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아라리오갤러리’ 개관한 김창일 대표
[한겨레가 만남 사람] ‘뉴욕 아라리오 갤러리’ 개관한 김창일 대표
‘아라리오’란 이름이 미술계에 알려진 것은 사실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서울도 아닌 천안에 유명작가 작품이 많은 미술공간이 있다는 소식이 전해진 게 불과 몇 년 전이었다. 이때만 해도 사람들은 아라리오 김창일(56) 대표를 미술에 푹 빠진 지방의 성공한 사업가로만 여겼다. 그러나 이후 아라리오와 김창일 대표는 순식간에 한국 미술판을 주도하는 놀라운 이슈메이커로 떠올랐다. 미술계의 통념을 뛰어넘는 공격적인 경영으로 아라리오는 이후 미술판의 흐름을 주도했다. 젊은 신진 작가들을 한꺼번에 전속으로 영입하면서 전속작가제를 이끌었고, 2005년 중국 베이징에 진출하면서 한국 화랑들의 해외진출 흐름에 앞장섰다.
그리고 올해, 아라리오는 다시 한 번 미술계를 놀라게 했다. 지난 10일 세계 미술의 심장부인 뉴욕 맨해튼의 첼시에 아라리오뉴욕 화랑을 연 것이다. 단순히 미국에 문을 연다는 의미에 그치는 수준이 아니다. 전체 2600여㎡(800평)에 이르는 규모는 뉴욕에서도 다섯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크기다. 아라리오다운 행보이자, 매번 그랬듯 과연 성공할 수 있을지 보는 이들로 하여금 반신반의하게 만드는 과감한 투자다.
첫 전시는 ‘앱솔루트 이미지 Ⅱ’. 팡리쥔 양샤오빈 웨민준 쩡하오 등 내로라하는 중국 작가들 작품이 걸렸다. 뉴욕 현지의 반응은 두 가지. “아시아에서 뜬다더니 여기까지? 웃기네”라는 빈정, 그리고 “매너리즘에 빠진 뉴욕 화단에 좋은 경쟁 파트너가 될 것”이라는 환영이다.
뉴욕 개관에 앞서 3일 그를 만났다. 짧은 머리, 부리부리한 눈에 굵직한 목소리가 인상적인 그는 성공을 자신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까지 자신이 거둔 성과의 바탕이 된 감각과 판단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갖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모든 게 양면성이 있죠. 밝은 면으로 보면 애호가고, 돈 쪽으로 보면 사업가고. 이 두 가지는 통해요. 순수한 사람에게는 좋은 작품이 보이고, 좋은 작품을 사게 되면 보상을 받게 되는 거죠.” 그가 1년에 미술품을 사들이는 금액은 200억원 수준이다. 그는 데미언 허스트나 트레이시 에민 같은 세계적 작가부터 국내 신예 작가까지 일찌감치 ‘떠오를’ 작가를 골라 작품을 과감하게 매입했고, 이는 대부분 성공을 거둬 ‘족집게’로 불린다.
씨킴 김창일 “미술계 ‘큰 나무’ 될테니 그늘에서 놀다가세요” [%%TAGSTORY1%%] 익히 알려졌듯 그의 호는 ‘정면’이다. 이번 뉴욕 진출 역시 그에겐 당연히 돌파해야할 ‘정면’이다. “아시아의 중심은 베이징입니다. 그래서 베이징에 갔고, 이제 아시아에서 바탕이 됐다고 보고서 세계 중심으로 가겠다고 뉴욕에 간 겁니다. 아시아 미술이 세계로 진출하려면 뉴욕이 거점이 되어야 합니다.” 그는 자신이 네트워크를 짜온 아시아 미술로 세계 미술 중심 뉴욕을 뚫겠다는 계획이다. 뉴욕 진출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인도와 러시아, 그리고 도쿄까지 진출해 아시아 미술로 세계를 상대하겠다는 것이다. 그동안 그는 앞으로 세계 미술시장에서 떠오를 블루칩으로 독일 현대미술과 인도, 중국 작가들을 거론해왔다. 이들에게 꾸준히 투자해왔고, 이제 그들을 본격적으로 세계 시장에 선보일 마당으로 뉴욕을 고른 것이다. 이 같은 그의 공격적인 태도를 잘 보여주는 것이 천안 아라리오 곳곳에 적어놓은 “I am hungry. I wanna eat a dream”이라는 문구다. 베이징 아라리오에도 같은 글을 적은 봉제곰이 있다. “꽃만 보고 갑작스럽다고들 하는데 20년 넘게 준비했습니다.” 대학시절, 그는 인사동에 갔다가 문화의 그늘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 것을 보고 자신도 커다란 나무가 되고 싶다는 꿈을 품었다. 1980년 초 미국 로스앤젤레스 모카 미술관에 들렀을 때의 열등감이 꿈을 굳혔다. 세계 미술을 선도하는 그들을 보면서 우물 안에서 서양 것을 흉내내는 우리가 떠올랐던 것. 그 뒤 여러 전시회와 미술페어를 순회하면서 안목을 넓혀나갔다. “저요~? 꿈을 이루기 위해 죽~어라고 돈 벌었습니다.” 70년대 주식투자로 돈을 번 뒤 그는 천안터미널에 점포를 운영하면서 재력가로 떠올랐다. 1986년 터미널사업을 시작했고, 89년 지금의 천안 신부동에 터미널 겸 복합문화공간 ‘아라리오 시티’를 만들었다. “그 동안 은행에서 살다시피 했어요. 사업 벌이고 그걸 담보로 돈 빌려 갚는 일의 연속이었어요.” ㈜아라리오산업의 연 매출은 1000억여원. 최고경영자 김창일에게 미술세계는 사업가의 차가운 피를 데워주는 ‘구원의 세상’이었다. “미술이란 꿈이 없었다면 나는 살 수 없었을 겁니다.” 화제가 사업에서 미술로 옮겨지면서 그의 말투도 바뀌었다. ‘~어요’ ‘습니다’에서 ‘~걸랑요’로. 미술계에서 김창일은 뜨거운 피를 가진 ‘씨킴’(CI KIM)이다. 세계적 미술잡지가 뽑은 세계의 큰손 100인에 한국인으로 유일하게 들어있다. 그가 소장한 가장 비싼 작품은 전위예술가 트레이시 에민의 1968년 초기 수예 작품. 영국의 대표적인 대형화랑인 사치화랑에서 백지수표를 주면서 팔라는 것을 거절했다. 그는 키스 해링, 데미언 허스트, 이사무 노구치 등 세계적 작가의 작품 200여 점으로 조각공원을 만들어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제주도 성산포에는 작업실을 만들어 전속화가들에게 무료개방 한다. 현재 전속화가는 박서보, 이동욱, 권오상, 박윤영 등 30여 명. 이들에게 들어가는 지원비가 한달 2천여만원. 오고 싶은 사람이 많아지면 여분 1천평에 건물을 더 지을 참이다. 뉴욕 진출로 새로운 전기를 맞은 그는 최근 자기 모토를 바꿨다. ‘I need a new dream.’ “2010년에 천안이나 제주도에 미술관을 지을 겁니다. 유명 건축가 데이빗 엣제한테 맡겨 설계도도 나왔어요.” 1만3000㎡에 이르는 ‘아라리오 뮤지엄’이다. 해외에선 내년 인도 뭄바이에 또다른 아라리오를 열 작정이다. “탐욕을 가장 경계합니다. 순수하지 않으면 좋은 작품이 보이지 않고 살 수도 없걸랑요. 앞으로 좋은 작가의 좋은 작품만을 전시하고 싶어요.” 씨킴과 김창일 두 몫을 사는 그는 행복해 보였다. 글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사진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동영상 이규호 피디 pd295@hani.co.kr
씨킴 김창일 “미술계 ‘큰 나무’ 될테니 그늘에서 놀다가세요” [%%TAGSTORY1%%] 익히 알려졌듯 그의 호는 ‘정면’이다. 이번 뉴욕 진출 역시 그에겐 당연히 돌파해야할 ‘정면’이다. “아시아의 중심은 베이징입니다. 그래서 베이징에 갔고, 이제 아시아에서 바탕이 됐다고 보고서 세계 중심으로 가겠다고 뉴욕에 간 겁니다. 아시아 미술이 세계로 진출하려면 뉴욕이 거점이 되어야 합니다.” 그는 자신이 네트워크를 짜온 아시아 미술로 세계 미술 중심 뉴욕을 뚫겠다는 계획이다. 뉴욕 진출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인도와 러시아, 그리고 도쿄까지 진출해 아시아 미술로 세계를 상대하겠다는 것이다. 그동안 그는 앞으로 세계 미술시장에서 떠오를 블루칩으로 독일 현대미술과 인도, 중국 작가들을 거론해왔다. 이들에게 꾸준히 투자해왔고, 이제 그들을 본격적으로 세계 시장에 선보일 마당으로 뉴욕을 고른 것이다. 이 같은 그의 공격적인 태도를 잘 보여주는 것이 천안 아라리오 곳곳에 적어놓은 “I am hungry. I wanna eat a dream”이라는 문구다. 베이징 아라리오에도 같은 글을 적은 봉제곰이 있다. “꽃만 보고 갑작스럽다고들 하는데 20년 넘게 준비했습니다.” 대학시절, 그는 인사동에 갔다가 문화의 그늘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 것을 보고 자신도 커다란 나무가 되고 싶다는 꿈을 품었다. 1980년 초 미국 로스앤젤레스 모카 미술관에 들렀을 때의 열등감이 꿈을 굳혔다. 세계 미술을 선도하는 그들을 보면서 우물 안에서 서양 것을 흉내내는 우리가 떠올랐던 것. 그 뒤 여러 전시회와 미술페어를 순회하면서 안목을 넓혀나갔다. “저요~? 꿈을 이루기 위해 죽~어라고 돈 벌었습니다.” 70년대 주식투자로 돈을 번 뒤 그는 천안터미널에 점포를 운영하면서 재력가로 떠올랐다. 1986년 터미널사업을 시작했고, 89년 지금의 천안 신부동에 터미널 겸 복합문화공간 ‘아라리오 시티’를 만들었다. “그 동안 은행에서 살다시피 했어요. 사업 벌이고 그걸 담보로 돈 빌려 갚는 일의 연속이었어요.” ㈜아라리오산업의 연 매출은 1000억여원. 최고경영자 김창일에게 미술세계는 사업가의 차가운 피를 데워주는 ‘구원의 세상’이었다. “미술이란 꿈이 없었다면 나는 살 수 없었을 겁니다.” 화제가 사업에서 미술로 옮겨지면서 그의 말투도 바뀌었다. ‘~어요’ ‘습니다’에서 ‘~걸랑요’로. 미술계에서 김창일은 뜨거운 피를 가진 ‘씨킴’(CI KIM)이다. 세계적 미술잡지가 뽑은 세계의 큰손 100인에 한국인으로 유일하게 들어있다. 그가 소장한 가장 비싼 작품은 전위예술가 트레이시 에민의 1968년 초기 수예 작품. 영국의 대표적인 대형화랑인 사치화랑에서 백지수표를 주면서 팔라는 것을 거절했다. 그는 키스 해링, 데미언 허스트, 이사무 노구치 등 세계적 작가의 작품 200여 점으로 조각공원을 만들어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제주도 성산포에는 작업실을 만들어 전속화가들에게 무료개방 한다. 현재 전속화가는 박서보, 이동욱, 권오상, 박윤영 등 30여 명. 이들에게 들어가는 지원비가 한달 2천여만원. 오고 싶은 사람이 많아지면 여분 1천평에 건물을 더 지을 참이다. 뉴욕 진출로 새로운 전기를 맞은 그는 최근 자기 모토를 바꿨다. ‘I need a new dream.’ “2010년에 천안이나 제주도에 미술관을 지을 겁니다. 유명 건축가 데이빗 엣제한테 맡겨 설계도도 나왔어요.” 1만3000㎡에 이르는 ‘아라리오 뮤지엄’이다. 해외에선 내년 인도 뭄바이에 또다른 아라리오를 열 작정이다. “탐욕을 가장 경계합니다. 순수하지 않으면 좋은 작품이 보이지 않고 살 수도 없걸랑요. 앞으로 좋은 작가의 좋은 작품만을 전시하고 싶어요.” 씨킴과 김창일 두 몫을 사는 그는 행복해 보였다. 글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사진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동영상 이규호 피디 pd29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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