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문화일반

[길을 찾아서] 일본서 연 전시회가 간첩사건 조작돼 연락책으로 몰려

등록 2014-11-02 19:23수정 2015-04-28 22:04

1987년 12월 대선 때 서로 다른 후보를 지지했던 작가 황석영과 화가 김용태는 대선 뒤 다시 손을 잡고 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을 결성해냈다. 사진은 88년 12월23일 서울 명동 와이엠시에이 강당에서 창립총회를 한 직후 기자회견을 하는 민예총 실무진. 오른쪽부터 신경림 사무총장, 황석영 대변인, 김용태 사무차장, 이장호 민족영화분과위원장.  <한겨레> 자료사진
1987년 12월 대선 때 서로 다른 후보를 지지했던 작가 황석영과 화가 김용태는 대선 뒤 다시 손을 잡고 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을 결성해냈다. 사진은 88년 12월23일 서울 명동 와이엠시에이 강당에서 창립총회를 한 직후 기자회견을 하는 민예총 실무진. 오른쪽부터 신경림 사무총장, 황석영 대변인, 김용태 사무차장, 이장호 민족영화분과위원장. <한겨레> 자료사진
[길을 찾아서] 용태 형과 문화운동시대 (17)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의 16번째 이야기 ‘용태 형과 문화운동시대’는 지난 5월 작고한 김용태(그림) 전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이사장이 끝내지 못한 구술을 그와 더불어 한 시대를 헤쳐온 수많은 문화예술인들이 대신 들려주는 기획이다. 헌정 문집 <산포도 사랑, 용태 형>의 필진 가운데 20여명이 기꺼이 나섰다. 열일곱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작가 황석영씨가 30년 지기 용태 형과 함께한 활동과 일화, 80~90년대 민중문화운동의 의미 등을 2회에 걸쳐 들려준다.

문화운동조직과 연대 강화하려
판화·미술품 등 보내서 전시 뒤
6월항쟁 직후 안기부서 조사받아
YS·DJ 포함된 간첩조직으로 돌변
유학생 양관수·장의균 엉뚱한 피해

■ 죽는 날까지 친구이자 동지

1984년 나는 전국에서 지역별 장르별로 산발적으로 진행되고 있던 문화운동을 하나로 묶어 연대와 통일성을 강화할 것을 제안했다. 채광석(작고)·채희완·임진택·이애주·김정환·김용태 등과 주로 논의했다. 문학 쪽에서는 이미 유신시대에 결성된 ‘자유실천문인협의회’(자실·한국작가회의 전신)가 있었고 미술 쪽은 ‘현실과 발언’(현발)·‘광주자유미술인협의회’ 등의 동인들이 모여 있었으며, 연행 쪽은 현장과 연결하면서 각 지역에서 활발하게 그룹이 결성되어 있었다. 가물가물하지만, 아마도 그에 앞서 여러 모임에 어울리며 김용태와 첫 인사를 했던 듯하다.

그 무렵 광주 운암동에 있던 내 집은 전국 문화패의 연락처이자 숙소이기도 해서 언제나 지역 일꾼들이 서너명씩 기거하고 있었다. 김용태가 후배들과 함께 집에 와서 며칠 묵었는데 거기서 우리는 대강의 기획을 세웠던 걸로 기억한다. 물론 이 기획은 연행 쪽과도 긴밀하게 논의가 된 터였다. 그해 ‘민중문화운동협의회’(민문협)가 결성되고 내가 대표를 맡았으며, 김용태가 상임이사를 맡았다. 사무국장은 김영철이었다.

아무튼 나는 김용태와 그런 일을 도모하기 이전에도 현발의 최민·오윤 등과 어울린 술자리에서 그를 몇 차례 봤을 것이다. 대개 문인이든 미술인이든 예술가들은 차분한 논의보다는 격한 감정이 일어나기 일쑤고 실천적인 일에는 나부터도 게을러서 알차게 챙기지 못하는 편인데, 그런 중에서 김용태는 가장 실질적이고 실무적이었다. 그리고 사람이 넉넉하고 털털해서 후배들끼리 날선 논쟁이라도 벌이면 우스갯소리로 좌중의 긴장을 풀어주는 재주가 남달랐다. 그러나 원칙에 어긋나는 일이 벌어질 때면 선배든 후배든 가차없이 몰아세우고 끝까지 따지고 보는 성격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만만찮았다는 얘기다.

워낙 잡다한 분야의 활동가들을 많이 만나던 시절이라 누가 이전에 무엇을 했는지는 별로 따지지 않았는데, 김용태가 원래 화가라는 사실도 훨씬 뒤에야 알았다. 날 보고 처음부터 형이라고는 했지만 나이는 그저 두어 살 아래인 줄 알았다. 그는 술 한잔 먹으면 선배에게도 그냥 말을 놓아 버리거나 그야말로 ‘맞먹어’ 버리는 기묘한 재간을 가지고 있어서 나 역시 속수무책으로 ‘친구처럼’ 되어 버렸다. 지난 5월 그의 부고를 통해 정확한 법률적 생년월일(1948년생)이 발표되자 어이없는 웃음을 털어놓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김정헌은 여태 용태 형이라 불러왔는데 두 살 아래로 밝혀졌다고 했다. 유홍준은 ‘지난해 작고한 화가 여운이 한 살 위인데 김용태를 형으로 알고 갔다’고 했다. 아무튼 김용태의 ‘버티기’는 그 정도다. 나하고도 다섯 살 아래 아우로 확인됐지만 나는 죽는 날까지 그가 나의 친구이자 동지였음을 인정한다.

■ 간첩사건으로 돌변한 ‘민중미술 전시회’

85년 광주항쟁 기록집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배포 사건이 터졌다. 나는 쫓기듯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제3세계 문화제’에 참가해 1년 동안 외유의 길에 나섰다. 독일을 거쳐 미국으로 가서 광주에서 ‘현대문화연구소’를 함께 했던 ‘합수’ 윤한봉을 만났다. 그는 80년 5월 광주항쟁 이후 서울에서 도피하고 있다가 마산항에서 외항선을 타고 밀항했고 동포들의 주선으로 로스앤젤레스에 머물고 있었다. 그 몇년새 그는 ‘미주한인청년연합’(한청련)을 조직하고 미국 13개 도시에 지부 결성을 준비 중이었다. 윤한봉은 광주의 경험을 살려 문화운동 조직을 결성하고자 했고, 나는 뉴욕에서 몇 달 동안 머물면서 문화패 ‘비나리’를 창립했다. 마침 그때 김용태도 뉴욕을 방문해 이역에서 반갑게 합류했다. 유홍준도 같은 시기 뉴욕의 한청련 사무실을 방문해서 함께 머물렀다.

나는 거기서 일본의 와다 하루키 교수를 만나 그의 권유로 일본으로 옮겨 6개월 동안 머물렀다. 조성우·양관수 등과 함께 도쿄·오사카·교토에 걸치는 문화운동 조직 ‘한우리’를 결성하고 도쿄에는 ‘우리문화연구소’를 창립했다.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김용태와 함께 이들과의 연대를 활성화하기 위해서 ‘민중미술 전시회’를 기획해 일본과 미주에서 열기로 했다. 87년 3월 민미협이 나서서 운반하기 쉬운 판화 작품들을 모아 일본으로 보냈고 미주에는 몇몇 화가가 그림을 모아 가지고 나갔다. 이는 현지 문화운동 그룹의 기금 모금은 물론 국내 문화운동 쪽에도 재정적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1986년 미국에 잠시 머물던 작가 황석영(뒷줄 왼쪽 다섯째)은 ‘광주 동지’ 윤한봉(가운데 줄 오른쪽 넷째)이 로스앤젤레스에서 망명중에 조직한 미주한인청년연합(한청련)을 도와 뉴욕에서 문화패 비나리를 결성하기도 했다. 사진은 그 시절 황석영의 방문을 환영하는 강연회 모습. 사진 ‘합수윤한봉기념사업회’ 제공
1986년 미국에 잠시 머물던 작가 황석영(뒷줄 왼쪽 다섯째)은 ‘광주 동지’ 윤한봉(가운데 줄 오른쪽 넷째)이 로스앤젤레스에서 망명중에 조직한 미주한인청년연합(한청련)을 도와 뉴욕에서 문화패 비나리를 결성하기도 했다. 사진은 그 시절 황석영의 방문을 환영하는 강연회 모습. 사진 ‘합수윤한봉기념사업회’ 제공
87년 6월항쟁의 파도가 휩쓸고 지나간 직후인 7월 시인 채광석이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빈소에 앉아 있는데 조문객들 사이에 술렁이는 묘한 파문이 일어났다. 여익구(2012년 작고)가 와서 보안사 사람들이 와서 몇몇을 연행하고 자기는 물론 나를 찾고 있다고 전했다. 우리는 장례식장 뒷문으로 나와 연세대 교정을 가로질러 무사히 빠져나왔다. 그때 경기도 광주에 살고 있었는데 집으로 안기부 담당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모종의 사건이 있어 조사를 좀 해야겠는데 남산에 오겠는가 아니면 집에서 받겠는가 하는 물음이었다. 그들은 집으로 찾아왔고 내 서재에서 이틀 동안 조사와 진술서를 받았다. 황아무개를 사무실로 연행하면 너무 시끄러워질 테니 집이 낫겠다는 거였다. 사건은 일본에서 연 민중미술 전시회 때문이었다. 원래 보안사에서 사건을 너무 크게 벌여 놓아서 안기부가 넘겨받아 축소 정리하는 중이라고 했다. 그제야 나는 정국이 바뀐다는 걸 직감했다. 아마 그때 김용태도 같은 시간 어딘가에서 조사를 받았을 것이다.

그들이 보여주는 도표를 보니 김영삼(와이에스)·김대중(디제이)을 비롯해서 동교동·상도동계와 선배 몇 사람과 종로5가의 기독교계와 민주화운동권의 활동가들 대부분이 연계되어 있었고 그것은 다시 일본의 총련과 닿아 있었다. 내가 국내 연락 총책이고 부책이 김용태로 되어 있었다. 민중미술 전시회 수익금이 정치권에 흘러들었다는 것이었다. 일본 쪽 연락책은 양관수와 장의균(개마서원 대표)으로 적혀 있었다. 87년 7월 발표된 사건을 보니, 당국은 국내 인사들을 모두 끊어내고 일본 쪽의 양관수를 간첩으로, 그리고 같은 고향 출신의 유학생 장의균을 그에 포섭된 것으로 꾸며놓았다. 그 바람에 서울대에서 세차례 제적당한 뒤 일본에 보내져 유학하던 양관수는 문민정부가 들어설 때까지 귀국하지 못하였고, 국내에 잠시 귀국했던 장의균은 체포되어 7년 옥살이를 해야 했다.

■ 대선 지지 후보 달랐지만 함께 만든 ‘민예총’

1987년 대선 뒤 문화계 분열위기엔
민예총 함께 만들어 화합 끌어내

그런 와중에 전두환·노태우 신군부는 직선제 개헌안을 요구하는 국민들의 의사에 타협하는 이른바 ‘6·29 선언’을 발표했다. 이어 12월16일 ‘87년 대선’이 양김의 분열로 좌절된 뒤 민중문화운동협의회는 몇 개 분파로 찢어질 위기에 놓였다.

애초 대선을 앞두고 나는 ‘단일화’를 요구하는 쪽에 들었는데, 내가 떠나온 광주는 김대중에 대한 열기와 광주 참사에 대한 한이 워낙 뜨겁고 깊어서 집 전화가 하루에도 수십번 울렸다. 폭언을 하는 후배도 있었는데, 민문협은 뭘 하냐는 것이었다. 김용태를 비롯한 집행부의 절반쯤이 백기완 ‘민중대통령 후보’를 내세우고 있었다. 작가회의의 젊은 후배들은 김대중의 ‘비판적 지지’에 서 있어서 그야말로 중구난방이었다.

단일화가 완전 결렬로 판명된 대선 열흘 전쯤, 나는 ‘비판적 지지’로 돌아서서 김대중 후보 지지 방송 연설을 하게 된다. 김용태 쪽은 이애주가 나와서 백기완 지지 방송 연설에 나섰다. 그렇게 선거가 끝나자, 김정환을 비롯한 후배들은 ‘민문협’을 현장운동 중심으로 다시 재편성하겠다며 지도부 책임론을 들고나왔다. 일리가 있는 의견이었으므로 김용태와 나는 오히려 예술인과 전문가 중심의 예술단체를 꾸리기로 합의했다. 그때 나는 김용태와 민중대통령을 추진한 이들에게 ‘순수한 종파주의’라는 농담조의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다.

그로부터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나는 김용태와 거의 매일 각 분과 조직을 구성하고 예술인들을 만나러 다녔다. 문학·미술·건축·사진·서예·연극·연행·영화 등 장르별로 조직이 꾸려졌고 각 분과위원장과 사무국 조직까지 갖춘 게 88년 11월26일 출범한 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이었다. 그는 위로 선배들 중심으로 각 분과를 짜고 우리는 심부름을 더 해야 한다면서 사무총장에 신경림, 사무국장은 자신이 그리고 내게는 대변인을 맡겼다.

아다시피 그 뒤 89년 3월 나는 단신으로 북한을 방문했다가 4년간 망명 아닌 망명을 거친 뒤 귀국해 5년간 옥살이를 하게 된다. 방북 파동을 둘러싼 이야기는 다음 회에 더 하기로 하고, 아무튼 98년 석방된 뒤 충청도에서 칩거하며 집필에 매달렸다. 84년 <장길산> 이후 15년 동안 작품을 쓰지 못한 까닭에 작가로서 절박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또 아직 형식적이긴 하지만 민주화 이후 민예총이나 작가회의 모두 행정적인 업무 외에 별로 남은 일이 없을 거라는 생각 때문에 가끔 연말 총회에나 얼굴을 내밀었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김용태와 가끔 만나 술자리에서 회포를 푸는 정도였다.

황석영 소설가·전 민예총 이사장


“민예총, 그의 힘으로 만들어졌고 그의 힘으로 이어가”

신경림 시인 ‘산포도 사랑’ 서 회고
“발기인 섭외·사무실·직원모집
모두 다 김용태 혼자서 해내”
문학평론가 염무웅의 기억엔
“동료를 위해 자신과 예술 희생
계획·실행력 탁월한 문화기획가”

1986년 뉴욕에서 우연히 만나 한국의 민중문화예술을 국외에 소개하기로 의기투합한 황석영과 김용태는 87년 3월 뉴욕과 도쿄 등에서 ‘민중미술 전시회’를 성사시켰다. 사진은 당시 뉴욕의 민중목판화 전시장에서 열린 ‘민주헌법쟁취 미동부지역 결성대회’에서 강연하고 있는 김용태 민미협 사무국장. <한겨레> 자료사진
1986년 뉴욕에서 우연히 만나 한국의 민중문화예술을 국외에 소개하기로 의기투합한 황석영과 김용태는 87년 3월 뉴욕과 도쿄 등에서 ‘민중미술 전시회’를 성사시켰다. 사진은 당시 뉴욕의 민중목판화 전시장에서 열린 ‘민주헌법쟁취 미동부지역 결성대회’에서 강연하고 있는 김용태 민미협 사무국장. <한겨레> 자료사진
“1988년 여름으로 기억된다. 느닷없이 김용태 화백으로부터 만났으면 싶다는 전화가 왔다. 찻집으로 나가니, 황석영과 앉아 있었다. 술집으로 옮겨 장황한 얘기 끝에 최근 젊은 문인과 화가들 사이에 진보적 예술단체를 만들자는 움직임이 있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나를 보자고 한 용건은 바로 진보적 문예단체 만드는 일을 상의하자는 것이었다. 사실은 통고였다. 나더러 사무총장을 맡으라는 것이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인 이런 제의를 아무리 줏대없는 나라도 쉽게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내가 거절하자 김 화백이 사무차장으로 모든 일을 도맡아 할 것이니 이름만 올리면 된다고 유혹하고, 황석영은 대변인을 맡아 바깥일을 전적으로 책임지겠다며 변죽을 울렸다. 더군다나 조직을 만들면서 가장 골치인 자금 문제는 둘이서 책임지겠다는 바람에 나는 대답을 겨우 하루 미루었다가 수락을 하고 말았다.”

민예총 초대 사무총장을 지낸 시인 신경림은 <산포도 사랑, 용태 형>에서 ‘헌신적인 문화운동가의 희생’이란 제목으로 고 김용태 선생과 함께한 인연을 회고했다.

“이듬해 겨울 민예총 창립을 하게 되기까지, 약속한 대로 김용태 화백은 발기인을 섭외하고 돈을 구해 사무실을 얻고 직원을 뽑고…, 모두 다 혼자서 했다. 내가 한 일이 있다면 당시 ‘금성’ 사보팀에서 일하던 황명걸 시인에게 부탁해 텔레비전이며 선풍기며 몇 가지 전자제품을 들여놓은 것뿐이다.”

“민예총 창립에 그가 많은 일을 했다는 말은 충분하지가 않다. 민예총은 전적으로 그의 힘으로 만들어졌고 그의 힘으로 이어져 갈 수 있었다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그는 많은 희생을 했다. 우선 그림을 많이 그리지 못했다. 동료들의 작업 환경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데 자신의 예술적 에너지와 시간을 다 낭비했다고 표현해도 지나치치 않을 것이다. 이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못 된다. 이웃을 위해서, 자기는 희생을 할 수도 있다는 착한 생각이 그로 하여금 사반세기 동안 민예총을 책임지게 만든 것이다.”

“훗날 그는 사무총장을 거치고, 이사장도 맡았지만 그동안 그가 치른 희생은 비단 자기 예술을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는 데 그치지 않는다. 물질적 보상이 따르지 않는 예술운동은 숙명적으로 가난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겠으나, 그가 민예총에 쏟는 애정은 거의 병적이었다. 가령 한때 그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상임이사를 하기도 했는데, 이때의 수입도 거의 민예총 일에 쓰고 집안 살림에 보탬을 주지 않았으니, 그의 민예총에 대한 지나친 애정이 그를 결국 가난하게 만든 셈이다.”

1993년 2월 민예총 정기총회에서 강연균 화백과 함께 공동의장을 맡았던 문학평론가 염무웅이 기억하는 ‘김용태’도 크게 다르지 않다.

“93년 합법공간 안으로의 진입, 즉 민예총의 사단법인화를 결정하고 이를 실현시켰다. 영광스럽게도 내가 초대 이사장으로 선출되었는데, 실은 막후에서 모든 것을 책임지고 계획·실행한 것은 김용태였다. (…) 그는 사람 사귀는 데 천재였다.”

하지만 그는 “이 뛰어난 능력가 김용태에게 딱 한가지 약점이 있었다”고 안타까워했다. 바로 “자신의 능력을 현실에 마음껏 옮길 수 있는 힘으로서의 돈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대신 어디선가 후원자를 구하는 재주는 약간 있었던 김용태는 탁월한 문화기획가’라고 결론맺었다.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흥행 파죽지세 ‘베테랑2’…엇갈리는 평가에 감독이 답했다 1.

흥행 파죽지세 ‘베테랑2’…엇갈리는 평가에 감독이 답했다

추위에 쫓겨 닿은 땅…한국인은 기후난민이었다 [책&생각] 2.

추위에 쫓겨 닿은 땅…한국인은 기후난민이었다 [책&생각]

한드에 일본 배우, 일드엔 한국 배우…흐려지는 ‘드라마 국경’ 3.

한드에 일본 배우, 일드엔 한국 배우…흐려지는 ‘드라마 국경’

현금다발 든 돼지저금통 놓고 운동회?…‘오징어게임2’ 예고편 4.

현금다발 든 돼지저금통 놓고 운동회?…‘오징어게임2’ 예고편

‘오아시스’의 중심에서 ‘스웨이드’를 외치다 5.

‘오아시스’의 중심에서 ‘스웨이드’를 외치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