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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길을 찾아서] “야, 그냥 하면 되지!” 술잔 건네다 일갈하면 ‘남북 합의’ 뚝딱

등록 2014-10-19 21:48수정 2015-04-28 22:19

[길을 찾아서] 용태 형과 문화운동시대 ⑮
1993년 일본에서 ‘코리아통일미술전’을 연 이래 공안당국의 주시를 받고 있던 김용태 당시 민예총 이사장은 95년 봄 범민족대회 남쪽추진본부 실무대표를 맡아 베이징에서 북측 대표들과 만나 구속을 감수하고 공동행사 합의문을 끌어냈다. 사진은 2005년 평양에서 열린 ‘6·15 5돌 기념 민족통일대축전’ 행사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1993년 일본에서 ‘코리아통일미술전’을 연 이래 공안당국의 주시를 받고 있던 김용태 당시 민예총 이사장은 95년 봄 범민족대회 남쪽추진본부 실무대표를 맡아 베이징에서 북측 대표들과 만나 구속을 감수하고 공동행사 합의문을 끌어냈다. 사진은 2005년 평양에서 열린 ‘6·15 5돌 기념 민족통일대축전’ 행사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 “형님, 베이징에 다녀오시죠”

1995년 봄 무렵일 것 같다. 정작 실무대표단으로 회의에 참석했던 이승환 당시 한청협 부의장과 이은민 자주평화통일민족회의 간사도 정확한 날짜를 기억하지 못하고 있고 동행 취재했던 <통일뉴스> 기자도 오락가락한다. 아무튼 90년 베를린 남·북·해외 3자회담 이후 안팎의 여건이 만만치 않아 후속 회담을 열지 못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그해 봄 ‘광복 50돌 기념행사를 남·북·해외가 함께 내용과 규모 모두 의미 있게 치르자’는 남쪽 김영삼 정부의 역제안을 북쪽이 전격적으로 받아들였고, 실무회담 일정이 잡혔다. 범민족대회 남쪽추진본부도 갑자기 바빠졌다.

그때 나는 앞서 94년 8월의 범민족대회 개최와 관련한 수배로 도피중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집행위원장 임무를 수행해야 할 형편이라 실무대표단 구성, 회담 장소 등등 일정에 맞춰 준비해야 했다. 베이징에 있는 지인에게 회담 장소를 잡아주도록 부탁하는 한편 이승환·이은민, 두 사람을 실무회담 준비를 위해 조금 앞서 베이징으로 보냈다.

문제는 대표단으로 누가 가느냐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북쪽과 회담이 낯설기도 하고 더욱이 다녀오면 구속 가능성이 대단히 높은 터에 선뜻 나서는 이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고민 끝에 함세웅 신부를 찾아갔다.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더니 숙고 끝에 실무대표단장을 수락해주었다. 곧바로 ‘용태 형’을 만나러 갔다. 알아보니 인사동의 어느 음식점에서 저녁 식사 중이었다. 다짜고짜 말했다.

“형, 베이징 좀 다녀오셔야겠습니다.” “무슨 일이야?” “북쪽하고 실무회담 일정이 잡혔습니다.” “언제야?” “내일모레입니다.” “어떡해야 돼?” “형은 요주의 인물이니 베이징으로 바로 가는 건 안 좋을 듯합니다.” “그러면?” “일단 홍콩으로 갔다가 베이징으로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알았어.” “노자를 마련해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도망 다니는 네 앞가림이나 잘해, 이놈아!”

그게 ‘용태 형’이었다. 그 다음 이야기를 조금 더 하자면, 용태 형은 홍콩에서 비행기표를 새로 끊어 베이징으로 날아가 국제선으로 도착했는데, 먼저 현지에 가 있던 실무대표단 두 사람은 국내선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당연히 서로 어긋났는데 신기하게도 영어, 중국어 한마디도 못하는 용태 형이 내가 건네준 호텔(뉴그레이스) 이름과 전화번호만으로 회담장에 무사히 도착했다. 나중에 들으니 실무진도 호텔 위치를 잘 모르는 운전기사들 때문에 무척 애를 먹었다고 했다. 그런데 용태 형이 혼자서 용케도 찾아온 것이다.

함세웅 신부는 다른 일정 때문에 회담 첫날에만 참석을 했고, 용태 형이 실질적인 남쪽 대표단장을 맡아 회의를 이끌었다. 남북 간의 이견과 난제들이 많아, 매우 어려운 회담이었으나 용태 형 특유의 뚝심으로 합의문까지 채택해냈다. 일반적으로 합의문을 채택하지 않으면, 국가보안법으로 걸어도 구속될 가능성은 낮았던 시절이었다. 따라서 용태 형은 구속을 각오하고 끝내 성과물을 들고 돌아왔던 것이다.

■ ‘남·북·해외’ 묶어낸 용태 형의 한마디

2004년 11월23~25일 2박3일간 금강산에서 남북의 실무회담이 있었다. 2005년을 준비하는 회담이었다. 최교진 당시 민화협 집행위원장(현 세종시 교육감), 한충목 통일연대 집행위원장(현 진보연대 공동대표), 이승환 민화협 정책위원장(현 시민사회단체연석회의 공동대표), 정인성 원불교 사회문화부 차장, 김동만 한국노총 대외협력본부장(현 한국노총 위원장), 김형수 민족문학작가회의 사무총장, 김이경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사무총장 등 남쪽 대표단 34명이 참석했다. 최근 인천아시안게임 북쪽 단장으로 내려왔던 이충복 당시 민족화해협의회 부회장을 비롯해 북쪽 대표단은 28명이었다. 거기에 이행우 6·15실천미주위원장, 리한수 일본 조국통일협회 부회장 등 국외 동포 대표 7명까지 대규모 회담이었다.

공동행사에 관해서는 큰 어려움 없이 합의가 이루어졌는데 공동행사 추진 상설기구 결성 시점을 두고 논란이 벌어졌다. 워낙 여러 부문이 함께한 자리여서 의견도 분분하고 좀처럼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있었다.

회담 이틀째인 24일 저녁 만찬장 자리로 기억한다. 용태 형이 북쪽 이충복 단장과 한참 술잔을 주고받는가 싶더니 벌떡 일어나서 일갈했다. “야, 그냥 하면 되지, 뭐 그렇게 말들이 많냐.”

‘공동보도문 3항-남과 북, 해외의 각계각층 단체들은 앞으로의 통일운동과 민족공동의 통일행사들을 광범하게 협의하고 추진하고자 6·15공동선언실천을 위한 남·북·해외 공동행사준비위원회(약칭 남북해외공동행사준비위원회)를 내년도에 적절한 시기에 결성하며 당면해서는 올해 안에 남과 북, 해외에서 각기 지역준비위를 결성하기로 하였다.’

이 조항은 전적으로 용태 형의 작품이었다. 그때 합의로 결성된 ‘남·북·해외 공동행사준비위원회’는 지금 ‘6·15공동선언실천 남·북·해외 공동위원회’로 이어져 있다.

■ 북에서도 ‘용태 형’으로 통한 사연

2000년 10월 북한 노동당 창건 55돌 기념행사를 앞두고, 남쪽에서는 평양을 가네 못 가네 설왕설래가 벌어졌다. 결국 한완상 전 통일부총리를 단장으로 남쪽 대표단이 방북했다. 용태 형과 나도 동행했다.

북에서 나름 공들여 준비한 만큼 기념행사는 웅장했고 화려했다. 이른바 ‘집체예술’의 진수를 실감했다. 특히 대규모 카드섹션이 인상적이었다. 어림잡아 3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펼쳐내는 그림 속에는 꽃들도 피었다 지고, 바람도 불고, 구름도 흐르고, 말도 힘차게 달리고, 사람 얼굴도 기가 막히게 형상화하고, 그야말로 감탄에 감탄을 자아냈다. 그런데 한 모퉁이에서 잠깐의 실수가 있었다. 누군가 카드 색깔을 잘못 내민 듯했다.

“어, 저기 삐끗했네?” 화가 용태 형의 예리한 눈이 놓칠 리가 없었다. “어휴, 안심이 좀 되네.” “엉?” “야, 이놈아 좀 틀려야지!”

그날 저녁 식사 때부터 술판이 벌어졌다. 2차로 고려호텔 스카이라운지로 옮겼다. 고려호텔의 젊은 여성 접대원(봉사원)들은 용태 형에게 다 ‘아가’였다. “아가, 저녁 묵었나?” “아가, 시집갔나?”

거나해진 북쪽 단장인 김영성 민화협 위원장과 죽이 맞은 용태 형은 다시 자리를 옮겨 물론 새벽까지 계속 마셨다. 김 위원장은 훗날 장관급회담 북측 단장으로 남쪽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때 흥이 도도해진 김영성 단장이 피아노 솜씨를 보여주겠노라며 다른 큰 방으로 옮겨 연주도 하고 노래도 하면서 한참 놀았다. 그러다가 김 단장이 물었다.

“그런데 용태 선생은 올해 몇이시오? 나는 45년생이오만.”

그건 김 단장의 실수였다. 자기 나이를 먼저 밝히지 말았어야 했다. 답은 뻔했다.

“아, 그래요. 나도 해방둥이요.”

그때부터 둘은 동갑내기가 되었다. 지금까지 북에서 용태 형은 해방둥이로 통할지도 모른다. 참고로 용태 형의 주민등록증에 적혀 있는 출생연도는 48년생이다. 하긴 남쪽에서도 그보다 나이 많은 형들이 ‘용태 형’이라 부른 게 한둘이 아니었으니!

■ 통일·평화 말하지 않고도 최일선에 섰던 그

80년 5월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사건’으로 투옥됐던 나는 3년 가까이 복역한 뒤 추방당해 일본에 머문 적이 있었다. 86년 6월 용태 형과 김정헌·성완경·원동석 등 ‘현실과 발언’ 선배들이 도쿄에 왔다.

“너 왜놈 말 좀 늘었나?” “아직도 버버거리지 뭐.” “야 이놈아, 아직까지 뭐했냐? 아무튼 내일부터 가이드 좀 하고 통역도 해라!”

이럴 때 ‘토’를 달면 죽음이다. ‘일본·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 민중미술전’(JAALA전)을 쫓아다니면서 덕분에 작품 보는 눈도 뜨고 마음도 훈훈해졌지만 몸은 죽을 노릇이었다. 전시회가 끝나가던 저녁 무렵 용태 형이 느닷없이 물었다.

“너 총련 쪽하고 좀 트고 지내냐?” “내가 죽을 일 있어?” “내일 총련 서만술 의장하고 만나는데 같이 갈래?” “거긴 통역 필요 없잖아?” “허긴, 넌 빠져라.”

그렇게 맺어진 서만술 의장과 친분은 이후로도 돈독히 이어졌고 93년 10월의 ‘코리아통일미술전’은 그때부터 준비된 셈이었다.

용태 형은 평소 통일이니 평화니 입에 올린 적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통일운동이나 평화운동 하는 벗들은 끔찍이도 아꼈다. 참으로 자기가 할 수 있는 이상으로 뒷받침을 해줬다.

88년 ‘평화와 통일을 위한 세계평화대회’를 비롯해 범민족대회 10여년간 한결같이 자리를 지켰다. 한번도 자신을 드러내진 않았지만 노동운동, 민중운동, 통일운동, 평화운동의 최일선에 용태 형은 늘 있었다. 민화협 공동의장과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공동대표를 지내기도 했다.

어눌하면서 날카로운 통찰력! 용태 형의 비사는 책으로 엮어도 끝이 없을 것이다. 군더더기가 없는 사람, 용태 형, 떠나보낸 지 반년도 안 되었지만 그립다. “용태 형! 몹시 그립습니다.”

조성위 민화협 상임의장·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상임대표


일곱차례 평양 오가며 ‘통일 디딤돌 놓기’ 열정

마지막까지 ‘남북교류’ 구상한 ‘용태 형’
1993년 일본서 첫 남·북·동포 미술전
“과시적 효과 없어도 문화예술인 나서야”

고 김용태 선생은 생전에 북한을 일곱차례 방문하며 남북 문화교류 활동에 매진했다. 사진은 두번째 평양 방문인 2000년 10월10일 노동당 창건 55돌 기념행사 참관 때로, 왼쪽부터 당시 조성우 민화협 남쪽 대표, 김용태 민예총 이사장, 김영성 민화협 북쪽 준비위 부위원장, 박인배 민예총 기획실장.
고 김용태 선생은 생전에 북한을 일곱차례 방문하며 남북 문화교류 활동에 매진했다. 사진은 두번째 평양 방문인 2000년 10월10일 노동당 창건 55돌 기념행사 참관 때로, 왼쪽부터 당시 조성우 민화협 남쪽 대표, 김용태 민예총 이사장, 김영성 민화협 북쪽 준비위 부위원장, 박인배 민예총 기획실장.
고 김용태 선생은 1993년 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의 사단법인화를 계기로 예술을 통해 민족의 동질성을 회복하는 통일운동에 기여하고자 남북 문화교류 활동에 적극 나섰다. 그해 10월 도쿄와 오사카에서 열린 <코리아통일미술전>은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북한 예술인들이 제3국에서나마 함께한 자리로 문화교류의 물꼬를 텄다. 특히 2000년 김대중-김정일 정상회담 이후 일곱차례나 북한을 방문했던 그는 지난 5월 마지막 순간까지도 중단된 남북 교류를 다시 잇는 구상을 추진하고 있었다.

“와이에스(김영삼) 정부 초기에 교육문화수석으로 기용된 김정남, 그 형이 적극적으로 나서 준 덕분이었어. 한완상 통일 부총리, 김도현 문화부 차관 등도 내 뜻을 듣고 적극 지원해줬고.”(<산포도 사랑, 용태 형> 구술 대담 중에서)

94년 여름 분단 이후 첫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남북 예술인들도 베이징에서 여러 차례 만나 다양한 교류사업에 합의를 했다. 하지만 그해 4월 김일성 북한 주석의 돌연한 사망으로 김영삼 대통령의 평양행은 무산됐고 남북 관계는 다시 경색국면으로 바뀌어버렸다. “미술인으로서, 그때 서울과 평양을 오가면서 전시회를 한 번씩 했어야 됐는데 결론적으로 한 번도 못했지. 남쪽과 북쪽 미술단 대표가 악수하는 그런 장면이 있어야 했었는데, 아쉽지요.”

고 김 주석이 그때 직접 남북 교류와 개방정책을 주도했다면 이후 남북 관계가 많이 달라졌을 것이라는 그의 아쉬움은 마침내 2000년 6월 김대중-김정일 정상회담에 이르러 다시금 희망으로 바뀌었다.

“(김영삼 정부 이후) 어쨌든 간에 문화예술인의 남북 교류가 가장 앞서 나갔어. 2000년 ‘6·15 남북 공동선언’ 때는 나도 공동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고.”

‘용태 형’은 2000년 9월 ‘남북한 관광 백두·한라 교차 방문단’으로 처음 북한을 방문했다. 그 2주일 뒤인 10월10일에는 북한 노동당 창건 55돌 행사 초청을 받아 두번째 평양을 다녀왔다. “첫 방문 때 백두산에 가서 며칠 동안 있었는데…안타까운 건 민예총 음악분과 위원장으로 동행했던 문호근(문익환 목사의 장남) 예술감독이 다녀온 지 얼마 안 되어 세상을 떠난 거야. 급작스럽게 심장마비로.”

그는 2005년 6월 민족통일 대축전 때 남쪽 대표단과 함께 평양을 방문해 고 문호근의 꿈이었던 민족서사극 <금강>의 봉수대 예술극장 공연을 성사시키기도 했다. 그때 75살 고령의 연극배우 장민호 선생도 출연진으로 참가한 데는 “고향 평양을 꼭 한 번 가보고 싶다”는 원로 예술인의 소원을 배려한 것이었다. “장민호 선생이 나를 찾아왔어요. 죽기 전에 꼭 한 번 가고 싶다고. 그래서 배역을 하나 만들어 고향을 방문하도록 도와준 거야. 근데 가족들은 못 만났어. 그건 안 되더라고.”

고 김용태 선생은 구술 대담에서 마지막으로 남북 교류 활동의 의미를 평가해달라는 요청에 이렇게 갈무리를 했다.

“한 시대에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는 건 용감한 거야. 또 성과야 어쨌든 간에, 분단을 극복해보려고 하는 노력 그 자체가 얼마나 중요한 건데. 가시적인 효과가 없더라도 해야 하는 거야. 다 그런 거야. 시대가 좀 변했다고 해서 헌신적으로 고생했던 사람들을 잊어서는 안 돼. 다 고생했지. 문익환 목사도 그렇고 김구 선생도 얼마나 훌륭해. 그런 앞서가는 사람들이 항상 있어야 된다고 봐. 어려운 시기에 그런 것을 만들어내는 약간 선도적인 부분을 항상 역사 속에서 그런 게 나와야 된다고. 그래야 조금씩 진일보하고 발전하는 거지. 그걸 지금 목소리 높여 비난한다고 우리가 기죽을 필요는 없다고 봐요. 현 정부에서도 조금만 노력을 하면 될 텐데 안타까운 일이야. 디제이 선생 말마따나 햇빛정책으로 녹여야지. 이걸 정부가 크게 내다봐야 해. 너그럽게 정치적으로 풀고 대화하고 그래야지. 시대상황을 봐서 필요할 때에는 만나고, 아닐 때는 싸우고 그런 거지. 항상 관계를 싸우게 해서는 안 된다고. 통일해서 남북한 실크로드 뚫고 열차 개통하고 민족 번영의 계기를 잘 만들어야 하는데, 그나마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께서 성과 있는 남북 관계를 만들었다고 봐요. 햇빛정책이 얼마나 중요한 정책인가를 모두가 잘 알아야 해. 그게 평화통일로 가는 길이야.”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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