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의 집중력과 지독한 인내를 필요로 하는 누비질은 이 땅 여인들의 가족에 대한 사랑과 힘들고 고달픈 인생의 한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최초의 누비장 김해자씨가 경주 공방에서 한땀 한땀 바느질을 하고 있다.
바늘 하나면 족하다. 기술도 특별한 것이 없다. 하지만 아무나 못한다. 아니 누구도 못했다. 상상을 초월하는 인내력이 있어야 했다. 그야말로 한땀 한땀 정성과 인내를 쏟아부어야 했다.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하다. 누비옷은 재봉질로도 하기가 힘들다. 일정한 간격을 맞추어, 오랜 시간 천과 싸우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 누비질을 평생 바늘로만 했다. 산송장 같은 몰골로 버티며 바느질을 했다. “모기도 물지 않더군요. 한여름에 구부리고 앉아 바느질만 했는데, 온몸의 피가 마르고, 진이 다 빠지고….”
부친 별세로 가세 기울어 고교 포기
어머니 삯바느질 돕다 누비질 인연
기워입은 승복 찾아다니며 기술 터득
조선 무인 누비옷 5벌 반년만에 완성
1996년 최연소 첫 누비장 인정받아
온몸 망가진 직업병 정신력으로 극복
그는 6개월 만에 5벌의 누비옷을 만들었다. 조선시대 무인들이 입던 누비옷인 철릭과 승복 두루마기, 치마저고리와 여성 두루마기 등을 만들었다. 바늘땀의 간격은 3~5㎜. 옷을 만드는 동안은 한마디 말도 하지 않는 묵언 수행도 했다. 정성을 쏟기 위해서였다. 주변에서는 도저히 6개월 만에 다 만들었다는 사실을 믿기 어렵다고 했다. 그는 결국 40대에 최연소 중요무형문화재가 됐다. 최초의 누비장이다. “누비는 기능이기 이전에 정신의 산물입니다. 옛날 여인들에게, 누비에는 시집살이의 애환, 남편에 대한 애정, 자식들에 대한 두툼한 사랑이 깃들어 있어요.”
오목누비저고리를 비롯해 김해자 장인이 만든 각종 누비 한복들.
중요무형문화재 107호 누비장인 김해자(62·사진)씨는 재봉틀 기계(미싱)가 등장하며 완전히 맥이 끊긴 바느질 누비옷을 다시 재현했다. 바느질로 우리 옷을 만드는 침선 장인은 많았으나 누비를 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사실 경쟁자가 없었어요. 아무도 하지 않았으니까요. 너무 힘든 일이었어요. 처음엔 촘촘히 누빈 옷만 봐도 현기증이 났어요. 하지만 나중엔 3㎜ 바늘땀 간격마저 넓게 보이기 시작했어요. 정신력은 정말 불가사의했어요.”
오목누비저고리를 비롯해 김해자 장인이 만든 각종 누비 한복들.
부유한 집안의 5남매 중 둘째로 태어난 김씨는 중학교를 졸업한 이듬해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가세가 기우는 바람에 고교 진학도 포기하고 어머니의 삯바느질을 도와야만 했다. 그는 전통 누비옷 기법을 익히고자 전국을 돌며 고유복식을 찾아다녔다. 특히 사찰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기워 입는 승복에서 똑같은 작업을 반복적으로 공들여 하는 누비의 진수를 터득할 수 있었다.
오목누비저고리를 비롯해 김해자 장인이 만든 각종 누비 한복들.
누비옷은 따뜻하기도 하지만 ‘새털’처럼 가벼웠다. 비싼 서양의 밍크코트에 경쟁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누비질을 할 때는 온갖 잡념을 끊어야 했다. 오직 멋진 누비옷이 완성되는 그 순간만을 생각했다. 그러자 몸은 점차 망가지기 시작했다. 온종일 구부리고 앉아 있으니 30대에 허리가 고장났다. 배는 굳었고, 골반은 뒤틀렸다. 숨을 코로 못 쉬고 입으로만 쉬어야 할 정도로 온몸이 정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정신력만은 초인적이었다. “한때는 쌀 한 가마니를 번쩍 들 정도로 힘이 좋았는데, 오랜 바느질로 체중도 빠지고…. 남들은 살아 있는 것만도 기적이라고 했어요.”
오목누비저고리를 비롯해 김해자 장인이 만든 각종 누비 한복들.
그는 스승도 없이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 옷을 보며 누비옷을 재현했다. 전통 복식과 장신구 등을 전시한 단국대의 석주선 기념박물관에 있는 누비옷 ‘옆액주름포’를 그대로 만들어냈다. “누비옷에 대한 기록은 별로 없어요. 이전에는 누구나 만들었기에 장인도 없었고, 특별히 기록으로 남길 필요도 없었던 거죠. 많은 누비옷이 유물로 출토됐지만 누구도 재현해낼 엄두를 못 냈어요.”
누비는 어떤 장식이나 특수한 바느질 기법도 없이 가지런한 홈질 한 가지로 천과 천, 천과 솜을 이어 하나로 만든다. 옷 전체를 시종일관 균일한 땀과 간격을 유지하며 떠낸 누비는 한국에만 있다.
오목누비저고리를 비롯해 김해자 장인이 만든 각종 누비 한복들.
그는 사회적인 욕심을 내려놓았기에 누비옷에 대한 연구가 가능했다고 했다. “누비옷은 한번 장만하면 평생 입을 수 있어요. 다른 한복과는 다르죠. 그래서 한복을 만드는 이들이 오히려 멀리해요.”
김씨는 50대 들어 10년간 망가진 몸을 추스르는 데 힘썼다. 이제는 가부좌를 틀고 오랜 시간 앉아 바느질을 할 만큼 건강을 회복했다. 도저히 손으로 했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정교하고 정확하다.
“우리의 어머니들은 아이가 태어나면 무병장수를 기원하며 누비옷을 만들어 입혔어요. 남편이 전장에 나가면 무사귀환을 위해 두툼한 누비옷을 지었어요. 아낙네의 지극한 정성이 듬뿍 묻어 있는 옷이죠. 바느질하는 이의 기운이 눈에 보이지 않지만 옷에 스며들기 때문이죠.”
경주/글·사진 이길우 선임기자
nihao@hani.co.kr
누비장이란
헝겊 기워 만든 불가의 납의가 원조
고구려 고분벽화에 누비갑주 등장
누비장은 누비옷을 만드는 장인이다. 누비(縷緋)는 겉감과 안감 사이에 솜이나 털 등을 넣거나, 아무것도 넣지 않고 안팎을 줄지어 규칙적으로 홈질해 맞붙이는 바느질 방법이다. ‘누비’는 승복인 납의(衲衣)에서 나온 말로 ‘납’은 기웠다는 뜻. 불교가 인도에서 발생한 초기부터 불자들은 속세 사람들이 버린 낡은 헝겊을 모아 기워 만든 옷을 입었다.
잔누비는 솜을 얇게 넣어 좁게 누빈 것이고, 오목누비는 솜을 두껍게 넣어 오목오목한 효과를 낸 것이고, 납작누비는 넓게 누벼 납작한 효과를 낸 것이다. 누비는 옷감의 강도와 보온을 위해 세계 여러 나라에서 복식으로 사용해왔다.
우리나라에서는 고구려 고분벽화에 누비갑주가 등장해 이미 삼국시대부터 입었음을 알 수 있다. 누비는 기법이 단순하고 쉬울뿐더러, 세탁을 해도 바느질 모양이 틀어지지 않아 옷의 원형을 오래 유지할 수 있다. 누비의 형태는 옷감의 특성과 옷의 종류에 따라 그 간격이 0.3~20㎝까지 다양하다.
누비질의 시작은 옷감에 줄을 치는 일로, 천의 조직에 따라 줄을 그어 다림질로 꺾기도 하고 올을 튀겨서 하기도 한다. 바늘은 누비의 골에 따라 달라지는데, 0.3~0.8㎝ 누비는 가는 바늘을, 0.8~1㎝ 누비는 중간 바늘을 사용하고, 시침질할 때는 큰 바늘을 사용한다.
누비는 복식뿐 아니라 이불, 퇴침 등의 침구류와 패옥집, 각대집, 보자기, 천의, 방장 등의 다양한 생활용품에 쓰였다.
이길우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