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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재난이 지나간 도시의 아침에

등록 2007-01-01 16:57수정 2007-01-01 18:59

김애란의 ‘빈손’
큰 비가 내린다. 사내는 휴가를 받는다. ‘휴가다!’라고 외친 뒤 정문으로 달려가니, 자신과 똑같은 외투에, 똑같은 우산을 들고 서 있는 무리의 모습이 보인다. 우산에는 ‘휴가용’이라는 문구와 회사 로고가 박혀 있다. 사내는 멀거니 하늘을 바라본다. … 어디로 갈까. 사람들도 정문을 나서지 못한 채 고민하고 있다. 사내가 한 손을 길게 뻗어 우산을 편다. 다른 이들도 사내를 따라 우산을 펼쳐든다. 수십 송이의 나팔꽃이 투두둑- 만개하듯, 흐린 도시 위로 파란 반점들이 돋아난다. 사람들은 합창한다. 휴가다. 그러나 누구도 그 말이 신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비는 쉴 새 없이 쏟아졌다. 거의 모든 곳에서 비가 내렸고, 세계는 비 닿는 소리로 가득 찼다. 그 소리가 하도 커, 사람들은 한동안 자기 목소리도 듣지 못했다. 사내는 수해 장면이 지루하게 반복되는 뉴스를 보며 라면을 먹었다. 비는 내리고 또 내리고, 질리도록 내려 사람들은 그 사실에 익숙해졌다. 사내는 회사 정문을 나서며 자신이 집으로 가는 걸 알았고, 그 후로도 줄곧 집에만 있었다. 그런데도 ‘어디로 갈까’ 고민했던 건 기대 때문이었다. 구내식당 메뉴가 하나뿐이란 걸 알면서도 ‘오늘은 뭘 먹을까’ 궁리하는 것처럼. 결국 선택할 수 있는 게 하나밖에 없다 하더라도, 그렇게 무의미한 질문을 던지며 딴청을 부리는 사이, 시간을 벌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어디선가 굴러다니고 있을 자신의 존엄성을, 재빨리 호주머니에 담아올 수 있는 그런 시간을. 겨우 아메바만한 자존감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있는 삶과 그렇지 않은 삶은 분명 다르다고. 어쨌든 어느 날 비가 그쳤다. 한밤중, 비가 뚝- 하고 그쳤을 때, 고요함에 놀란 도시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번쩍- 하고 눈을 뜬 뒤 다시 잠들었다.

사내에게 맡겨진 일은 물에 잠긴 출판도시를 조사하는 것. 통째로 가라앉은 섬에서 사내는 우선 조형물 A부터 찾아야 했다. 사내는 바다 속으로 뛰어들었고 웬만한 깊이에 도달하기 전까지 바다는 사내에게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았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사내는 뭔가 아른거리는 물체를 발견했다.

재난이 지나간 도시의 아침은 몰라보게 쾌청했다. 사내가 근무하는 회사에선 유독 이 아침을 반겼다. 그들이 상상하는 이윤이 햇빛을 받은 빗물처럼 도시 곳곳에서 반짝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내는 몇 달 만에 회사로 출근했다. 그 간의 기약 없는 휴가에 대해 설명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모든 것은 비 때문이니까. 뮤지컬 속 코러스들처럼 ‘모든 것은 비 때문이니까요’ 하고 외치고 나면, 한결 기분이 좋아진다는 사람도 있었다. 사내는 숙련된 스쿠버였고, 곧 벌어질 일들을 예상하고 있었다. 스쿠버들은 곳곳에 파견돼 도시 깊숙한 곳을 ‘내시경’할 터였다. 수몰된 문화재를 건져오거나, 사상자와 실종자를 찾고, 피해 규모를 파악하는 것 모두 그들의 일이었다. 사내에게 맡겨진 일은 물에 잠긴 출판도시를 조사하는 것이었다. 인력이 부족한 탓에 사내는 그곳을 혼자 탐사해야 했다.

출판단지는 20세기 말, 10만 평 규모의 인공 섬에 세워진 기획 도시였다. 섬은 순식간에 만들어졌고, 그 위로 온갖 출판사와 인쇄소, 유통업체, 미술관 등이 들어섰다. 출판단지가 막 조성됐을 즈음, 각 회사들은 경쟁적으로 건물 앞에 조형물을 세웠다. 조악하고 형식적인 것도 있었고, 천문학적 액수로 거래되는 유명한 작품들도 있었다. 그 중 가장 크고 가치 있는 것은 A라는 작품이었다. 그것은 거대한 청동상으로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섬은 통째로 가라앉아버렸고, 사내는 우선 A부터 찾아야 했다.

사내는 인부들과 몇 마디를 주고받은 뒤, 장비를 점검하고 바다 속으로 뛰어들었다. 20세기에 세워진 거대한 출판도시가 ‘텀벙’ 하는 소리를 내며 사내를 깊이 안았다. 사내는 바다 속으로 조금씩, 조금씩 가라앉았다. 사내는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었고, 그래서 지나치게 말짱한 기분이었다. 몇 번을 반복해온 일이지만, 사내는 철저히 혼자라는 느낌이 들었다. 사내는 내려가고, 내려갔다. 웬만한 깊이에 도달하기 전까지, 바다는 사내에게 아무 것도 보여주지 않았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사내는 뭔가 아른거리는 물체를 발견했다. 얼마 전 도시의 잔뼈를 이뤘을 콘크리트 기둥이었다.

출판도시의 모습은 종교적인 것과 상업적인 분위기가 묘하게 섞여 있는 풍경이었다. 방적기를 닮은 우아하고 씩씩한 기계들이 녹슬어가고, 뚱뚱한 대가리를 가진 컴퓨터가 이스터 섬의 석상처럼 여기저기 처박혀 있었다. 조형물 A를 찾아 나서는 사내의 작업은 며칠 간 계속되었다. 지난하고 불안하며 무엇보다도 고독한 여정이었다. 사내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잊어버린 채, 폐허 속에 붕 떠 있곤 했다. 가끔은 쓸데없는 것들에 마음을 뺏겨 농뗑이를 칠 때도 있었다. 편집자가 마감을 독촉했을 수화기에선 공기 방울이 새어 나오고, 성격 나쁜 작가들은 여전히 부재중인 것 같았다. 으스러진 책장 사이론 물고기 알이 보였다. 출판도시 하나가 온종일 소비했을 커피믹스 봉지들은 물고기처럼 떼죽음을 당한 채 누워있었다. 물살에 따라 간헐적으로 나부끼는 교정지들. 넝쿨처럼 굴러가는 백과사전. 철학, 수학, 천문학, 처세서, 악보, 문제집, 춘화, 전기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책들이 퉁퉁 불어가거나, 소금물에 삭아갔다. 그러나 끝끝내 썩지 않을 정신들도, 분명 사내 주위를 부유하고 있었으리라. 사내는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부리는 농뗑이에 싫증이 나고 말았다. 사내는 잠시 넋을 잃고 붕 떠올라 중얼거렸다. 너무 어두워서, 너무 차가워서, 너무 깊어서, 너무 조용하고, 너무 넓어서, 너무 모르겠어서, 울고 싶다고.

조형물 A를 처음 발견했을 때, 사내는 그것이 자신이 찾고 있던 A인지 몰랐다. 사내는 웬 해파리 한 마리가 발광하며 나풀대는 모습을 쫓아가다가 A와 만났다. 엄밀히 말해 만난 것은 A가 아니라 A의 손이었다. 그 손은 멀리서 보지 않고는 형체를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손이었다. 사내는 오리발을 움직여 A의 한쪽 손을 향해 헤엄쳐갔다. 손가락은 가볍게 구부러져 있었고, 바닥은 하늘을 향해 있었다. 사내가 착륙장으로 삼기에 딱 좋은 모양이었다. 사내는 어둠 너머, 인간을 닮은 A가 거인처럼 서 있는 모습을 그려봤다. 어마어마하게 큰 암흑 속에, 청동상의 거대한 얼굴이, 거대한 등과 배가, 엄청나게 긴 다리가 감춰져 있을 거라 생각하니 조금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해파리는 A의 손가락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혼미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A의 위치를 알았으니 그만 올라가도 될 일이지만, 어쩐지 주위를 더 살펴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사내는 A의 손을 비춰보았다. 손바닥은 사내를 감싸 쥘 듯 다정하게 구부러져 있었다. 바닥 안엔 손금이 섬세하게 패여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다른 무언가가 새겨져 있는 것도 보였다. 그것은 잘 정비된 도로처럼 곧고 아름답게 뻗어 있는 무엇이었다. 사내는 한참을 유영한 후 비로소 그 선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것은 활자였다. 이 직선과 저 직선이 만나 시옷. 그 옆은 모음 아. 그 아래 둥근 받침. 다시 이 직선과 저 직선이 만나 리을. 다시 곡선. 사내는 더듬더듬 손바닥에 새겨진 활자를 읽어나갔다. 그리고 한참 후, 사내가 모든 활자를 해독해 냈을 때, 그가 읊조린 문장은 다음과 같았다. <상상력이 없을 때는 다른 사람의 상상력을 헐뜯어야 한다.> 프, 플로…베르. 사내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런 뒤 자기도 모르게 풋- 하고 웃
소설가 김애란
소설가 김애란
어버렸다. 바다 깊은 곳. 무시무시한 정적 속에서. 자기 몸뚱이보다 더 큰 문자를 읽고, 오랜만에 사내가 웃었다. 풋-. 미처 소리가 되지 못한 웃음이 공기 방울이 되어 날아갔다. 선언문 같이, 좀 더 근사한 문구도 많았을 텐데 조각가는 왜 저런 문장을 새겨 넣은 것일까. 어쨌든 사내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었다. 이렇게 짧게 웃기 위해 그렇게 깊이 들어와야 했는지도 몰랐지만. 심해 한가운데서 죽은 작가가 건네는 농담에 마음이 놓였다. 딴청을 피우며 내미는 축축한 악수. 그것은 ‘따뜻하다’는 느낌에도 못 미치는, 아주 작은 출렁임이었지만, 주위 온도는 분명 미세하게 변해 있었다. 바다 속은 겁에 질릴 정도로 컴컴했다. 어둠 너머, 보이지 않는 A의 거대한 얼굴이 사내를 응시했다. 해파리는 여전히 파랗게 빛났다가, 노랗게 일렁였다, 보랏빛으로 바뀌며 너풀너풀 사내를 비추었다. 그 빛 아래서, 사내가 A의 빈손을 오래도록 들여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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