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연옥 한산모시장이 충남 서천군 한산면에 있는 자신의 공방 베틀에 올라 모시를 짜고 있다.
[장인을 찾아서] 중요무형문화재 한산모시장 방연옥씨
‘이골이 난다’는 말이 있다. 아주 길이 들어 몸에 푹 밴 버릇을 일컫는 말이다. 이(치아)에 골이 파일 정도로 반복된 행위를 하는 것에서 유래된 말일까? 그렇다면 이골이라는 말은 모시를 만드는 행위에서 시작된 듯하다. 모시풀 줄기에서 뽑아내는 모시는 여인네들의 침과 이가 가장 큰 구실을 한다. 모시를 만드는 과정에서 모시풀 줄기(태모시)를 입술과 이, 혀, 침을 이용해 가늘게 ‘째기’를 해야 한다. 이때 입술에서 피가 나고 이에 골이 파여 ‘이골 난다’는 말이 생겼을 것이다. 한 필의 모시를 짜는 데 침이 석 되 들어간다고 한다. 물에 적신 태모시를 침으로 녹이면서 입술로 굵기를 가늠해 째야 한다. 얼마나 가늘게 째느냐에 따라 모시의 질이 정해진다.
한여름 더위를 이기게 해주는, 날아갈 듯 가벼운 옷의 재료인 모시는 지금도 기계가 아닌 사람이 만든다. 여인네들의 땀과 침으로 완성되는 모시는 한민족의 대표적인 천연섬유다. 우아하고 기품이 있지만 속이 훤히 비쳐 때로는 야릇한 분위기도 연출한다. 그물 모양으로 이어져 있지만 그물 사이사이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투명해 ‘잠자리 날개옷’이라고도 불린다. <춘향전>에서 춘향이 감옥에 갇힌 이몽룡을 보고 자신의 장롱에 있는 모시옷을 팔아 그 돈으로 비단을 사서 도포도 지어주고 신발과 갓을 사서 의관을 갖추어 줬다는 구절이 있다. 예로부터 화폐를 대신했던 모시는 비단보다도 귀한 옷감이었다.
중요무형문화재 14호 한산모시장 방연옥(68)씨는 입술을 꼭 다물고 베틀에서 작업한다. 무심한 표정이다. “탁 탁 탁 탁” 리듬감있게 반복되는 소리는 그가 모시짜기의 장인임을 알게 한다. 허술해 보이는 베틀의 위아래로 끼워져 있는 날실 사이로 씨실 꾸리가 담긴 북(날실 사이를 오가며 씨실을 보내는 기구)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움직이고, 바디(실 끼우는 장치)를 한번 내리치고, 다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북을 옮긴다. 그렇게 수백번, 수천번 반복하면 촘촘한 모시원단이 나온다. 모시 날실은 콩가루 풀을 먹였기 때문에 날씨가 조금만 건조해도 뻑뻑해져서 바디에 달라붙어버리거나 끊어진다. 한여름에도 문을 닫고 땀을 뻘뻘 흘리며 작업을 해야 한다. 그래서 모시를 두고 ‘여인의 땀이 서말, 눈물이 서말’이라고 했다. 피땀으로 짠 모시를 팔아 번 돈을 서방들이 주막 여인네들 치마폭에 날리고 오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모시짜기가 좋았어요. 어머니 젖을 먹으면서 배우기 시작했으니까요.” 어머니가 마흔네살에, 8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그는 늦게까지 어머니 젖을 빨았다. 모시를 짜는 어머니 옆에서 자란 그는 여섯살 때 이미 바디 꿰기를 할 정도로 모시에 익숙했다. 할머니들은 담뱃대로 어린 그의 머리를 치며 “힘든 일을 일찍부터 배우려느냐”고 야단치기도 했다.
6살때부터 모시짜기 빠져 야단맞기도
결국 초등학교도 그만두고 ‘모시 일’
29살때 모시 본고장 ‘한산’으로 시집
후계자 찾던 ‘1대 한산모시장’ 이웃에
5년간 입술 터지며 모시째기부터 배워
2000년 30년만에 기능보유자 인정받아
그는 초등학교 5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었다. 굳이 학교를 다닐 필요성을 어린 마음에 느끼지 않았다고 한다. 어머니가 책보를 허리에 묶어주며 학교 가라고 등을 떠밀어도 그는 야단을 맞아가며 집에 남아 모시 일을 했다. “학교 가기 전 한글을 깨쳤고, 구구단을 외웠어요. 그리고 주판도 튕길 줄 알게 됐어요. 이놈만 있으면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는 부자가 되고 싶었다. 가난이 싫었다. 그는 값비싼 모시를 짤 줄 알았다. 모시를 짜 내다 팔면 생활에 걱정이 없을 것으로 여겼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산골마을이라 여자 아이들은 학교에 잘 가지 않던 때이기도 했다.
비교적 늦은 나이인 29살에 한산면으로 시집을 갔다. 한산은 예로부터 모시의 본고장. 한산을 포함한 서천군 일대 농가에서 모시 일은 여성에게 가장 큰 부업이었다. 서천의 여인들은 곱게 짠 모시를 한산 모시장에 내다 팔아 자식을 키워냈다. 마을엔 ‘1대 한산모시장’인 문정옥이 살았다. 마침 후계자를 찾던 문정옥은 그에게 본격적으로 모시짜기를 배워보라고 권했다. 인간문화재가 뭔지도 몰랐던 그는 “집에 가서 애기 아빠에게 물어보고 말씀드릴 게유”라고 답했다. 남편은 “일러주신다면 감사하게 생각하고 잘 배우라”고 했다.
일주일에 세번씩 꼬박 5년을 배웠다. 한산모시의 비법은 모시째기에 있다. 모시풀의 줄기 껍질을 벗겨서 말려 그것을 앞니로 쪼개야 한다. 잘게 쪼개야 가늘고 고운 모시가 나온다. 처음 모시째기를 할 때는 입술이 부르트고 피가 나 밥을 제대로 먹지 못했다. 나중에는 입술에 굳은 살이 박였다. 모시를 쪼개려면 앞니를 이용해야 한다. 일하기 편하게 이도 새로 해 넣었다. 그렇게 30년이 지난 2000년 기능보유자로 인정받았다.
어릴 때였다. “여름날 어머니와 바깥에서 모시를 삼고 있었는데 어느 아주머니가 지나가다 저를 유심히 보더니 ‘애기가 크면 이름이 나겠다’고 했어요. 어릴 때 달리기를 잘했거든요. 육상선수가 되려나 했어요. 이제 와 보니 바로 모시짜기였어요. 호호호.”
서천/ 글·사진 이길우 선임기자 nihao@hani.co.kr
한산모시장이란 곱기로 이름난 여름 필수 직물
2011년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한산모시는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 지역에서 생산되는 모시(저마) 껍질을 쪼개고 이은 실로 짠 여름철 직물이다. 임금도 평상시엔 흰 모시도포를 입었다. 한산의 모시는 ‘밥그릇 하나에 모시 한 필이 다 들어간다’는 말이 생길 만큼 가늘고 곱기로 유명하다. 모시풀은 1년에 3번 정도 수확하는데, 수확 시기가 이르면 섬유가 약하고, 늦으면 올이 굵고 거칠기 때문에 8월 초순에서 하순 사이에 수확하는 모시가 제일 좋다. 한산모시짜기 기능은 2011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한산모시 제작 과정은 모시풀을 베어 겉껍질을 벗겨 부드러운 속살을 골라 태모시를 만드는 것으로 시작된다. 낫과 같이 생긴 손가락 크기의 특수한 칼로 훑어서 벗겨낸 속살을 한 주먹의 다발로 묶어서 4~5회 물을 반복해서 적시며 양지에 말린다. 잘 말린 태모시를 이와 입술을 이용해 쪼개는데 이때 모시의 굵기가 결정된다. 모시는 굵기에 따라 올의 굵기가 가장 가는 상저(세모시), 중간 정도의 중저, 가장 굵은 막저로 구분한다. 모시째기가 끝난 모시는 전지라는 틀에 걸쳐 놓고 한 올씩 입술의 침을 이용해 이어붙인다. ‘조슬대’라는 틀에 매어 한 필의 모시를 짤 만큼의 실을 감는다. 실을 부드럽고 보푸라기가 생기지 않도록 콩풀을 먹이면서 모시베틀에 얹을 ‘도투마리’라는 틀에 감는다. 왕겻불로 콩풀을 말리면서 작업을 한다. 베틀의 날실이 교차될 때마다 씨실이 담긴 북을 통과시켜 씨실을 걸어주며 천을 짠다. 다 짠 모시는 흐르는 물이나 더운물로 헹군 뒤에 콩즙을 빼기 위해 잿물에 1~2시간 정도 담갔다가 건져내고 더운물을 끼얹어가며 방망이로 두들긴다. 염색은 쌀겨나 쪽, 그리고 치자나 홍화 염색 등 색이 차분하고 은근한 천연염색을 많이 한다.
이길우 선임기자
투명하고 가벼워서 ‘잠자리 날개옷’으로 불리는 한산모시옷의 재료인 모시는 아직도 처음부터 끝까지 아낙네들의 인내와 땀으로 만들어지는 고급 옷감이다.
결국 초등학교도 그만두고 ‘모시 일’
29살때 모시 본고장 ‘한산’으로 시집
후계자 찾던 ‘1대 한산모시장’ 이웃에
5년간 입술 터지며 모시째기부터 배워
2000년 30년만에 기능보유자 인정받아
쌀겨, 쪽, 치자, 홍화 등 갖가지 천연염료로 물들인 모시 원단은 은은한 아름다움을 뽐낸다.
여름 무더위를 시원하게 날려주는 전통 모시옷은 여인네들이 한여름 내내 골방 베틀에 올라 피땀을 쏟아 짜내는 모시 원단으로 만든다.
한산모시장이란 곱기로 이름난 여름 필수 직물
2011년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모시 원단은 모시풀의 줄기를 잘라낸 태모시로 만든다. 여린 모시풀 잎은 모시떡이나 모시송편으로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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