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시사만화 ‘고바우 영감’이 태어난 지 60주년이다. 1955년 2월1일 <동아일보>에 연재를 시작해 여러 신문을 거치며 50년간 총 1만4139회 연재된 최장수 네컷 시사만화다. 또 김성환 화백은 최근 시사만화가 아닌 자신의 회화 작품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그는 시사만화가들의 대부다. <한겨레>에 시사만화 ‘한겨레 그림판’을 그리는 장봉군(왼쪽) 화백도 김 화백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지난달 25일 장 화백이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구미동에 있는 김 화백의 자택을 찾았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토요판] 특집
장봉군 화백이 만난 김성환 화백
장봉군 화백이 만난 김성환 화백
▶ ‘고바우 영감’의 김성환 화백은 시사만화계의 원로로 불리지만 화가이기도 하다. 김 화백은 지난달 28일부터 이달 8일까지 서울 인사동 인사아트센터에서 십장생을 주제로 한 ‘고바우 십장생도전’ 전시회를 열었다. 1955년부터 2000년까지 45년 동안 총 1만4139번‘ 네컷 만화’를 그렸다. 그의 만화를 보며 자란 <한겨레> 장봉군 화백이 김 화백을 만나 인터뷰했다. 시사만화가가 기록한 한국 현대사를 전한다.
오늘을 기록하는 것은 역사가가 아니다. 매일 생산되고 버려지는 것들이 쌓여 역사가 된다. 신문과 방송 뉴스, 주·월간지의 기사와 사진 등은 현대의 사관이다. 한때 종이신문이 대중매체의 대표였다. 대중들은 가로 391㎜, 세로 545㎜ 크기(신문 대판 판형)의 창으로 세상을 보고 이해했다. 사실(기사)과 의견(칼럼), 분노와 즐거움이 거기 다 있었다. 네컷 시사만화는 가장 인기있는 코너였다. 시사만화가는 네컷의 작은 사각형 안에 그날을 포착해 넣었다. 그날의 가장 중요한 사건이나 분위기를 절묘하게 기승전결의 이야기로 구성했다. 신문사 네컷만화마다 개성적인 캐릭터가 있었다. 풍자, 해학, 익살이 대중을 웃기고 울렸다. 신문사마다 시사만화가를 채용했다. ‘고바우 영감’의 김성환(83) 화백은 그중에서도 빛났다. 1955년 2월1일자부터 2000년 9월29일자까지 1만4139회에 걸쳐 ‘고바우 영감’의 시선으로 당대를 기록했다. 2013년 등록문화재 ‘538-2호’로 등록됐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그가 작업한 원화를 근대사 사료로 소장하고 있다. 2014년 ‘고바우가 바라본 우리 현대사’ 전시회가 열렸다.
후배 사관이 선배 사관을 인터뷰했다. <한겨레> 장봉군 화백은 1992년 시사만화가로 데뷔했다. <문화일보> 등을 거쳐 1997년부터 지금까지 <한겨레>에서 ‘한겨레 그림판’ 만평을 그리고 있다. 2000년 ‘전국시사만화작가회의’(현 전국시사만화협회) 초대 회장을 지냈다. ‘한겨레’ 이름은 몰라도 ‘장봉군’ 이름은 아는 만화 독자가 많다. 장봉군 화백도 고바우 영감을 보며 자란 ‘고바우 키드’다. <문화일보>에 잠시 재직하던 시절 김 화백과 처음 만났다. 그림체부터 아이디어 포착까지 시사만화에 대해 배웠다. 지난달 25일 오후 장 화백이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구미동의 김 화백 자택을 방문해 인터뷰했다. 독재권력의 탄압 등 시대의 추억부터 어린 시절, 작품활동 노하우 등을 세시간에 걸쳐 두루 물었다.
“국민의 한숨 속에 고바우가 자라났다”
-17살 때 만화를 시작하셨다. 시사만화의 전설이나 대부로 불리신다. ‘고바우 영감’만 45년간 신문사상 최장기 연재하셨다. 이 만화는 2001년 한국 기네스에 등재됐고 문화재로도 등록됐다. 미국에서 발간된 <세계만화백과사전>에도 소개됐다. 2000년부터는 ‘고바우 만화상’을 제정해 후학들을 격려하고 계신다. 선생의 전성기 때 인기는 저희가 상상할 수 없는 정도인 것 같다. 영화로도 만들어지고 한창때 ‘고바우’ 이름이 들어간 간판이 많았던 걸로 안다.
“지금도 (고바우 이름 간판이) 수십개는 될 거다. 전화번호부 보면 나온다. 지방 포함하면 몇백개쯤 되지 않을까.”
-이어령 전 장관이 1973년 ‘고바우 영감’ 단행본 발간을 기려 “국민의 한숨 속에 고바우가 자라났다”는 말을 했고, 시인 고은도 고바우를 소재로 시를 노래했다. 50주년 우표도 나왔다. 지금으로 치면 아이돌 스타쯤 되지 않을까. 당시 인기를 실감하셨던 일화가 있나?
“전남 해남 근처 섬에 사는 주민이 (신문 배달이 안 되니) ‘고바우 영감’을 보기 위해서 해남읍으로 노 젓는 배를 타고 나왔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몇십년 전 이야기지.”
-정치인들도 자주 밥 먹자고 연락했다고 전해 들었다.
“대선 직전에는 대선 후보들이 가끔 연락했다. 내가 좀 좋지 않게 그리면 금세 몇만표 차이가 나버리니까.”
-예쁘게 그려달라고 요구한 건가?
“예쁘게 그려달라는 게 아니라 못되게만 그리지 말라고. 본전만 찾게 해달라 이거지. 예쁘게 그렸으면 집을 한채 받았어야지. 경제 쪽에서는 (내 시사만화를) 꽤 심각하게 느꼈던 모양이다.”
-1949년에 <연합신문>(지금의 <연합뉴스>와 무관하다)에 ‘멍텅구리’라는 시사만화를 처음 연재하신 걸로 안다. 중학교 때부터 그림에 재능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만화 말고 회화를 할 수도 있었다. 만화를 선택한 동기가 있나?
“초등학교 땐 그림 잘하는 학생으로 알려졌고 경복중학교(지금의 경복고) 땐 학교에서 전국대회에 내 것으로 출품했다. 당시 미술부장을 했다. 동기라는 게… 그때 굉장히 (살림살이가) 어려웠다. 회화로는 경제적인 걸로 연결이 안 되었다. 만화야 즉석으로 (돈으로 연결)되니까.”
-‘멍텅구리’ 작품은 어떻게 시작하신 건가?
“원래 처음 제목은 ‘최멍텅’이었다. 전쟁 전에 <연합신문>이 있었다. 지금 <연합뉴스>랑 상관없다. 당시 나와 같은 하숙집에 <연합신문>을 배달하는 학생이 있었다. 그때는 집에서 신문 받아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내일 아침 신문이요’ 하고 돌아다니면 아무나 사는 거지. 아무튼 신문 파는 학생이 나보고 <연합신문>에 원고를 가져가 보라고 권했다. 신문사에 넉점을 그려 보냈다. 제대로 그린 것도 아니었다. 자도 없어서 줄도 삐뚤빼뚤.”
-만화 그린다고 하니 가족이나 주위에서 반대는 없었나?
“어머니가 애를 낳다 돌아가셨다. 내가 열세살 때다. 가족들이 저더러 산부인과 의사가 되라고 그랬다. 그런데 만화가가 됐다.”
-미술 공부는 어떻게 하셨나?
“화집이고 뭐고 전부 나 스스로 샀다. 6·25가 터지니까 집 골방에 숨어 지내면서 만화 주인공을 만들어보려고 혼자서 그려본 것들이 있다. 그중에 ‘고바우 영감’이 나온 거다.”
-당시 잠깐 대구 판자촌에서 생활하셨다고 알려져 있다. 그때 판자촌 경험이 훗날 시사만화 외에 풍속화를 따로 그리신 것이나 ‘고바우 영감’을 연재하실 때 서민의 애환을 많이 담을 수 있었던 바탕이라고 들었다.
“전쟁 이후 서울 정릉에 살 때는 집 모양은 갖췄었다. 6·25 때 잠시 대구 판자촌에서 지냈다. 전쟁이 터지자 대구로 내려갔다. 당시 국방부(정훈국) 신문의 만화를 혼자 다 만들었다. 북 치고 장구 치고 했다. 그런데 푸대접을 했다. 내가 혼자 신문을 다 만드는데 전부 놀면서 나한테 심지어 청소까지 시키더라. 말이 되나. 나를 그림 그리는 기계로 생각했다. 나이 어리다고 시킨 거지. 나중에 국방부가 부산으로 본부를 옮기자 어느 날 외출증을 끊어서 시내로 탈출해버렸다. 내가 북어같이 생겼는지 두들기면 일을 잘하는 걸로 아는 모양인지.”
1955년부터 2000년까지 45년간
동아·조선·문화일보에 1만4139회
연재한 ‘고바우 영감’의 기록
최근엔 십장생도 전시회 열어
장봉군 화백이 대선배를 만났다 어머니 죽고 돈벌기 위해 만화 시작
전쟁통 골방서 만든 고바우 캐릭터
권력과 불화했던 시사만화가 운명
검열 대비 늘 예비용 그려놓던 시절
박정희 정부 때가 가장 어려웠어
3·15 부정선거 직전 경무대의 회유
전화번호 검색서비스 업체 ‘케이티스’ 누리집에서 검색하면, ‘고바우’ 이름이 들어간 상호가 전국에 152개 있다. 대부분 식당이지만 세탁소, 세차장 등 업종을 가리지 않는다. 1958년에는 ‘고바우’라는 제목으로 영화가 만들어졌다. 배우 김희갑, 김승호(배우 김희라 아버지)가 주연을 맡았다. 그러나 인기는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니다. 김 화백은 바닥에서 출발해 정상에 섰다.
김 화백은 1932년 황해도 개성에서 태어났다. 만주에서 초등학교를 다녔고 해방 뒤 서울로 이주해 경복중학을 다녔다. 어려서부터 미술을 좋아했고 소질이 있었다. 학교 이외에 전문적인 제도 미술교육은 받지 않은 것 같다. 여러차례 ‘영향 받은 화가’를 물었으나 ‘없다’는 답을 들었다. 경제 사정이 좋지 않았다. 17살의 나이에 <연합신문>에 연재한 것도 고료를 받기 위해서였다. 아직 전업 시사만화가로 부르기 어려웠다. 그는 1950년 한국전쟁을 자신의 이력 원년으로 꼽았다. 전쟁이 나자 국방부 정훈국 미술대에서 국방부가 발행한 신문, 삐라, 포스터 등에 글 쓰고 그림 그렸다.
-시사만화가와 권력의 관계는 불화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시사만화가로서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정권을 다 거치셨다. 제일 그리기 힘들었을 때가 언젠가?
“아무래도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이 어려웠지. 이 박사(이승만 전 대통령) 땐 경찰이 (대언론 활동) 대행을 한 거고. 그런 거 하라고 나중에 박정희 정부가 (중앙)정보부 만든 것 아닌가. 이 박사 땐 경찰 중심으로 했다. 시경 형사들이. 이승만 정부 당시 정부를 비판한 만화로 서울 시경에 불려가 조사받았다. 갑자기 조사실에 검정 모자에, 검정 안경에, 검정 마스크에, 검정 잠바를 한 사람이 왔다. 까마귀가 있는 줄 알았다. 고개를 까딱하며 ‘가자’고 하더라. 공포심을 유발하기 위한 거였다. 현재 서울역 부근에 시경 분실이 있었다. 밖에는 ‘통일기업사’라는 주유소로 되어 있는데, 가짜 주유소다. 경찰을 따라 여기로 올라가는데 뒤에서 보니 경찰 양말이 구멍 나 있더라. ‘이 친구도 가엾은 친구구나’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겁 안 나셨나?
“글쎄, (불법 연행이) 몇번쯤 되니 괜찮더라. 박정희 정부 때 중앙정보부에 갔을 땐 (수사관이) 앞에선 꽥꽥거리더니 다른 수사관들이 전부 점심 먹으러 나가자 제일 심하게 소리치던 수사관 중에 한명이 갑자기 공손하게 나한테 ‘사인 좀 해달라’고 하곤 했다. ‘양주 한병 들고 가면 그림 그려주실 수 있나’라고 묻기도 했다.”
-만화 작품과 관련해 압력과 회유도 많았던 걸로 안다. 금전적 회유도 전부 거절하셨더라. 거부 뒤 뒤끝을 경험하진 않으셨나?
“뒤끝은 없었다. (박정희 정부 때) 시사만화가 전체 10여명을 초대해서 거마비라고 몇십만원 주는 것 정도는 받았다. 도저히 나만 안 받을 수 없어서. 이승만 정부 때의 경우 본격적인 회유는 (1960년) 3·15 부정선거 전에 있었다. 경무대(지금 청와대)에 근무하는 경찰 총경이 나한테 연락해서 이기붕 부통령이 재선되게끔 전국에 뿌릴 팸플릿을 그려달라고 했다. 300만~400만원쯤 준비했다고 말했다.”
-지금으로 치면 엄청난 액수다.
“당시 내가 집을 팔았는데 그때 20만원을 받았다. 300만~400만원이면 조그만 빌딩 살 돈은 됐다. 그 돈을 현금으로 주겠다고 한 거지. 아마 내가 ‘더 달라’고 했으면 더 줬을지 모른다.”
-그걸 단호히 거부하신 거네. 이후에 정부 쪽에서 더 연락이 오지는 않았나?
“없었다. 그 뒤 부정선거로 망한 거지, 뭐. (학생한테) 총질하고. 이 박사 부부가 하와이에 망명한 뒤 <한국일보> 기자가 찾아가 물어보니 프란체스카 여사가 ‘우린 김씨 때문에 망했어요’라고 말했대. 그게 보도에도 났어. 그 김씨가 누군지는 모르겠는데.”
-김 화백을 지칭하는 건가?
“그럴 수도 있겠지. 사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사건 이후 돌아가시기 전까지 나한테 잘해줬다. 프란체스카 여사가 갖고 있던 부채에 ‘고바우 만세’라고 써서 내게 주기도 했지. 어느 재벌 총수와 얽힌 일화도 기억난다. 1980년대에 재벌 총수가 시사만화가 대여섯명을 오찬에 초대했다. 당시 내가 재벌을 묘사하면서 ‘코트를 입었는데 모조리 정부 것이고 단추만 자기 것’이라는 식으로 묘사했어. 제발 그렇게만 그리지 말아달라고 하더라.”
전두환 대통령과 관련해 그렸던 문어
-우표 수집 취미가 생긴 게 독재정권 당시 걸린 불면증 때문으로 안다.
“정부에 반대한 국회의원이 골목에서 맞아 쓰러지고 그랬던 시절이다. 5·16 쿠데타를 지지했던 박창암씨(만주군 출신의 군인, 정치가) 같은 장성도 쿠데타 모의범으로 잡혀가고 그랬지.”
-투옥되신 적도 있나?
“경찰 유치장엔 몇번 들었는데, 투옥된 적은 없다. 미행은 많이 당했다. 1970년대에 <고바우 전집>이 출간됐다. 그전에 인터뷰한 적이 있던 <아사히신문> 기자의 서울 사무실에 책을 가져다줬다. 그날 저녁 출판사 사장이던 친구가 내게 전화했다. 지인이 경찰에 근무하는데, 내가 <아사히신문> 기자 사무실을 찾아가 책을 전달한 것을 시간대별로 보고받았다더라. 종각 지나 어느 건물에 갔는지까지 소상히 보고서에 나왔다는 거다. 미행조가 보고한 것 같다. 간첩이나 조사할 것이지 국민 세금을 가지고 그따위 짓을 한 거다.”
‘고바우 영감’은 1955년 2월1일자부터 2000년 9월29일자까지 <동아일보>, <조선일보>, <문화일보>에 1만4139회에 걸쳐 연재됐다. 시사만화가로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을 다 겪었다. 1987년 6월 민주화 뒤 검열이 사라졌다. 검열과 정부의 압력에 대한 기억은 독재정부 시절 경험했다. <조선일보> 1966년 10월13일치 7면에 ‘검찰서 <동아일보> 만화 ‘고바우’를 반공법 저촉 추궁하며 내사’ 제목의 기사가 보인다. ‘고바우 영감’이 재벌을 비판한 것이 “계급투쟁을 강조한 것”이라는 검찰 쪽 발언이 기사에 나온다. 김 화백의 말투는 느릿하고 여유롭다. 두꺼운 뿔테 안경에 입꼬리가 올라가 웃는 인상의 얼굴이다. 그러나 작가로서 철저했다. 외모는 부드러운데 작가의 자존심은 단단했다.
-불면증을 부른 사건이 뭔가?
“1970년대 우리집 옆집에 비가 오는데 마당에서 괴청년들이 역기를 들더라. 밤에 집 밖에 나가면 전봇대 옆에 괴청년 둘이 서 있고. 대문을 열면 골목에 한 청년이 도장 파는 칼을 만지작거리고.”
-정보부엔 언제 가신 건가?
“1973년쯤 집으로 괴전화가 왔다. ‘여기 남산입니다, 올해 5월5일 어린이날에 상 받으시죠? 여기도 한번 다녀가셔야겠습니다. 여기 오셔서 사진도 찍고요. 배우들도 준비돼 있습니다’라고 하더라. 배우는 수사관들을 말하는 거였지. 당시 다른 신문 시사만화가도 같이 끌려갔다. 그는 맞았다. 내가 반말로 대드니 오히려 때리지 않더라. 나중에 미국·일본 기자들이 나한테 혹시 맞았냐고 묻더라. 당시 소문은 나도 맞았다고 퍼졌지.”
-그런 압력을 당했을 때 우표 수집 외에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이 있었나?
“별것 없었다. 만화가들끼리 만나 대포 한잔하고. 만화가들 중에도 미행이나 감시 같은 내 경험을 다 믿지 않았다.”
-1980년대에 전두환 전 대통령과 관련해 문어를 그리신 일화가 유명하다. 큰맘 먹고 그리셨겠다.
“(검열) 통과 안 될 줄 알고 그린 거다. 당시 검열관이 ‘우리 놀리는 거냐’고 했다. 내 그림에 ‘불가’라는 글씨가 찍혔다. 검열에 걸려 하루 네번까지 그린 적이 있다. 그래서 검열에 대비해 자주 예비용을 그렸다. 검열 때문에 만화 코너가 공란으로 나가면 또 그게 문제가 됐다.”
1980년 동아일보서 해임된 뒤
외신기자들이 이유 따져묻자
대령이 “실수했다” 인정했지만
국장대우 아닌 고문직 복귀에
작가 자존심으로 동아일보 떠나 장봉군
“선생의 전성기 때 인기는
저희가 상상할 수 없는 정도
한창때 ‘고바우’ 간판도 많아
지금으로 치면 아이돌 스타
후배들 많이 이끌어줘 감사”
“내 작품 제값 받아야 후배들에게 도움”
-1980년 전두환 정권 때 언론통폐합과 강제해직 사태가 벌어졌다. 당시 오래 몸담았던 <동아일보>를 떠난 계기가 됐는데.
“<동아일보> 해직 사태가 터지니까 외신기자들이 전두환 정부 담당자에게 몰려가서 ‘어떻게 기자 몇십명을 그만두게 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당시 정부 설명은 정경유착을 저지른 기자, 부정부패한 기자, 특정 정당을 지지한 기자, 정부를 무조건 비판하는 기자들을 언론사가 해직시킨 것이라고 설명했다. ‘기자의 본질이 비판 아니냐’고 외신기자들이 따져묻자 정부 담당자가 말이 막혔다. 하나 더 말문이 막힌 게 있다. ‘만화가(김 화백)는 왜 해임했냐’고 하니 또 말문이 탁 막혔다. 만화가인 내가 무슨 정경유착이 있겠나. 정치가·경제인 아무도 모르는데. 당장 그날 밤 언론문제 담당 실무자인 대령이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 정부에 불만 있는 만화가를 해임했다고 외국 신문에 나면 정부에 치명적이거든. 그 대령이 ‘실수했다. 없었던 일로 해달라고 당장에 (신문사에) 통보하겠다’고 했다. 없었던 일이라면 그전처럼 국장대우로 돌아가야 했다. 그런데 당시 국장이 내게 촉탁이나 고문 형식으로 복귀하라고 하더라. 말이 되지 않았다. 내가 자리를 알아봐준 경쟁 신문 시사만화가가 당시 그 언론사에서 이사 대우를 받았는데. 받아들일 수 없었다.”
김 화백이 <동아일보>를 떠난 것은 작가로서의 자존심 때문이다. 1980년 9월11일자부터 머리에 한올 머리카락이 있는 ‘고바우 영감’은 <조선일보> 지면을 통해 독자와 만났다. 1992년 <문화일보>로 옮겼다. 2000년 9월29일치를 마지막으로 연재를 마쳤다. 김 화백의 ‘고바우 영감’ 캐릭터처럼 언론사를 넘나든 시사만화 캐릭터로 <경향신문>에 처음 연재된 안의섭 화백의 ‘두꺼비’가 있다. <한국 시사만화 100년>은 김 화백에 대해 “절약 정신이 투철했다”고 기록한다. 가끔 “대포 한잔했다”지만 주량은 맥주 서너잔이다. 분당구 구미동 자택은 지하철 오리역에서 승용차로 10분 거리에 위치한 고급빌라다. 2층 빌라의 지하실에 작업실이 있다. 일본 만화 전집, 밀리터리 잡지, 예전 사진첩, 세계 각지에서 수집한 미니어처, 우표 등이 가득하다. 그는 아마추어 수집가다. 술은 잘 못 마신다고 했다. 신문사에서 만평을 그리던 시절 동료 기자들과 가깝게 어울리진 않았다. “월급 받으면 술 마셔버리고 그게 호방한 줄 알지”라고 말했다. <동아일보>, <조선일보>를 떠난 계기는 자기 작품의 제값을 받기 위한 노력이었다. 자기 작품이 제값을 받아야 시사만화가 후배들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시사만화 1세대로 많은 후배들을 여러 언론사에 추천해주셨다. 또 저작권 문제나 근무조건 등을 열심히 개척해주셔서 후배들이 그나마 지금 괜찮은 조건에서 그림 그리고 있다.
“내가 올라가야 남들도 더 대우받는다고 생각했다. 어느 언론이든 오래 그리면 내 만화의 가치성보다 ‘그리는 시간이 얼마 안 걸리니까 쉽게 되는 것 아닌가’ 착각하더라. 그리는 거야 한시간도 안 되지만 아이디어를 얼마나 쥐어짜는데. 그 노력을 누가 알겠나. 이해를 못한다. 내가 원고료 올려달라는 말을 몸담았던 신문사들에서 여러번 했다. 그만두겠다고 하면 중역회의가 열렸다. 그러나 결론은 안 나는 거다. 신문사에서는 정년 때가 되니 나를 촉탁이나 고문으로 (직위를) 바꾸겠다고 하더라. 요는 월급을 깎겠다는 거지. 그만두겠다고 했다. 편집국장이 밤 열두시에 나를 설득했다. 그런데 임원회의에서는 ‘그 사람(김 화백) 딴 데 갈 데 없는 사람’이라는 말이 나와서 코웃음쳤다. 내가 왜 갈 데가 없어. 몸담았던 신문사마다 그랬다. 내가 ‘대우 개선을 해달라’고 하니, 임원 중 한 명이 ‘4000만명 중에 시사만화가 없겠냐’고 했다.”
‘고바우 박물관’ 건립이 꿈
-‘고바우 만화상’ 등 후학을 기르는 일을 하고 계신다. 이달 8일까지 열리는 십장생도 전시회 등 화가로서도 활동중이시다. 앞으로 활동 계획은?
“우리나라 어딜 가나 문학관이 있다. 시비는 또 얼마나 많은지. 그런데 일본의 ‘아톰 박물관’처럼 만화 캐릭터를 기념한 제대로 된 박물관이 없다. 지자체 한곳에서 고바우 박물관 건립 논의를 했는데, 만화박물관과 중복 투자라는 반론 때문에 사업이 진척되지 않고 있다. 큐레이터가 상근하는 제대로 된 고바우 박물관이 지어지는 게 꿈이다.”
서울 도봉구에 ‘둘리뮤지엄’이 다음달 개관할 예정이다. 그러나 시대의 기록자라는 점에서 ‘고바우 영감’은 아기공룡 둘리 캐릭터와 느낌이 다르다. ‘고바우 영감’이 독자와 만난 역사가 한국 현대사다.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동아·조선·문화일보에 1만4139회
연재한 ‘고바우 영감’의 기록
최근엔 십장생도 전시회 열어
장봉군 화백이 대선배를 만났다 어머니 죽고 돈벌기 위해 만화 시작
전쟁통 골방서 만든 고바우 캐릭터
권력과 불화했던 시사만화가 운명
검열 대비 늘 예비용 그려놓던 시절
박정희 정부 때가 가장 어려웠어
‘고바우 영감’의 인기는 지금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높았다.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수천장의 ‘고바우 영감’ 원화는 현재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제공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구미동 자택 지하 1층에 김성환 화백의 작업실 겸 자료실이 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부인 프란체스카에게서 받은 부채부터 세계 각국의 미니어처, 일본 화집과 만화까지 각종 자료들이 가득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외신기자들이 이유 따져묻자
대령이 “실수했다” 인정했지만
국장대우 아닌 고문직 복귀에
작가 자존심으로 동아일보 떠나 장봉군
“선생의 전성기 때 인기는
저희가 상상할 수 없는 정도
한창때 ‘고바우’ 간판도 많아
지금으로 치면 아이돌 스타
후배들 많이 이끌어줘 감사”
김성환 화백이 지난달 27일부터 이달 8일까지 진행했던 ‘김성환 십장생도’ 전시회에 공개된 김 화백의 그림. 김 화백은 시사만화를 그리면서 꾸준히 회화 작업을 해왔다. 김성환 제공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