 심했다. “왜 보지도 않고 나를 반대할까?”라는 울분과 “방송을 보고 좋아하게 만들겠다”는 패기가 더해져 그는 <궁>으로 배우 신고식을 화려하게 치러냈다. 그는 “<궁>에서 처음으로, 노력하는 만큼 뭔가가 보인다는 성취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칭찬을 받으려는 마음이 때론 스스로를 힘들게 했다. <궁>에서 인기를 얻고 나니 윤은혜는 곧 채경이었다. 그가 영원한 채경이기를 바라는 애청자도 있었다. “염색을 하면 채경 캐릭터를 무너뜨린다는 비난도 들었죠. 지금 생각하면 다른 작품에서 또 잘하면 되는데 당시에는 채경을 사랑하는 분들의 마음에 보답하고 싶었다고 할까요. 그래서 늘 차기작을 선택하는 게 힘들었어요.”
데뷔작 &lt;궁&gt;. 문화방송 제공
데뷔작 <궁>. 문화방송 제공

채경과 완전히 다른 모습의 ‘은찬’(<커피프린스 1호점>)을 만났고, 은찬과 다른 ‘혜나’(<아가씨를 부탁해>)가 되어, 시청자의 기대와 자신의 한계를 계속 뛰어넘어 왔다. “은찬이 남장여자였으니 여성스럽고 화려한 캐릭터를 맡아서 패션으로 화제를 모으자고 생각했어요. 그 목적은 달성했으니 성공했다고 생각합니다.” 작품마다 성공했지만 윤은혜한테는 연기 잘한다는 칭찬이 박하다. 그는 “제가 그럴 만한 뭔가를 더 보여주지 못했다. 앞으로는 더 많은 것을 보여주면 된다”고 했다.

그는 촬영 전에는 잠을 잘 못 잔다고 했다. ‘잘해낼 수 있을까? 이것도 준비해야 하나?’ 상념이 이어지는 밤이면 사람을 향한 마음도 깊어진다. “<커피프린스 1호점>을 하면서는 그 사람들이 너무 좋고 헤어지기 싫었어요. 미리 다 상상을 해버리는 거예요. ‘앞으로 이 사람과 몇번을 만날 수 있을까?’ 혼자 생각해서 판단하고 그러면서 기쁘고 슬프고. 뭔가 설명하기 쉽지 않은데. 너무 다 좋았고 사랑했고. 내가 이렇게 마음을 줄 수 있다는 걸 이 작품을 하면서 느꼈어요.”

마음 비우고 새로운 도전!

윤은혜는 뜨개질, 요리, 네일아트까지 재주가 많다. 이날 인터뷰에 함께 자리한 매니저가 두른 목도리도 윤은혜가 짠 것이라고 한다. 예능 프로그램 <인생에 한 번쯤, 킬리만자로>에서도 한국에서 직접 가져간 재료들로 끼니마다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화제를 모았다. “어렸을 때부터 손으로 하는 건 다 잘했어요. 배웠다기보다는 그냥 할 줄 알게 된 것 같아요.”

마음을 비우니 마음이 열렸다
연기로 노력 뒤 성취 맛보고
예능선 그대로의 나 드러내며
‘어떤 모습도 괜찮다’ 믿게 돼

윤은혜는 ‘금손’이다. 매니저가 증언했다. “요리를 굉장히 잘하는데 본인이 먹고 싶을 때 화려하게 요리해서 차리지 않아요. 주변 사람들을 먹이려고 만들죠. 은혜는 베푸는 걸 좋아합니다.” 윤은혜는 “내가 먹거나 가지려고 만드는 건 귀찮고 남들한테 해줄 때가 행복하다”고 했다. 뭐든 조금씩 다 잘하는 모습을 보고 누리꾼들이 ‘금손’ ‘금손 언니’라는 별명을 지어줬다.

윤은혜는 “사람한테 마음을 열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마음을 주고 다치지 않게 방어벽을 쳐왔는데 이제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다 사랑할 수 있겠다는 믿음이 생겼다”고 한다. 더는 일에서도 삶에서도 다른 모습을 보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는 “나는 ‘와일드하지 않고 여성스러운 사람인데 내가 가진 걸 연기해도 쉽지 않은데 내게 없는 걸 연기해도 괜찮을까?’ ‘반창고 알레르기가 있는데 액션 연기가 괜찮을까’ 이렇게 스스로 한계를 정해왔다. 이제는 내가 도전해도 어떤 모습을 보여도 사람들이 있는 그대로 봐줄 거라는 믿음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윤은혜의 대표작이나 명작 드라마 &lt;커피프린스 1호점&gt;. 문화방송 제공
윤은혜의 대표작이나 명작 드라마 <커피프린스 1호점>. 문화방송 제공

그가 지난 10년간 힘든 시절을 이겨낸 데는 종교도 큰 힘이 됐다. 최근 그가 한 간증하는 영상이 인터넷에 떠돌기도 했다. 연예인이 특정 종교에 집중하는 모습이 공개된 게 불편하다는 의견도 분분했다. 하지만 윤은혜는 연예인으로서 민감할 만한 질문에도 흔쾌했다. “‘이 영상 누가 올렸냐”며 당장 교회에 항의했을 것으로 생각했다”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아니요. 전 오히려 제 영상에 달린 비판 목소리에 간증하려는 사람들이 줄어들까 봐 걱정했어요. 교회마다 간증 방식이 달라요. 콘서트처럼 신나게 하는 교회도 있어요. 너무 많은 미디어에서 (간증을) 왜곡해 표현해서 선입견이 생긴 것 같아요.(웃음) 그렇지만 제 모습에 당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은 들어요.”

등산을 힘들어 하는 그가 예능 프로그램에서 킬리만자로에 오른 것은 “마음을 다잡기 위해서”였다. “<놀면 뭐하니> 이후 사랑받고 싶다, 일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어요. 그동안 그런 마음을 다 비워내고 강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쉽게 무너지더라고요. 그래서 나와의 싸움을 해보자고 했어요. 다녀오고 다시 마음을 비워냈어요.” 윤은혜는 사랑받는 순간 인정받고 싶어지고, 그게 마음처럼 안될 경우 다시 칭찬을 갈구하는 그때로 돌아가게 될까 봐 두려운 것은 아닐까. 16살(우리 나이)의 윤은혜를 만나 말해주고 싶다. “넌 충분히 잘하고 있어. 그러니 자신감을 가지라”고.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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