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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한·일 우정, ‘세계 유일의 해외 한국 미술관’ 꽃피우다

등록 2023-10-05 18:00

교토, 걸으며 생각하며 ㉕ ‘교토 고려미술관’ 설립자 정조문과 일본 ‘국민작가’ 시바 료타로의 동행
교토시 기타구에 있는 ‘고려미술관’ 전경. 설립자 정조문이 살던 집을 전시관과 연구소 등으로 개조한 것으로, 올해로 개관 35주년을 맞았다. 정치적으로 한국/북한 어느 쪽에도 기울지 않았지만, 최근에는 해외에 흩어져 있는 우리 문화재의 소재 발굴과 환수 노력에도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교토시 기타구에 있는 ‘고려미술관’ 전경. 설립자 정조문이 살던 집을 전시관과 연구소 등으로 개조한 것으로, 올해로 개관 35주년을 맞았다. 정치적으로 한국/북한 어느 쪽에도 기울지 않았지만, 최근에는 해외에 흩어져 있는 우리 문화재의 소재 발굴과 환수 노력에도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교토 창세기를 상징하는 가미가모신사(세계문화유산) 근처 주택가에 ‘고려미술관’(교토시 기타구)이 있다. 일본 문화의 중심지 교토에서 오직 한국 문화재만을 소장·전시하는 뜻깊은 곳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운영하는 인터넷 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이 미술관의 의의에 대해 ‘소장품이 모두 일본에서 수집된 한국 문화재이고 건립자가 ‘한국인’인 점, 그리고 한국 밖에 존재하는 세계 유일의 한국 문화재 전문미술관이라는 점’을 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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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 재일사업가 정조문이 1988년 설립

일본서 수집한 한국 문화재 1700점 소장

분단 현실 가슴 아파해 ‘고려’ 이름 사용

한일고대사 잡지 펴내며 ‘고대사 붐’ 주도

‘일본인들과의 교류·우정’ 설립에 큰 도움

도쿄 격려 모임 땐 당대 유명 지식인 운집

시바 료타로, 동지의식 가지고 큰 도움 줘

“시바의 문학에도 일정 영향 미쳤을 것”

필자는 여기에 더하여, ‘고려’(高麗)라는 미술관 이름에도 각별한 의미가 부여됐으면 한다. 남(대한민국)과 북(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아닌 ‘통일한국’(KOREA)의 미술관이기를 염원했고, 한국/조선인들이 분단을 넘어 ‘세계인’이 되기를 바란 설립자의 마음이 그 이름에 담겨 있다. 게다가 이곳은 일본이 아닌가.

고려미술관은 1988년 재일동포 사업가 정조문(1918~1989)이 설립했다. 정조문이 수집한 고려청자, 조선백자, 회화, 민예품, 고대 유물 등 한국의 고미술품 1700여 점을 수장하고 있다. 한때는 관람객이 연간 1만 명대일 때도 있었으며, 최근에도 한국에서 학생 수학여행단이 찾아오는 등 이 미술관의 의의를 아는 한국인과 일본인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정조문은 경북 예천에서 태어나 6살 때 부모를 따라 일본에 왔다. 11살부터 3년간 초등학교를 다닌 것이 학력의 전부인 정조문은 파친코 사업으로 경제적 성공을 이뤘으나, ‘자이니치’(재일조선인)로서 민족적 정체성에 대한 갈증이 컸다. 총련에 속해 2세 교육 사업에 열성을 기울이던 30대 후반의 어느 날 교토의 한 고미술 가게에서 우연히 보게 된 조선백자가 인생의 방향을 결정지었다.

장년 시절의 정조문. 그는 안고 있는 조선백자 달항아리를 고미술 가게에서 처음 보고 ‘조선미술관을 세우겠다’는 꿈을 키우게 됐다고 한다.
장년 시절의 정조문. 그는 안고 있는 조선백자 달항아리를 고미술 가게에서 처음 보고 ‘조선미술관을 세우겠다’는 꿈을 키우게 됐다고 한다.

그는 아무 무늬도 없는 하얀 달항아리가 고가에 거래되는 것을 보고 놀랐다. “일본인들은 조선인을 멸시하고 차별하면서 왜 조선 문화는 좋아하는 것일까?” 이 ‘모순’이 그를 ‘조선미술관을 세우겠다’는 목표로 밀어붙였다. 그런 정조문을 격려하고 함께 발걸음을 맞추어간 동지들로 형 정귀문(재일 소설가. 1916~1986)과 정씨 형제의 ‘역사 스승’이기도 했던 재일 소설가 김달수, 재일 사학자 이진희, 그리고 일본 지식인들이 있었다.

정조문은 이들과 함께 먼저 한·일 고대사 전문 잡지를 출판하고 일본 속의 한국 문화를 찾아가는 답사여행을 이끌며 일본에 ‘고대사 붐’을 일으켰다. 1969년 창간해 1981년 50호를 끝으로 휴간한 <일본 속의 조선 문화>(계간지)는 일본 고대역사 속에 내재한 한반도의 영향과 한-일 관계사를 발굴·추적한 역사전문지였다. 일본인 스스로 역사의 진실을 알도록 하자는 편집 방침을 세우고 필진을 최소 7 대 3 이상 일본인을 우위에 두도록 했다. 이들이 이끄는 답사여행(1972~1981년, 총 30회)도 대성황을 이뤄 한 회에 500명이 몰리기도 했다. 답사 참가자의 90%가 일본인이었다. 대중적 파급력도 커져서 “편견에 차 있던 일본 고대사에 이처럼 충격을 준 잡지는 없을 것”(<교토신문>)이란 평가를 받기도 했다.

1988년 고려미술관 개관 즈음의 정조문. 지병을 무릅쓰고 미술관 설립에 혼신을 기울인 그는 개관하고 4개월 뒤 숨을 거뒀다.
1988년 고려미술관 개관 즈음의 정조문. 지병을 무릅쓰고 미술관 설립에 혼신을 기울인 그는 개관하고 4개월 뒤 숨을 거뒀다.

고려미술관은 이 ‘역사 알리기’의 연장선에서 건립됐다. 지병을 앓던 정조문이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여명을 갈아넣은 필생의 결실이기도 했다.

정조문의 일대기와 미술관 설립 동기에 대해서는 국내에서도 다큐멘터리와 언론 보도, 영화, 저술 등으로 많이 소개돼 있다. 그래서 이 지면에서 필자는 교토에 살면서 교토 기행을 쓰고 있는 한국인으로서 고려미술관 개관을 도운 일본인에 대해서도 기록을 남기고 싶다. 정조문의 아들 정희두(현 고려미술관 대표)씨도 “당시 일본 지식인들과의 우정과 교류가 미술관 건립에 큰 힘이 된 사실이 한국 사회에 널리 알려지길 바란다”고 했다.

사실 아무리 돈이 있고 의지가 굳세도 무국적(정조문은 남북 어느 쪽도 아닌 일제강점기 때의 출신지를 나타내는 ‘조선적’을 유지했다)의 재일동포가 일본에서 독자적인 기관을 세운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을 잘 아는 정조문 형제는 일본 지식인들을 찾아다니며 도움을 청했는데, 그중 대표적인 인물로 역사소설가이자 문명비평가인 시바 료타로(1923~1996)를 들 수 있다.

고려시대 5층석탑. 고베의 들판에 흩어져 있는 것을 무려 15년에 걸쳐 주인을 설득해, 당시 2천만엔을 주고 수습해 왔다고 한다.
고려시대 5층석탑. 고베의 들판에 흩어져 있는 것을 무려 15년에 걸쳐 주인을 설득해, 당시 2천만엔을 주고 수습해 왔다고 한다.

일본의 ‘국민작가’ 시바 료타로는 정씨 형제에겐 잊을 수 없는 ‘일본인’이다. 소설을 쓰던 정귀문의 절친한 문우로서 일찍이 정씨 형제의 사람됨과 뜻을 알던 그는 교토대 교수 우에다 마사아키(1927~2016) 등 일본 지식인들과 정씨 형제 사이 가교 역할을 했다.

1973년 2월 도쿄 중앙공론사 홀에서 열린 ‘잡지 <일본 속의 조선 문화>를 격려하는 모임’에는 180여 명의 이름 있는 일본 지식인이 참석했는데, 시바 료타로가 발기인 축사를 했다.

“정씨 형제에게 <일본 속의 조선 문화> 창간 뜻을 처음 듣고, 3호까지라도 낼 수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20호를 바라보고 있으니, 나는 인간의 의지에 대해 이 두 형제로부터 배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잡지와 인연을 맺으면서 비록 어렴풋하나마 내 눈에도 조선 문화의 원형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정조문(오른쪽)과 시바 료타로가 한 화면에 잡힌 영상 갈무리. 1975년 4월19일 교토 서북쪽 산으로 봄소풍을 갔을 때의 장면이다. 일행은 술을 마시고 장구 장단에 맞춰 춤추며 ‘아리랑’을 불렀다고 한다.
정조문(오른쪽)과 시바 료타로가 한 화면에 잡힌 영상 갈무리. 1975년 4월19일 교토 서북쪽 산으로 봄소풍을 갔을 때의 장면이다. 일행은 술을 마시고 장구 장단에 맞춰 춤추며 ‘아리랑’을 불렀다고 한다.

시바는 유년시절 외가 동네에서 만난 젊은 발굴 학자에게서 “이런 비슷한 것이 조선에서도 나와”라는 말을 듣고 문득 시야가 넓어지는 체험을 했다고 한다. 또 20대에는 만주 주둔 전차부대 소대장으로 일본이 일으킨 전쟁에 깊은 자괴를 느끼며 ‘어쩌다 일본이 이런 몹쓸 나라가 되었느냐’며 통곡했다는 일화도 있다. 그의 소설의 일관된 주제이기도 한 ‘일본인의 원형’으로서 고대 동아시아 문명에 대한 천착, 일본이 일으킨 전쟁에 대한 죄의식,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려 신음하는 자이니치들에 대한 부채감과 연대의식이 그로 하여금 정씨 형제의 ‘무모한 도전’에 기꺼이 동참하게 했을 것이다.

고려미술관 2층에는 미술관 탄생에 관한 기록물도 전시돼 있는데, 그중에 정조문과 시바 료타로가 장구 장단에 맞춰 ‘아리랑’을 부르며 춤추는 영상(1975년 4월19일 교토 서북쪽 기누가사산 하라타니 언덕의 봄소풍)과 시바의 시가 있다.

시바 료타로가 1975년 봄소풍을 같이 한 재일 한국인들을 생각하면 쓴 시가 고려미술관 2층에 걸려 있다.
시바 료타로가 1975년 봄소풍을 같이 한 재일 한국인들을 생각하면 쓴 시가 고려미술관 2층에 걸려 있다.

야마시로(교토의 옛 지명)의 하라타니산엔 엷은 보랏빛 진달래가 피었다/ 시인 김시종은 말하네, 아느냐, 진달래는 조선이 원산인 것을/ 사람들이 용솟음치듯, 엉엉 우는 듯 춤춘다고, 이진희는 말하네/ 모리 호이치(역사학자)는 그래봐야 결국 토공(土工)이었다고 아파했지/ 돌아온 정가(鄭家)의 집에서 강재언(재일 역사학자)은 엉망으로 취하고/ 김달수는 자꾸 신음하듯 울었다”

즐거운 소풍날에도 어쩔 수 없이 터져나오는 자이니치의 한이 시바의 가슴에도 절절하게 와 닿았던 것 같다.

고려미술관이 문패를 시바의 글씨로 걸어둘 만큼 그의 조력을 잊지 않고 있듯이, 시바의 문학 역시 이들과의 우정으로부터 적지 않은 ‘조력’을 받았으리라 짐작해본다.

1974년 &lt;일본 속의 조선 문화&gt; 편집진 송년회 사진. 앞줄 왼쪽 두 사람이 정귀문·조문 형제, 둘째 줄 오른쪽 끝이 시바 료타로이다. 시바 옆이 우에다 마사아키 교토대 교수(초대고문·2대 고려미술관장), 앞줄 오른쪽 끝이 하야시야 다쓰사부로 교토대 교수(초대 고려미술관장). 둘째 줄 왼쪽 셋째가 재일소설가 김달수, 셋째 줄 오른쪽 끝이 재일사학자 이진희이다.
1974년 <일본 속의 조선 문화> 편집진 송년회 사진. 앞줄 왼쪽 두 사람이 정귀문·조문 형제, 둘째 줄 오른쪽 끝이 시바 료타로이다. 시바 옆이 우에다 마사아키 교토대 교수(초대고문·2대 고려미술관장), 앞줄 오른쪽 끝이 하야시야 다쓰사부로 교토대 교수(초대 고려미술관장). 둘째 줄 왼쪽 셋째가 재일소설가 김달수, 셋째 줄 오른쪽 끝이 재일사학자 이진희이다.

시바의 대표작 <언덕 위의 구름>은 한반도를 둘러싸고 벌어진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무대로 한 역사소설로 이 시기(1969~1972)에 쓰였다. 그가 1971년 9월 시작해 죽을 때까지 계속한 기행수필 <가도(街道)를 가다>의 첫 장은 백제인들이 망명 온 오미(近江) 지방(교토 동쪽 시가현 지역)에서 이야기가 시작되고, 제2권은 한국 기행으로 채워져 있다. 김해(가야)-경주(신라)-부여(백제)를 돌아보고 일본에 돌아온 시바가 다시 오미의 백제인을 회상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치는 구성은 앞으로 전개될 <가도를 가다> 전체가 ‘일본인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찾아가는 여로가 될 것을 암시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죽기 넉 달 전인 1988년 10월25일 고려미술관 개관 초대장에 정조문은 이렇게 썼다. 시바 료타로를 비롯해 고려미술관 설립에 힘을 보탠 모든 일본인의 바람도 같을 것이다.

“제가 바라는 것은 온 세계 사람들이 우리 조국의 역사와 문화를 올바르게 이해함으로써 진정한 국제인이 되기 위한 일보를 내딛는 것입니다. 한국/조선의 풍토 속에서 키워진 ‘아름다움’은 여전히 이 일본에서, 언어와 사상, 이념을 넘어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습니다. 부디 고요한 마음으로 그 소리를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글·사진 이인우 리쓰메이칸대학 ‘사라카와 시즈카 기념 동양문자문화연구소’ 객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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