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티김이 지난 7일 <불후의 명곡>(KBS2) 녹화에 참여해 은퇴 10년 만에 관객 앞에 섰다. 한국방송 제공.
“1958년 봄이었나 이른 여름이었나, 직장을 구하려고 명동을 걸어 다니며 쇼윈도에 붙은 구인·구직 공고를 열심히 보던 때였어요. 그러다 우연히 만난 오빠 친구가 ‘너 노래 잘했었는데, 한번 해볼래?’ 묻더라고요. 그 한마디가 제 인생을 바꿔놨어요.”
지난 7일 서울 여의도 <한국방송>(KBS) 신관홀 <불후의 명곡> 녹화장. 가수 패티김이 은퇴하고 10년 만에 다시 무대에 섰다. 그의 상징과 같은 곡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을 부른고 난 뒤 데뷔 때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오빠 친구 따라 오디션을 보고 주한 미군 쇼에 투입됐어요. 조금 있으니 듀엣을 하라더군요. 이듬해에는 단원 전체가 6개월 마다 치르는 정기 오디션에서 혼자 스페셜에이(A)를 받아서 1959년 20살에 솔로로 무대에 섰어요. 노래 잘하는 가수가 나왔다는 소문이 도니까 박춘석 작곡가가 저를 찾아왔어요. 그래서 받은 곡이 1962년 ‘초우’였어요. 저의 첫 가요곡이죠. 저의 솔직한 데뷔과정입니다.”
이날 <불후의 명곡> 녹화는 낮 12시30분부터 밤 11시까지 이어졌다. 3회 분량을 연이어 촬영했기 때문이다. 후배 가수 14명이 패티김의 노래를 한곡씩 편곡해 불렀다. 여기에 패티김이 들려주는 노래에 얽힌 사연이 더해지니, 이날 녹화는 디바의 탄생기를 보는 것 같았다. ‘처음부터’ 정상의 자리에 있었던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의 64년은 노력의 반복이었다. 그는 “다시 무대에 선 것이 60년 전 데뷔 때만큼 설레고 긴장되고 행복하다”고 했다. 패티김이 <불후의 명곡>에서 보여준 여전함과 그곳에서 나눈 이야기로 ‘64년 디바의 삶’을 들여다봤다.’
지난 7일 <불후의 명곡>(KBS2) 녹화에 참여한 패티김. 한국방송 제공.
패티김은 2012년 은퇴 직전에 <불후의 명곡>에 출연했지만, 은퇴 이후에는 줄곧 제작진의 출연 제안을 거절했다. 이번에 마음을 바꾼 이유에 대해 그는 “케이(K)팝이 전 세계를 움직이고 있는 게 뿌듯하고 자랑스러웠다. 이들이 10년 전, 20년 전 노래를 어떻게 해석하고 부를지 궁금했다”고 말했다.
이날 녹화에서도 그는 후배들의 무대를 보면서 자신의 곡이 국악, 리듬 앤드 블루스 등 다양한 장르로 변주된 것에 특히 기뻐했다. “여러분의 음악을 들으며 질투 날 정도로 부러운 게 편곡이에요. 제 시대에 최고의 편곡자들도 지금과는 비교가 안 돼. 편곡자와 연주자 실력이 좋아서 들으면서도 흐뭇하고 고맙네요.”
박기영과 서제이의 노래가 끝난 뒤에는 가창력 비법도 알고 싶어 했다. “여성 보컬리스트들이 무엇을 먹기에 고음처리가 잘될까요. 나도 옛날에는 잘했는데 여기선 명함도 못 내밀겠어. 생활방식이 달라서 그러나 진짜 궁금하네.” 패티김은 “포레스텔라와 노래하고 싶다”고도 했다. “우리 시대에는 이런 남성 4중창이 없었잖아요. 숲 속에서 별같이 아름다운 화음이 나오겠다고 생각했어요.” 좋은 음악을 들으면 행복해지는 마음 별개로, 내가 해보지 못한 것을 시도해보고 싶어하는 마음은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다. 패티김은 “음악은 나의 운명”이라고 말했다.
1958년 미8군 무대로 데뷔한 패티김은 박춘석 작곡가(사진 오른쪽)를 만나 첫 가요곡 ‘초우’를 발매했다. 연합뉴스
패티김은 무명생활 끝에 <불후의 명곡>으로 얼굴을 알린 김기태를 응원하면서 자신의 옛 이야기를 꺼냈다. “저도 무명생활이 있었어요. 1958년 노래를 시작하고 1962년 동남아시아 순회를 하고 1963년 ‘초우’ 발표하고 미국에 갔는데, 한국에서 ‘초우’가 히트를 했어요. 노래는 히트했는데 가수는 없는 거죠. 1966년에 귀국했더니 내가 스타가 되어 있는 거예요. 그전까지 전 이름없는 가수였어요.” 미국에서는 5년 안에 솔로 데뷔 계획을 세웠지만, 시장이 만만하지 않았다. 인종차별과 이방인으로 설움도 겪었다. 그는 데뷔 4개월 된 아이돌 그룹 첫사랑에 “일어서기만 하면 된다. 걷고 달리는 건 쉽다”며 힘을 줬다.
지금의 패티김이 존재하는 데는 꿈을 향해 도전하고 달려가는 것 자체를 기뻐했던 열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진행자 신동엽은 “패티김은 ‘최초’의 시도를 많이 한 아티스트”라고 했다. 실제 패티김은 한국 대중문화의 역사를 썼다. 한국 최초의 창작뮤지컬 여자 주인공이 바로 그다. “미국에서 뮤지컬을 접한 뒤 흥미를 느껴 오프 브로드웨이 작품 <플라워 드럼 송>을 1년6개월 했어요. 한국에 와서 우리나라 창작뮤지컬 1호 <살짜기 옵서예>(1966)에 처음 출연했죠.” ‘사랑이란 두글자’는 이른바 ‘후크송’을 처음 시도한 노래다. “당시에는 같은 가사와 멜로디를 반복하는 곡이 없었어요. 1970년도에 그런 작곡을 시도한 길옥윤 선생이 굉장히 앞서 있었던 것이죠.” 1989년에는 한국 가수 최초로 미국 카네기홀에서 공연했고, 그러면서 최초의 한류 가수도 됐다.
옥주현은 “선생님(패티김) 라이브 무대를 지금도 보는데 (음의) 높고 낮음의 폭이 높다”고 말했다. 패티김의 음악적 기본기는 국악에서 나왔다. 그는 중학교 3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1년 반 국악을 배웠다. “국악반에서 나오는 국악 소리가 좋아서 듣고 있다가 배웠어요. 그때 교습비가 없었는데, 선생님이 돈을 안 받고 1년 반을 가르쳐줬죠. 국악 콩쿠르대회에 나가서 창 부문에서 1등했어요.” 그는 “음악 기초 없이 노래를 했는데 국악을 배운 것이 기초가 됐다”고 말했다.
체력을 관리하며 호흡 등도 꾸준히 신경 써왔다. 그는 이날 총 세번의 개인 무대를 선보였다. “10년 잠겨있던 목소리를 며칠 만에 끌어올리는 게 쉽지 않았다”지만, 무대를 떠난 지 10년, 80대 중반의 나이에도 변치 않은 실력을 선보였다.
옥주현은 이렇게 말했다. “패티김 선생님과 따로 식사 자리를 가진 적이 있어요. 그때 선생님이 ‘은퇴하는 날 도넛 한 개를 다 먹을 거야’라고 하셔서 놀랐어요.” 자기 관리 잘하기로 소문난 옥주현도 “선생님은 못 따라갈 정도”라고 했다. 신동엽은 “패티김 선생님은 매일 운동하고 소식하고 술도 안 마시는 것으로 안다”고 했다. 패티김은 “활동하는 동안에는 도넛 한 개를 다 안 먹었다. 늘 운동을 했다”고 말했다. 긴 녹화에 참여한 그는 3부에서 다소 지친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후배들의 노래를 들으며 다시 에너지를 찾았다. 그는 이날 녹화에서 백발을 하고 다양한 의상을 소화하며 남다른 패션 감각도 보여줬다. 청바지에 흰 셔츠가 잘 어울렸다.
패티김이 지난 7일 <불후의 명곡>(KBS2) 녹화에 참여해 후배들의 노래를 듣고 있다. 한국방송 제공.
이날 객석 경쟁률은 평소 8대1보다 갑절이 넘는 18대1이었다. 출연 가수만 14팀. 포레스텔라, 황치열, 디케이지(DKZ) 등 출연자들의 장르와 세대도 다양했다. 옥주현은 처음으로 이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옥주현은 “나에게 많은 영향을 주신 분이다. 뮤지컬 <레베카>의 ‘댄버스 부인’ 캐릭터를 패티김 선생님을 떠올리며 잡아나갔다”고 말했다.
10년 만에 나타난 ‘나의 스타’를 보려고 팬들도 몰려들었다. 팬들은 “좋았다” “기뻤다”는 말보다는 “감사했다” “건강히 오래오래 계셔달라”는 말을 더 많이 했다. “선생님 공연은 다 보러 다녔다”는 한 중년 여성과 “선생님을 보려고 대구에서 왔다”는 한 중년 남성은 “그리웠고, 건강하시고, 또 좋은 공연 기다린다”고 말했다. 다음 무대를 쉽게 기약할 수 없지만, 팬들은 이별 인사와 함께 다시 만날 것을 약속했다. 은퇴한 지 10년이 됐지만, 팬들의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패티김은 “긴 세월 나타나지 않은 것을 송구스럽게 생각하면서 여러분들이 많이 고맙다”며 울컥하는 모습을 보였다.
명곡의 힘은 강했다. 이날 녹화에는 18살 남자 고등학생 정재훈군이 참여했다. 그는 15살 때 패티김의 노래를 듣고 팬이 됐다. 정재훈의 어머니는 “화재비상벨이 잘못 울렸는데 재훈이가 패티김 선생님 엘피(LP)만 들고나오더라”며 아들의 ‘팬심’을 증언했다. 패티김은 “15살이 내 노래를 좋아한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이 친구를 통해 좀 더 자신감이 생겼고, (내 음악이) 나이와 관계없이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줄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대단히 기뻤다”고 말했다. 10년을 기다려준 팬, 잊히지 않은 노래, 그의 마음속 열정까지. 이번 무대가 패티김한테 어떤 설렘을 준 것은 확실해 보였다. 패티김은 “빨리 뵙자”는 팬들의 인사에 “10년보다 더 이른 시일 내에 찾아뵐 것을 약속한다”고 말했다. <불후의 명곡> ‘패티김’편 1부는 오는 26일, 2부는 12월3일, 3부는 12월10일에 방영한다.
<불후의 명곡>(KBS2) 녹화에서 후배들과 함께 무대에 오른 패티김. 한국방송 제공.
<불후의 명곡> 제작진이 총3부 분량으로 방송을 구성한 것은 조용필과 패티김 편뿐이다. 그만큼 이들 ‘전설’의 명곡이 많다는 뜻이다. 패티김의 명곡은 전 남편이자 작곡가 길옥윤 선생을 빼놓고는 설명하기 어렵다. 패티김은 어머니 병환이 깊어져서 1966년에 미국에서 돌아왔고, 일본에서 작은 밴드를 했던 길 선생도 비슷한 시기에 한국에 돌아왔다. 두 사람은 연인이 됐고, 결혼했다.
이들은 시작부터 특별했다. 신혼여행으로 베트남 파병 장병 위문 공연을 갔다. “전 유럽에 가고 싶었는데, 길 선생이 가자고 하니 기타 하나 색소폰 하나 들고 갔죠. 죽을 고비도 넘겼지만, 지금까지 한 공연 중에서 가장 훌륭했어요. 길 선생의 아이디어니 (카메라를 보며) 박수받으십시오.”
두 사람은 헤어진 뒤에도 좋은 가수와 작곡가 사이를 유지했다. “우리가 작곡가와 가수로서는 이 이상 훌륭한 커플이 없다. 이혼하더라도 좋은 곡 써서 나 주고 나는 열심히 부르겠다고, 제가 길 선생한테 부탁했어요.” 공사를 구분할 줄 알고, 감정에 치우치지 않는 프로 정신도 그가 최고의 디바 자리를 지킨 비결 중 하나다. 명곡에 얽힌 사연을 패티김이 밝혔다.
―‘이별’이 이혼송?
“별거 중이었는데, 길 선생이 곡 썼다고 들어보라고 전화했어요. 가사, 멜로디 다 좋아서 잘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원래 곡명은 ‘어쩌다 생각이 나겠지’였는데 제가 ‘이별’로 바꾸자고 했어요. 그러고 나서 이혼하니 이 곡이 ‘이혼송’이 됐어요. 제목을 바꾸는 게 아니었는데.”
―‘그대없이는 못살아’가 해피송?
“들으면 해피송 같은데, 내막은 그렇지 않아요. 남편이 잘못하고 나서 제자를 통해서 이 노래를 보내왔어요. 잘못했으니 용서해달라는 거죠. 늘 노래를 만들어서 사과했어요. 2~3일 연락도 안 되는데 노래 한 곡 쓱 보낸다고 금방 용서가 될까요? 판정은 판정단(불후의 명곡 관객) 여러분한테 맡기겠어요.”
―‘이혼식’? 실은…
“이혼할 때 여러 말이 오르내리니까 궁금해하는 사람들을 다 부르자, 이렇게 된 거죠. 그래서 멋지게 기자회견을 했더니 언론에서 그걸 이혼식이라고 붙였어요. 끝나고 걸어 나오는데 어색해 보여서. ‘우리 이러고 걸어갑시다’라면서 제가 길 선생 허리를 감싸고 걸어나갔어요. 뒤에서 (카메라 누르는) 소리가 들리는데 다음날 언론에 사진이 나왔더라고요.”
남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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