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니바켄 기념품 가게의 서점에는 아이들이 편하게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도 마련돼 있다. 김은형 기자
바사박물관, 아바박물관 등 스톡홀름의 주요 박물관들이 모여있는 유르고르덴 지역에는 ‘삐삐박물관’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유니바켄’이 있다. ‘삐삐 롱스타킹’과 더불어 세계적 어린이문학 작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1907~2002)이 창조한 사랑스러운 캐릭터인 ‘마디켄’의 이름을 딴 이곳은 아이들이 놀이를 통해 문학으로 가는 통로다. 삐삐의 캐릭터들과 이야기 무대뿐 아니라 스웨덴의 그림책 고전인 스벤 노르드크비스트의 ‘핀두스’ 시리즈, 요즘 사랑받는 작가인 스티나 비르센의 작품 등 스웨덴 어린이문학에 획을 그은 캐릭터와 이야기 배경에서 뛰어놀 수 있다. 삐삐가 살던 집을 재현한 2층은 아이들의 놀이터이자 주말마다 삐삐 연극이 공연되는 무대이기도 하다. 상설전시와 특별전시 공간으로 나뉜 이곳의 특별전시는 6개월~1년 주기로 바뀌는데 지금은 무민의 이야기 무대를 재현한 놀이터와 무민의 책으로 알파벳을 익히면서 아이 스스로 단어를 조립해보는 ‘마술모자’ 방으로 꾸며져 있다.
스톡홀름 유니바켄(삐삐박물관)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 김은형 기자
린드그렌 생전인 1996년 개장한 이곳은 연 31만명의 아이와 어른들이 찾는다. 지난 10월25일(현지시각) 이곳에서 만난 토마스 비어(76)는 아내 잉헬과 손녀 노바(5), 손자 엔조(2)와 이곳을 찾았다. 비어는 “린드그렌은 세대를 막론하고 전 국민이 사랑하는 작가이자 스웨덴 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친 운동가였다”면서 “손주들도 그들의 부모도 삐삐를 보면서 자랐다”고 말했다.
“삐삐”를 외치며 뛰어다니는 엔조가 사랑하는 ‘스토리열차’는 유니바켄의 하이라이트. 간이역 의자처럼 생긴 리프트를 타고 움직이면서 <에밀은 사고뭉치> <지붕 위의 칼손> <산적의 딸 로냐> <사자왕 형제의 모험> 등 린드그렌의 주요 작품들을 하나로 연결한 이야기를 들으며 인형극 무대처럼 재현한 장면들을 보는데, 압도적인 정교함과 예술적 완성도로 아이뿐 아니라 어른들도 매료시킨다. 스토리열차뿐 아니라 매일 네 차례 열리는 연극 공연도 모든 보호자가 아이들과 함께 즐긴다.
유니바켄에서 재현되고 있는 삐삐의 집. 평소에는 아이들의 놀이터로, 주말에는 삐삐 연극을 하는 무대로 쓰인다. 김은형 기자
유니바켄의 ‘스토리열차’를 타면서 감상하는 이야기 무대의 한 장면. 김은형 기자
기자는 이날 스웨덴어 알파벳 모양의 빵을 이용해 요리사로 분장한 남자 배우 두명이 글자와 발음에 대해 알려주는 뮤지컬과 린드그렌이 어린 시절 할머니에 들었던 귀신 이야기를 각색한 무대를 봤다. 흥겨운 노래가 흐르는 교육적인 내용부터 두려움과 용기, 이해심 등의 감정을 보여주는 콘텐츠 등 유니바켄 공연 무대는 스웨덴 어린이문학만큼이나 다양한 결을 담고 있었다.
11년간 유니바켄의 프로그램 책임운영을 맡아온 산나 페데르센은 “이곳은 ‘책’과 ‘이야기’로 만들어진 공간이다. 아이들이 스토리열차나 연극 공연, 놀이터에서 이야기의 기쁨을 발견하고 이 기쁨이 독서로 이어지도록 프로그램을 짠다”고 말했다.
마지막에 들르는 기념품 가게는 캐릭터 상품만 파는 게 아니라 책을 더 많이 비치해둔, 책에 진심인, 스톡홀름에서 가장 큰 규모의 어린이 서점이기도 하다. 편하게 책을 읽을 수 있는 소파도 마련돼 있어 실컷 놀고 난 아이들이 여기저기서 책을 고르거나 읽는다.
유니바켄에는 스톡홀름에서 가장 큰 어린이서점이 있다. 다양한 프로그램을 즐기고 나온 아이들이 책을 볼 수 있도록 조성돼 있다. 김은형 기자
덴마크 코펜하겐 근교, 안데르센이 태어나고 유년시절을 보낸 오덴세에 위치한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하우스’(이하 안데르센하우스)는 지난해 전면 리뉴얼해 재개장하면서 건물 전체가 하나의 이야기로 탄생했다. 세계적인 건축가 구마 겐고가 설계한 이곳은 실력 있는 작가와 음악가, 설치미술가, 영화감독, 인형제작가 등이 참여한 프로그램과 작품들로 채워져 있었다. 특히 이 박물관은 일종의 책에 관한 박물관임에도 활자로 읽어야 하는 전시 소개 등을 최소화한 것이 특징이다. 입장할 때 덴마크어와 영어 등으로 들을 수 있는 헤드폰을 누구나 착용해야 하며 전시물 앞에 가면 헤드폰에서 나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감상한다. 어린 시절 엄마 아빠가 읽어주던 동화를 듣는 느낌으로 전시를 즐길 수 있도록 구성한 것이다.
안데르센하우스에서 전시를 감상하는 아이들. 김은형 기자
안데르센하우스에서 전시를 감상하고 있는 가족. 김은형 기자
특히 안데르센의 대표작 12편을 각기 다른 인터랙티브 작품으로 표현한 마지막 전시 공간은 실험적이면서도 작품의 핵심을 절묘하게 잘 담아 안데르센을 단순한 어린이문학 작가로 보지 않는 덴마크인들의 관점이 엿보인다. 책 모양의 스크린에 서정적 애니메이션으로 표현된 <성냥팔이 소녀>와, 앞에 서서 동작을 하는 모습과 다르게 움직이는 그림자를 보여주는 <그림자>를 비롯해 <인어공주> <눈의 여왕>등을 지나 마지막 <미운 오리 새끼>에서 어둡고 장중한 음악을 배경으로 움직이는 화면을 보면서, 버려지고 거절당하는 새끼 오리의 고독에 대해 안데르센(성우)의 목소리로 “이것은 나의 이야기이고 당신의 이야기이며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라고 말을 건네는 내레이션을 들으며 눈물이 그렁그렁해지는 중년 관객들도 눈에 띄었다. 십대 아이들과 함께 이곳을 찾은 에밀 라슨(46)은 “안데르센은 단순한 스토리텔러가 아니라 마음속의 원형과도 같은 존재다. 노인이 되어 다시 와도 똑같은 감동을 받을 것 같다”고 말했다.
안데르센의 대표작 중 하나인 <성냥팔이 소녀>를 서정적인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안데르센하우스의 전시. 김은형 기자
안데르센하우스에는 메인 전시관 밖에 아이들이 더 열광하는 공간이 있다. ‘빌 바우’라고 하는 놀이터다. 엄밀히 말해 놀이터라기보다는 아이들이 만드는 동화 세상이다. “동화를 사랑하고 창작한 안데르센의 열정을 아이들이 이어받아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 수 있도록 만든 곳”이라는 게 안내 직원의 설명이다. 전문 시나리오 작가들이 디자인한 다양한 테마 공간에는 공주와 왕자 드레스, 요리사, 우체국 직원, 농부, 사냥꾼 등 다양한 이야기 주인공의 코스튬이 크기별로 준비되어 있는데, 질적인 수준이 전문적인 공연 단체의 것처럼 뛰어나다.
안데르센하우스에 있는 ‘빌 바우’는 아이들이 동화 속 주인공이 되어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공간이다. 김은형 기자
안데르센이 태어나고 유년시절에 자란 덴마크 오덴세에 위치한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하우스. 김은형 기자
아이들은 아빠와 동화 속 기사 옷을 맞춰 입고 칼싸움을 하거나 예쁜 드레스를 골라 입고 동화 속 주인공이 된다. 아이들이 어린이문학을 접하는 것뿐 아니라 스스로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고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표현하도록 돕는, 일종의 창의력 교육 공간인 셈이다. 아이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연극으로 표현할 수 있도록 매일 한차례씩 워크숍이 열리기도 한다. 유니바켄에도 아이들이 직접 연극에 참여할 수 있도록 무대가 만들어져 있는데 코스튬뿐 아니라 전문적인 무대에 쓰이는 시스템과 흡사한 무대 조명까지 아이들이 자유롭게 써 볼 수 있도록 마련돼 있다. 아이들의 놀이터라고 해도 단순하거나 조잡하지 않고 어른의 공간과 다름없이 세련되고 질적인 수준이 높은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다. 어른에게도 감동을 주는 어린이문학과 아이들의 놀이터, 아이들이 어른처럼 존중받는 삶과 문학이 북유럽 민주주의의 출발점이 아닐까.
스톡홀름, 오덴세/글·사진 김은형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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