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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길을 찾아서] 그는 죽기 전까지도 ‘한민족 상생화해 제전’을 생각했다

등록 2014-11-09 18:54수정 2015-04-28 22:07

[길을 찾아서] 용태 형과 문화운동시대 (18)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의 16번째 이야기 ‘용태 형과 문화운동시대’는 지난 5월 작고한 김용태 전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이사장이 끝내지 못한 구술을 그와 더불어 한 시대를 헤쳐온 수많은 문화예술인들이 대신 들려주는 기획이다. 헌정 문집 <산포도 사랑, 용태 형>의 필진 가운데 20여명이 기꺼이 나섰다. 열일곱번째 주자인 작가 황석영씨가 1989년 방북 파동과 민주화운동사에서 민중문화운동의 의미 등으로 대미를 장식한다.

노태우 정부가 ‘7·7선언’을 발표하자
‘남북 민간교류’의 주도권을
정부에 빼앗겨서는 안 된다며
나와 문 목사의 방북을 논의했다

내가 방북 이후 10여년을
망명과 투옥으로 보내는 동안
그는 끝까지 남아 민예총을 지켰다

■ 돈 문제는 서툴고 머뭇거렸던 민예총의 살림꾼

1988년 12월 나와 김용태가 민예총을 꾸리면서 가장 걱정한 것은 언제나 그렇듯이 결국 돈 문제였다. 번듯하지는 않아도 그래도 사람들이 모이고 회의라도 할 수 있는 공간과 사무집기라도 마련해야 하고, 당장은 출범식 비용부터 적어도 서너 달은 버틸 수 있는 기본적인 운영자금이 필요했다. 우선 형편이 좀 나은 각 분과위원장과 화가·작가들이 특별 찬조금을 내도록 했고 그림도 기증을 받아 팔아 쓰도록 했다. 그래도 자금은 터무니없이 모자랐다.

지난 3월26일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린 ‘김용태와 함께한 문화예술인들의 출판기념전시회-함께 가는 길’에서 나란히 자리한 고 김용태(왼쪽) 선생과 황석영 작가. 그날 두 사람은 마지막으로 가을에 문화제전을 벌이기로 다짐했다.  사진 장성하씨 제공
지난 3월26일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린 ‘김용태와 함께한 문화예술인들의 출판기념전시회-함께 가는 길’에서 나란히 자리한 고 김용태(왼쪽) 선생과 황석영 작가. 그날 두 사람은 마지막으로 가을에 문화제전을 벌이기로 다짐했다. 사진 장성하씨 제공
우리는 예전 광주에서 현대문화연구소를 열 때나 작가회의 기금 마련을 위해, 소장 고서며 미술품을 내놓고 도자기를 제작하고, 유명 화가와 문인들의 글과 그림을 도자기에 그려서 전시회를 열었던 경험이 있었다. 그래서 그때 저절로 생겨난 인맥과 호의적인 시민들과 정치권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나는 김용태에게 김상현 민주당 부총재를 소개했는데, 그는 김영삼-김대중 양쪽의 다리 노릇을 하던 처지라 동교동계와 상도동계 모두에 닿는 접점이기도 했다. 양쪽에서는 미술품을 사주는 형식으로 도움을 주었다. 그는 남도의 의제·남농 등 서화 대가들의 병풍과 대형 그림 등을 모아주었고 일부 구매자까지 소개해 주었다.

그렇게 해서 출범 기금은 가까스로 마련됐지만 자금 문제는 내내 우리를 괴롭혔다. 김용태는 행정 실무나 조직 관리에는 따를 자가 없었지만 항상 돈 문제에서는 서툴고 수줍었다. 성격 자체가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못했다. 그러면 나 같은 외향적인 친구들이 뛰어다니며 사람들을 만나 때로 윽박지르기도 하면서 문제를 해결하곤 했다. 주위에서 누군가 수익사업 아이디어라도 내놓으면 그는 ‘야, 그걸 차마 어떻게 하냐’고 머뭇거렸다. 그러니 아무리 자원봉사라 해도, 사무국은 늘 지역에서 올라온 활동가들에게 숙박은커녕 밥 한 끼 사줄 수 없을 정도로 쪼들렸다. 물론 그가 집에 한푼도 보태줄 수 없던 것은 당연했고, 단골술집이래야 인사동 점포 종업원들의 밥집이던 부산식당에서 술국에 소주를 마시는 게 고작이었다.

■ ‘딴따라’ 자처한 현장 문화활동가들의 자부심

민중문화운동사를 돌이켜보면, 70~80년대 유신독재의 검열과 문화독점 상황 아래서 학생·시민·노동자·농민들에게 독재에 대한 비판과 저항의식을 알리고 고취하고자 전통 연희 양식을 빌려 공연했던 마당극 운동이 그 시원이었다. 그러다 대학생들이 캠퍼스를 벗어나 공장에 들어가거나 공장지대에서 야학을 열게 되고, 농활이라든가 현지 교회들과 연계해 농촌에서도 문화교육을 할 필요가 생기면서 활동가들이 현장으로 나가게 되었다.

초기에는 공장과 농촌 지역의 성당이나 교회가 문화운동의 근거지가 되었고 선교를 앞세운 노동자나 농민 프로그램을 다양하게 시도했다. 우선은 마당극 공연에 참가한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활동가 그룹으로 조직할 수가 있었고 분야마다 다른 사람들이 모이면서 장르가 통합되었다. 공연을 보러 온 사람들이나 현지에서 도와준 사람들로 현지 활동가와 지원세력도 저절로 형성되었다.

독서 모임이니 학습이니 의식화 과정이니 하는 정치적 모임은 우선 장기적인 시간과 인력이 필요하고 위험한 데 비해서 효과는 제한적이고 소그룹 단위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비해서 마당극은 공연 자체가 효과를 단기간에 볼 수 있다는 점이 유리했다. 초기에 민주화운동권 안에서는 문화운동에 대해서 식민지 시대의 ‘개량적 문화주의’를 떠올리고 경원하거나 낮춰 보는 경향이 강했다. 하지만 문화활동가들이 ‘딴따라’를 자처한 것은 자기 일에 대한 비하가 아니라 사실은 일종의 자부심이기도 했다. 70년대 말에 이르러 대학과 현장의 연결이 가능했던 것은 대부분 문화운동 단체들 덕분이었고 각 운동 현장에서 문화교육은 필수적이 되었다.

80년대 들어 광주항쟁 전후 문화운동권의 경험은 민주화운동 진영 전체에 확신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우선 도시에 문화운동 거점을 만들고 공장과 농촌 현장에서는 자생적으로 조직된 현장 문화활동가를 지원하도록 했다. 이들은 거의가 노동자나 농민들이었고, 도시의 지원 세력은 교사, 종교인, 중산층 주부들, 의사, 약사 등이었다. 성공적인 프로그램들은 팸플릿을 제작해 다른 지역과 현장으로 퍼뜨렸다. ‘마당극’이라는 느슨한 매체가 계속해서 일감을 재생산해냈던 것이다.

이를테면 마당극판에서 형성된 노래패가 생겨나자 카세트테이프의 제작이 가능해졌고, 그림패는 단기간에 찍어서 널리 퍼뜨릴 수 있는 판화 작업에 나서고, 이 작업이 자연스럽게 8㎜ 단편영화나 현장 다큐를 찍는 비디오 작업으로 발전해 나아갔다. 이른바 미디어로의 확산과 함께 남미에서의 경험인 카세트 작업은 아시아 각처로도 퍼져 나갔다. 국외동포와 연결이 이루어지면서 현지에서도 같은 방법의 활동이 번져 나갔다.

김용태는 민예총을 결성해 각 지역 활동가들과 국외의 문화운동 단체를 연결하는 구심점 노릇을 했고, 시민과 전문가의 연결도 모색했다. 그 토대 위에서 남북을 잇는 ‘통일문화운동’에도 나서게 된다. 90년대 이르러 민예총이 독보적인 문화운동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그런 국내외 인맥과 연대 속에서 가능했다.

병원에 실려가기 전 통화를 했다
“용태야 궂은 일만 시켜 늘 미안해”
그러자 그는 웃으며 답했다
“내가 받아줘야지 누가 받아주냐?”

■ 민예총이 방북 파동을 피할 수 있었던 묘수

88년 7월 서울올림픽을 한달 남짓 앞두고 노태우 정부는 이른바 ‘7·7선언’을 발표했다. 남북 민간교류를 적극 추진하겠다는 것이었다. 그즈음 전국 단위의 연합 운동조직이 다섯개쯤 있었는데 노동·농민·교사·대학생·종교계 및 재야 등이었다. 우리는 그동안 권위주의 정부 시절 민주화운동이 상승기에 올라올 때마다 북한을 빌미로 공안사건을 터뜨려 탄압하던 숱한 경험을 겪었으므로, ‘남북 민간교류’의 주도권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남북교류 문제를 정부가 주도하게 되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은 물론 정치적으로 이용만 당한다는 우려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재야를 중심으로 종교인인 문익환 목사(전민련 상임고문)와 예술인인 황석영 작가(민예총 대변인)가 방북을 하게 되면 대내외적으로 효과가 클 것이며 목사와 작가를 간첩으로 조작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의견이 나왔다. 김용태와 나는 깊이 의논했는데, 문제는 이제 막 출범한 ‘민예총’ 조직의 안전이었다. 우리는 현실 정치권과의 연계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또다시 ‘정치권의 마당발’ 김상현 부총재와 의논하기로 했다. 김용태와 나는 홍대 앞 서교호텔에서 이른 아침에 김 의원과 만났다. 조찬이 끝나갈 즈음 김용태가 나의 방북 의사를 밝혔다. 이런 의견을 양김 쪽에도 전해주기 바란다는 부탁의 말씀까지 곁들였다. 그 이틀 뒤 김 의원으로부터 전화가 왔다고 김용태가 내게 알렸다. 그러면서 ‘김 의원이 속으로 애가 달았을 것’이라고 했다. ‘북에 가기로 했다’는 얘기를 듣는 순간 이미 국가보안법의 현행법상 ‘불고지죄’가 성립되기 때문이었다.

1989년 3월 문익환 목사와 황석영 작가의 방북 계획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이유로 김대중 당시 평민당 총재, 이종찬 민정당 사무총장, 김상현 민주당 부총재 등이 공안당국의 조사를 받는 등 정치권으로 파문이 번지고 있는 상황을 보여주는 <한겨레> 89년 5월2일치 1면 기사.
1989년 3월 문익환 목사와 황석영 작가의 방북 계획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이유로 김대중 당시 평민당 총재, 이종찬 민정당 사무총장, 김상현 민주당 부총재 등이 공안당국의 조사를 받는 등 정치권으로 파문이 번지고 있는 상황을 보여주는 <한겨레> 89년 5월2일치 1면 기사.
김 부총재는 당시 집권 민정당 당사가 있던 인사동의 한 음식점으로 약속 장소를 잡았다. 다시 셋이 모여 앉은 자리에서, 그는 이런 일은 혼자 감당하기 힘들어서 민정당 사무총장인 이종찬 의원을 불렀다고 했다. 그렇게 이 의원과 넷이서 저녁을 함께하면서 방북 의사를 전했다. 이 의원은 ‘당국의 허가를 받을 거냐’고 물었고 ‘물론 그렇게 할 것’이라고 나는 답했다. 그는 얼굴이 밝아지면서 ‘민족적으로 좋은 일’이라고 덕담을 했다. 그러고는 헤어졌다.

그 며칠 뒤 89년 3월20일 나는 도쿄와 베이징을 거쳐 평양에 도착했다. 뒤이어 3월25일 문익환 목사의 방북 사실이 알려지며 사건화되자 김상현은 이종찬에게 미루었고, 이종찬 쪽은 ‘그때 농담하는 줄 알았다’고 변명했지만 끝내 사무총장에서 물러나야 했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 내가 ‘본의 아니게 누를 끼쳤다’며 사과하자 그는 ‘정치가 원래 그런 거 아니냐’면서 웃어넘겼다. 어쨌든 김용태의 치밀한 기획으로 민예총과 재야의 책임은 모면한 셈이었다. 내가 이후 10여년을 망명과 투옥으로 보내는 동안 그는 끝까지 남아 집(민예총)을 지켰다.

■ 알타이 연합, 동학혁명 120돌 제전…못다 한 꿈

2008년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뒤 우리와 정치적 지향은 다르지만 남북 문제에 좌우가 있을 수 없다면서, 이전부터 안면이 있는 엠비(MB)에게 남북관계의 진전을 위한 조언을 해보는 게 어떠냐는 논의가 내부에서 나왔다. 김용태·조성우·최열 등 후배들과 만나서 ‘유라시아 평화열차’와 ‘알타이 문화·경제 연합’에 대한 나의 기획을 검토했다. 아다시피, 2009년 나는 엠비의 중앙아시아 방문길에 동행했고 이 일로 진보·보수 양쪽으로부터 격렬한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이미 북쪽에도 의사 타진이 이루어진 때여서 나는 해명보다는 침묵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사이 몽골에서는 우리보다 적극적이어서 남쪽에 대통령 특사도 보냈고 북쪽도 방문했다. 북쪽에서도 응답이 있어 2010년 여름 몽골의 울란바토르에서 남과 북 그리고 몽골을 비롯한 중앙아시아 5개 나라가 모여서 ‘초원문화제’를 열기로 했다. 하지만 그해 연말쯤 나는 정부 안에서 부정적인 기류가 흐르고 있음을 감지했다. 2010년 들어 나는 청와대 쪽으로부터 북한을 빼고 초원문화제를 진행하겠다는 통보를 받고 일에서 빠졌다. 그해 3월 천안함 사건이 터지고 몇달쯤 뒤 열린 초원문화제는 규모를 크게 줄여 세미나 정도에 그쳤다.

김용태는 암 투병 중이던 지난봄에도 내게 ‘알타이 연합’의 재추진 가능성을 물었다. 만약 그가 살아있다면 우리는 ‘갑오동학혁명 120돌 한민족 상생화해 제전’을 열었을 것이다. 주위의 화단 후배들이 그의 유고를 미뤄 짐작하고 전시회를 열던 지난 3월 그는 내게 ‘한민족 상생화해 제전’을 열자고 얘기했다. ‘몸 괜찮겠느냐’고 묻자 그는 ‘올가을까지는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했었다.

그 뒤 외국 행사를 다녀온 나는 그가 마지막으로 병원에 실려 가기 며칠 전 통화했다. 그가 얼마 살지 못할 것을 직감했다. 나는 늘 일만 벌여놓고 그에게 뒷설거지를 맡겨왔던 일이 새삼 생각나서 ‘용태야, 궂은일만 하라고 그래서 늘 미안했다’ 했더니, 그는 웃으며 답했다. “형은 늘 잘났잖아. 내가 받아줘야지 누가 받아주냐?”

젊은 날, 일이 벌어질 때마다 내게는 늘 짝패가 있었는데, 김남주, 윤한봉 그리고 김용태가 그들이었다. 특히 김용태는 화가로 출발해 문화운동에 투신하고는 활동가이자 기획가로 생을 마쳤다. 그는 아무런 욕심도 없었고 다만 마음 맞는 친구들과 마주앉아 소주 몇 잔 마시고는 ‘산포도 사랑’으로 기분을 달래주던 민초였다. <끝>

황석영 소설가·전 민예총 이사장


“평생토록 석영 형 때문에 세 번이나 잡혀갔어”

용태 형이 기억하는 ‘황석영 방북기’

1989년 3월 문익환 목사와 함께 평양을 방문했던 작가 황석영은 국외를 떠돌다 93년 귀국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8년형을 받고 5년간 옥살이 끝에 98년 3·1절 특사로 풀려났다. 사진은 황석영 석방대책위원회, 민족문학작가회의, 민예총 등의 문인과 예술인들이 공주교도소 정문 앞에서 황 작가의 석방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있는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1989년 3월 문익환 목사와 함께 평양을 방문했던 작가 황석영은 국외를 떠돌다 93년 귀국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8년형을 받고 5년간 옥살이 끝에 98년 3·1절 특사로 풀려났다. 사진은 황석영 석방대책위원회, 민족문학작가회의, 민예총 등의 문인과 예술인들이 공주교도소 정문 앞에서 황 작가의 석방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있는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민예총 만들고 얼마 안 된 1989년 어느 날이었을 거야. 황석영 형이 갑자기 사무실에 와서는 ‘나, 평양 가야 되겠다’ 그러더라고. 가시라고 그랬지. 나랑 제일 가까우니깐 의논하러 온 거야. 누구하고 연결됐나 하니깐 일본에 계시는 정경모 선생이라고 해. 총련 쪽은 아니고, 일찍이 군사독재 정권에 쫓겨나 통일운동 해온 지사이자 논객이지. 석영 형이 일본에 가서 만나고 왔다는 거야.”

고 김용태 선생은 <산포도 사랑, 용태 형>의 구술 대담에서 당시 국내는 물론 대외적으로도 큰 파문을 던졌던 ‘문익환 목사, 황석영 작가의 방북’을 이렇게 회고했다.

“아, 그래 가지고 평양에 들어간 거야. ‘문목’보다 석영 형이 먼저 들어갔지. 그러다가 며칠 뒤 문목이 평양에 들어갔다는 사실이 발표되니깐 다들 완전히 뒤집어진 거야. 석영 형은 황해도 해주인가에 있다가 문목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평양으로 바로 올라갔다고 해. 아무튼 그날 저녁 때 신학철 선배와 홍선웅이 우리 집에 놀러와서 같이 술 먹고 있는데 새벽에 안기부에서 쳐들어온 거야. 날 잡아갈라고.”

그렇게 그 악명 높은 남산 지하실로 끌려간 ‘용태 형’은 며칠 동안 고초를 겪어야 했다. “취조를 받는데, 가만 생각해보니깐 나 혼자, 내가 보낸 걸로, 다 되어 있는데, 안 되겠다 싶더라고. 그래서 수사관에게 말했어, 사실대로. ‘가기 전부터, 집권 여당의 이종찬 사무총장도 알고 있었고 야당의 김상현 부총재도 같이 있었다.’ 그랬더니 안기부에서 난리가 난 거야. 이 총장은 애초 육사 출신으로 중앙정보부 간부를 지냈어. 자기네 선임의 이름이 등장하니깐 골치 아프게 된 거지. 3일간 잡아두더니 풀어줬어. 물론 이 총장과 김 부총재 다 조사를 받았어. 그래서 이 총장은 요즘도 나만 보면 ‘야, 용태 이××, 내가 대통령 될 뻔했는데, 너 때문에 다 망쳐버렸다’고 농을 치곤해.(ㅎㅎㅎ)”

그렇게 용태 형과 민예총은 무사했지만, 방북 파동의 주역들도 고초를 피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고 그는 안타까워했다. 문 목사는 김일성 주석과 2차례 회담을 통해 이른바 ‘4·2 선언’을 발표한 뒤 4월13일 김포공항으로 귀국하자마자 구속되었다. 또 고은 시인과 전민련 조국통일위원장 이재오(현 새누리당 의원)도 구속되는 등 공안정국이 덮쳤다. “만약 그때 문목이 곧바로 귀환하지 않았으면, 안기부에서도 잡아넣지 않고 싶었던 것도 같아. 노태우 정부에서도 북방정책을 시작하고 했으니깐. 그런데 아무튼 공안서슬이 퍼렇게 도니까, 석영 형은 그 뒤 4년 넘게 독일로 미국으로 떠돌아다녀야 했어. 그러다 93년 문민정부가 들어서니까 형한테 연락이 왔어. 난 지금 들어오면 구속이라고, 오지 말라고 했지. 그런데 청와대 쪽과 얘기를 했나봐, 괜찮지 않겠느냐고. 결국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잡혀가서 5년이나 옥살이를 했지.”

“평생토록 석영 형 때문에 세번이나 잡혀갔다”는 용태 형은 “나나 석영 형은 물론이고 누구든 잡혀가면 예술인들이 철야농성에 기자회견도 열어 지지를 해줬다”며 그 시절의 연대의식을 환기시키기도 했다.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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