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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씨네21’ 정훈이 만화가님 고맙습니다…남기남은 영원히 우리 곁에

등록 2022-11-07 11:46수정 2022-11-08 02:52

[가신이의 발자취] 정훈 작가를 기리며
지난 5일 세상을 떠난 정훈 작가의 만화를 이용해 한국영상자료원이 만든 추모 메시지. 한국영상자료원 인스타그램 갈무리
지난 5일 세상을 떠난 정훈 작가의 만화를 이용해 한국영상자료원이 만든 추모 메시지. 한국영상자료원 인스타그램 갈무리

지난 5일 세상을 떠난 정훈 작가는 1996년부터 2020년까지 25년간 영화주간지 <씨네21>에 영화 제목을 패러디한 두쪽짜리 만화를 연재했다. 내가 정 작가의 담당 편집기자가 된 것은 2000년 말 <씨네21>에 입사하면서부터였다. ‘정훈이 만화’라고 불렸던 만화는 비디오로 출시된 영화의 내용을 패러디하는 내용이기도 했고, 극장 상영 중인 영화에서 영감을 얻었으나 영화의 내용과는 관계없는 엉뚱한 내용이기도 했다. 자주, 그 시대의 사회 분위기를 영화 제목이나 내용에 빗댄 우화적 분위기로 진행되었다.

정훈이 만화는 신입 편집기자가 담당하기에는 쉽고도 어려운 지면이었다. 쉬운 이유는 일절 손보지 않고 실을 수 있어서였다. 교열이나 편집 작업을 따로 할 필요 없이 원고를 받아 지면에 앉히기만 하면 됐다. 어려운 이유는 무시무시할 정도로 마감을 못 맞춰서였다. 당시에는 토요일에도 근무했는데, 수요일이나 목요일에 전화를 걸어 “어떤 영화를 그리실지” 확인한 뒤, 금요일부터 토요일에 이르는 동안 틈틈이 마감 진척 상황을 묻는 일이 필수적이었다.

&lt;씨네21&gt;에 25년간 ‘정훈이 만화’를 연재한 정훈 작가. &lt;씨네21&gt; 자료사진
<씨네21>에 25년간 ‘정훈이 만화’를 연재한 정훈 작가. <씨네21> 자료사진

정 작가는 <씨네21>의 모든 필자 중 가장 마감이 늦었다. 나는 그가 어차피 마지막 날 아침 해가 밝을 즈음에야 마감하리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전화를 걸어,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원고를 독촉했다. 아무리 마감이 늦어도 안정숙 당시 <씨네21> 편집장은, 정훈이 만화가 들어오면 천천히 읽고 나서는 꼭 재미있다는 소감을 남긴 기억이 난다. 2000년대 <씨네21>에 마감이 늦는 필자가 한둘이 아니었는데, 그들 모두 정 작가를 경쟁자로 생각했다. 지금은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을 맡은 허문영 당시 편집장은 종종 ‘에디토리얼’(편집장 칼럼)이 잘 안 풀리는 날이면 “정훈이 만화 들어왔나?” 하고 확인하곤 했다. 그 후로도 많은 <씨네21> 편집장들이 정훈이 만화와 마감 꼴찌를 겨루었다.

마지막 몇년간은 카카오톡으로 마감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으나, 마감이 늦는다 싶으면 나는 여전히 ‘압박용’ 전화를 걸곤 했다. 그렇게나 긴 시간을 담당했는데 가장 자주 한 대화가 “이번 주에 어떤 영화 그리세요?” “얼마나 남으셨어요?” “언제 마감될까요?”였다. 정 작가는 늘 “이제 끝나갑니다” “마지막 컷이 생각이 나지 않네요” “죄송합니다. 영화를 바꿔야 할 것 같아요” 같은 말로 응수하곤 했다. 늦는다 해도 펑크는 없었다.

다만 한번, “이번 주는 마감을 하지 못하겠다”는 연락을 미리 받은 적이 있었다. 그날은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통과된 날이었다. 토요일 마감이던 시절이라 금요일에 한창 바쁘던 와중이었는데, 정 작가로부터 연락이 왔다. 이런 시국에 마감을 하고 있을 수는 없어 시위에 나가야 하고, 그래서 마감을 한주 쉬었으면 한다고. 그때를 제외하면 정 작가는 연재 내내 마감을 지켰다.

정 작가의 <씨네21> 연재 시작-휴재-재개-종료의 사이클은 종이매체, 영화주간지의 흥망성쇠와도 궤를 같이했고, 그 사이에 많은 것들이 변했다. 원고를 직접 외장 하드에 담아 사무실을 방문하던 시절부터 카카오톡으로 마감 확인을 하는 때까지 말이다. <씨네21> 편집부와 정 작가의 관계도 점차 변화를 겪었다. 초창기 정훈이 만화에는 <씨네21> 편집부 풍경이 종종 등장했다. 그가 연재를 시작한 당시에는 조선희·허문영·남동철 당시 편집장, 구둘래 당시 편집기자를 포함해 그가 알던 얼굴들이 만화에 등장하곤 했다. 하지만 모든 게 전화와 온라인으로 가능해지면서, <씨네21> 기자들의 퇴사와 입사가 거듭되면서 그는 아는 얼굴들을 잃어버렸다. 언젠가 부산국제영화제 기간에 부산에 방문한 그와 만나 저녁 식사를 함께한 일이 있는데, 그가 안부를 궁금해한 기자들은 전부 퇴사한 지 몇 년은 지난 선배들이었던 기억이 난다. 정 작가 입장에서는 단순히 아는 사람이 사라진 게 아니라, 아마도, 정훈이 만화를 즐겁게 읽고 피드백하는 동료들이 사라진 기분이었으리라 생각한다.

많은 구독자들은 <씨네21>을 받으면 정훈이 만화가 있는 맨 마지막 페이지부터 읽곤 했다. 독자엽서에도 그런 말이 적혀 있었고, 내가 만나는 많은 독자들 역시 그렇다고 했다. 정훈이 만화는 영화주간지가 할 수 있는 경쾌한 분위기의 시사만평이었다. 가끔 영화는 그저 핑계로 보이기도 했다. 정훈이 만화 레전드라는 회차들은 대체로 당대의 사회 분위기를 예민하게 포착한 것들로, 유행어나 정치 만평에서 볼 수 있는 표현들이 가미되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연한 영화 이야기였다. 애정 어린 시선으로 한국사회를, 영화를, 인간을 바라보고 포착하던 그의 만화를 다시 읽는다. 아마 그것이야말로 그의 세계가 우리를 떠나지 않게 하는 최선의 방법이리라.

이다혜 <씨네21> 기자·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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