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 독재시절이던 1974년 대구에서는 소장작가들이 파격적인 현대미술제를 처음 열면서 짓눌린 문화판에 숨구멍을 뚫었어요. 한국현대미술의 본향이란 역사적 자부심을 간직한 예술도시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
대구에서 대안공간을 운영하는 독립기획자 김옥렬씨는 “숨이 콱 막히는 느낌”이라고 표현했다.
그가 질식할 만큼 아연실색한 ‘이런 일’은 홍준표 대구시장이 지난달 29일 단행한 산하 대구미술관장 신임관장 임명 인사를 일컫는다. 2년 임기의 새 관장이 된 인물은 한국미술협회 대구시 지회 부회장을 지낸 중견화가 노중기씨다.
지난해 6월 고등학교 동창친구인 홍준표 대구시장의 초상화를 시장 산하 대구미술관 개인전 전시 중에 갑자기 출품작으로 끼워 넣어 구설에 올랐던 지역화단 인사다. 시장과의 친분을 출품작으로 대놓고 드러낸 노 작가는 당시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홍 시장에게 선물을 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한 행동”이라고 털어놓은 바 있다. 이런 내력을 지닌 이가 전시를 마친 지 4달여 만에 전격 임명된 것이다. 시 산하 문화예술기관들을 총괄하는 대구문화예술진흥원은 외부 전문가로 구성된 임원추천위원회의 심의와 추천을 거쳐 노씨를 선임했다고 지난 29일 밝혔다.
이런 내력이 지난 연말 한겨레의 보도로 알려지자 지역 미술계에서 미술관을 사유화한다는 비판여론이 거세게 일었고, 대구 경실련과 참여연대 등이 비판성명을 발표했다. 일부 미술인들이 연초인 4일 규탄 기자회견까지 열면서 임명 철회 혹은 보류, 심사과정 공개 등을 요구하고 나섰다. 현지 미술계에 따르면 진흥원이 지난달 7일 신임관장 채용공고를 냈을 당시 노씨 외에 지자체 미술관장과 학예직 간부 출신을 포함한 5명의 후보자들이 공모에 응했고 서류심사와 면접전형을 통해 3배수의 최종후보자를 확정한 것으로 확인된다. 미술인들이 경악한 것은 결정적인 면접의 채점 기준이 경영능력, 전문성, 리더십 및 조직친화력, 윤리관으로 진흥원의 공모요강에 명기되어있는데, 노 신임관장은 상식적으로 도저히 월등한 점수를 받을 수 없는 전력을 지닌 인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홍 시장은 10일 대구시청에서 기자들과 만나 “결격사유가 있느냐 없느냐 문제이지 친구라고 안된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내 친구 중에도 쓸만한 사람들 있는데 그러면 발탁할 수 있는 것”이라는 강변을 내놓았다.
아이러니하게도 홍 시장이 강조한 결격사유는 넉달 전의 노 관장 전시에서 드러난다. 노 작가는 지난해 5월27일 전시 개막 당시에는 홍 시장의 초상화인 ‘초상 2023’을 내걸지 않았다가 일주일이 지나 홍 시장이 전시장을 방문한 직후 갑자기 원래 추상 작품을 떼어내고 초상화를 내걸어 8월 끝날 때까지 계속 전시했다. 작가는 “홍 시장과 고교 동기로서 90년대부터 왕성하게 정계에서 활동하는 친구 모습을 생각하며 그린 작품인데 뒤늦게 미술관 쪽에 작품 교체를 요청했다”고 해명했지만, 지역 미술계에서는 시청 상부에서 학예실 쪽으로 출품작 목록에 초상화를 포함시키라는 압박이 있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문제는 객원 기획자로 미술평론가 김영동씨가 전시를 꾸렸는데, 작가가 완고하게 작품 전시를 고집해 미술관 쪽이 그대로 수용했다는 점이다. 권미옥 학예실장은 시청 비서실 등 상부의 관여가 있었느냐는 질문에는 “확인해줄 수 없다”고 답한 바 있다. 미술관이 지역작가조명전이란 주제아래 노 작가의 전시를 확정한 시점은 지난 2월초. 개막까지 준비기간은 3달여에 불과했다.
미술인들의 항의는 단지 동창친구를 뽑았다는 차원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임명된 이가 노골적으로 시장과의 친분을 강조하고 그를 미화하는 행태를 미술관 전시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냈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술관의 정상적인 큐레이팅을 완전히 무시하고 돌발적인 시장 초상화 전시를 스스로 강행했다. 기획자의 원래 전시의도와 미술관의 위상은 묵살당했다. 이런 행태부터가 심각한 결격 사유가 된다는 것은 상식 중의 상식이다.
홍 시장이 무리한 인사를 감행하게 된 것은 산하 미술관의 위상에 대한 몰이해나 경시가 있다고 짐작할 수 있지만, 그에 못지않게 과거 관장 자리를 맡은 큐레이터들의 기회주의적인 행태도 요인이 됐다. 재공모에 응해 관장이 된지 석달 만인 지난해 3월 몰래 서울시립미술관장 공모에 응해 다시 서울로 옮겨간 최은주 전 관장의 이임 파동이 그렇다. 그가 서울로 떠나면서 대구 미술인들과 지자체 공무원들은 타지 출신의 학예직 기획자들에 대한 원망의 감정이 쌓였다고 한다.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이란 인식이 깊어졌고, 그런 인식이 동문 학연 지연에 기울어진 파행적이고 퇴행적인 인사 관행을 부추기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사태의 파장이 미술관 건립을 준비 중인 다른 지자체로 번질 가능성이 보이는 것도 우려스럽다.
글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한겨레’ 자료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