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 낮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규명, 책임자처벌, 예술검열 반대, 예술행동 기자회견에서 참석자들이 가지고 있던 물건을 하늘로 던지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말도 안 돼”라며 믿지 않았다. “진짜”라고 재차 말하는 그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눈동자가 반짝였다. “어이없지 않아요?” 허무하고 허탈해서 그는 연거푸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 그의 드라마가 ‘어이없게’도 최근 편성됐다.
블랙리스트 작가. 사실상 그는 그랬다. ‘이명박근혜 정권’이 드라마 작가를 블랙리스트 명단에 올려놓지는 않았지만, 그는 방송사 간부들한테 정치색 짙은 작가로 분류되어 편성에서 늘 피해를 봤다. 이명박 정권 시절 그가 쓴 드라마 중 일부 내용이 천안함 사태를 연상케 한 게 이만큼 길게 이어질 줄 몰랐던 고통의 발단이었다. 간부가 지시한 수정을 거부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해당 드라마에서 잘렸다. 이후 방송사에서 외면받다시피 했다. 대본이 재미있다던 사람들도, 그래서 제작하겠다던 사람들도 결국 손을 놨다. “나한테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 억울함에 작가를 관둘 고민까지 했다는데, 그의 드라마가 편성이 됐다. 그것도 세월호를 연상케 하는 내용이 가득 담겨 있는 그 작품이. “게다가 (방송사에서) 뭐라는 줄 알아요? 그 (세월호) 부분이 너무 좋대!”
촛불 이후 1년, 참 많은 것이 변했다. 텔레비전에서 이를 가장 직접적으로 체감할 수 있다. 이명박근혜 정권은 세월호,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등 당시 정권의 잘못을 소재로 삼은 프로그램들은 줄줄이 중단하거나 폐지시켰다. 김미화, 김제동, 문성근 등을 이른바 ‘좌파 연예인’으로 분류해 텔레비전에서 사라지게 했다. 그랬던 그들이 촛불 이후 정권의 변화와 함께 빠르게 제자리를 찾고 있다. 세월호 추모 공연 등으로 미운털이 박혔던 이승환은 <엠넷>(m.net) 예능프로그램에 고정 출연하고, 김어준 <딴지일보> 총수는 <에스비에스>(SBS)에서 시사프로그램 <김어준의 블랙하우스>를 진행한다. <에스비에스>의 한 시사교양 피디는 “수년 전에 비슷한 기획안이 나왔을 때는 당연히 통과되지 않았다”고 했다. <에스비에스>는 2015년 10월 예능프로그램 <힐링캠프>에 초대 손님의 친구로 나온 주진우 <시사인> 기자를 통편집으로 들어냈던 곳이다. 그랬던 <에스비에스>가 김어준을 내세워 시사프로그램을 만들다니. “세상 참 변했다”는 말이 유행어처럼 번진다.
유행어처럼 “세상 참 변했다”
그러나 빼앗긴 들에 봄이 오니 마냥 기뻐할 줄 알았는데, 그들은 어째 허탈감이 더 큰 듯했다. ‘이렇게 금방 원상복구 될 것을 우리는 왜 10년이란 세월을 고통 속에 살아야 했던 걸까.’ 한숨을 쉬고 또 쉬었다. 2008년 5월 이명박 정부 당시 ‘광우병에 감염된 고기를 먹느니 청산가리를 먹는 것이 낫겠다’는 글을 개인 누리집에 올린 것 때문에 블랙리스트 명단에 오른 것으로 알려진 배우 김규리는 한 방송에서 “(이명박 정권 당시 국정원에서 만든 블랙리스트) 문건을 봤는데 몇 자 안 되더라. 나는 이걸로 10년 동안 그렇게 고생했는데 허탈하더라”고 울며 얘기했다. 박근혜 정권 당시 지상파에서 정치풍자 개그를 하다가 종합편성채널에서 잘리고 행사도 끊겼던 한 코미디언은 최근 함께한 자리에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행사 섭외가 밀려온다”며 “웃어야 하는데 눈물만 난다”고 연거푸 소주잔을 비웠다.
그래도 연예인들은, 드라마 작가는 블랙리스트가 생활고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모바일이나 외국 활동 등을 찾으면 다른 길은 있었다. 하지만 연극판으로 눈을 돌리면 소주를 병째로 들이부어도 응어리가 가시지 않을 정도로 참담했다. 박근혜 정부는 연극 <개구리>가 박정희·박근혜 전 대통령을 풍자했다는 이유로 대본 검열을 하는 등 2013년 이후 ‘심기 불편’한 연극을 죄다 막았다. 장애인 연극단체인 극단 다빈나오 대표가 사회관계망서비스에 세월호 관련 얘기를 올렸다고 정부 지원 대상에서 제외하기도 했다. 지원을 받아도 늘 모자랐던 그들은, 지원을 받을 수 없어 작품을 아예 올리지 못했다. 주요 연출가들이 작품을 올리지 못하면서 배우들은 극단적 궁핍으로 몰리는 일이 늘어났다. 한 연극배우는 “무대에 서지 못하니 풀타임 아르바이트만으로 먹고산 이들이 많았다”고 전했다. 전업 예술인 10명 중 7명은 한달에 100만원도 벌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마저도 받지 못한데다 무대까지 빼앗긴 이들도 역시 잔인한 블랙리스트의 숨은 피해자였다.
그런 그들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생각은, 촛불 이후 어쩌면 나도 우리도 블랙리스트의 공범자는 아니었을까라는 죄책감에 시달리게 했다. 김미화, 윤도현, 김제동 등이 석연찮은 이유로 프로그램에서 하차하고, <웃음을 찾는 사람들>(SBS), <개그콘서트>(KBS2) 등 정부를 비판하는 정치풍자 개그프로그램 속 꼭지들이 누리집 다시보기에서 삭제되거나 종영되면서 외압 논란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의혹을 제기하는 기사를 쏟아냈지만, 할 수 있는 건 거기까지였다. 그것이 그들을, 문화예술계를 제자리로 돌려놓지는 못했다. ‘2011년 5월 특정 연예인 이미지 실추 유도 심리전’(이명박 정권 당시 만든 블랙리스트 문건)의 피해자 중 배우 명계남에게 쏟아진 악의적 소문에 사실 여부를 가려내지 못하고 그냥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던가.
그걸 해낸 건 촛불이었다. 촛불은 문화예술인들이 부당한 것에 제 목소리를 내게 했으며, 결과적으로 그들을 더 끈끈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동안 배우, 가수 등 연예인들은 대부분 정치적인 문제에 민감했다. 모든 문제를 좌우로 나누는 탓에 괜히 피해를 볼까 봐 불합리한 일을 뻔히 지켜보면서 함구했다. 투표하자는 얘기도, 세월호 관련한 발언도 “민감하다”며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이미 피해를 본 동료를 목격한 상태에서 그들한테 강요하는 것도 무리였다. 그런 그들이 촛불의 온기에 힘을 얻어 소신껏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정우성이 영화 <아수라> 홍보활동 중 영화 속 대사를 활용해 “박근혜 앞으로 나와!”라고 외치자 바뀐 세상에 적응 중인 관객들 일부는 솥뚜껑 보고 놀란 가슴처럼 화들짝했다. 하지원은 “한제인(<목숨 건 연애> 속 주인공)도 ‘길라임’ 이상으로 매력이지만, 한제인을 (가명으로) 쓰지는 말아달라”며 박근혜 전 대통령이 병원 진료 때 자신이 맡은 드라마 속 주인공 이름을 사용한 것을 두고 공식석상에서 재치있게 답하기도 했다. 서로가 서로를 지켜줘야 한다는 의식도 촛불로 끈끈해졌다. 정영두 안무가는 블랙리스트 명단에 오르지 않았는데도 국립국악원이 박근형 연출가의 작품 <소월산천> 공연을 돌연 취소한 데 항의하며 국악원 무대에 올리기로 한 자신의 공연을 스스로 취소하고 2015년 1인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창작을 막으려 했던, 막장 드라마보다 유치한 이명박근혜 정부의 행태는 되레 정치풍자극의 불씨도 키웠다. ‘최순실-박근혜 게이트’에 블랙리스트까지 맞물려 소재가 무궁무진해지면서 촛불 이후 대중문화 전반에 정치풍자극이 다시 살아났다. 블랙리스트에서 자극받아 만든 연극 <위대한 놀이>(9월28일~10월1일) 등이 대표적이다. 관람했던 연극 작품 수보다 더 많이 블랙리스트 연극인의 리스트를 접하면서 연극이 친근해졌다는 웃지 못할 소감을 말하는 이도 있다. 이렇듯 엉뚱한 경로를 거쳐 연극에 대한 일반 시민들의 관심도 높아졌고, ‘소셜펀딩’ 등 후원금 모금도 이전보다 활발해졌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 직후 전국 공연장 26곳, 작품 59개를 지원 대상으로 선정하는 등 촛불 이후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로 지원 중단됐던 사업들도 복원되고 있다. 다빈나오도 650일이 지난 올해 3월 다시 지원 대상에 올라 새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 김미화는 “어마무시한 시절을 잘 견디고 넘어왔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지만, 아직 갈 길은 멀다. 1년 만에 사라지기에 10년의 상처는 너무 깊다. 정권이 바뀌었지만 모두가 트라우마에서 벗어난 건 아니다. 여전히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블랙리스트 피해 사례를 말하는 걸 두려워하는 대중문화인이 많고, <문화방송>(MBC)과 <한국방송>(KBS)의 파업은 끝나지 않았다. 최장기 해직기자 이용마는 “문화방송 노조 역사상 처음으로 승리가 눈앞에 보인다”고 전망하면서도 “(앞으로) 우리가 가야 할 게 꽃길이면 좋을 텐데, 그렇지 않을 거다. 황무지로 만들어놨기 때문”이라고 안타까워했다. 블랙리스트 명단에 오른 한 배우는 “정권은 바뀌었지만, 이명박근혜 정권에 부역하며 하수인으로 일했던 그들이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기 때문에 아직은 조심스럽다”고 말했다. 앞서 언급한 드라마 작가, 코미디언이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것도 같은 이유다. 김미화는 “살아남으려고 속속들이 숨어 있는 적폐들이 해소돼야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말했다. 뿌리를 뽑고 썩은 내가 나는 샘을 완전히 메우지 않는 이상, 촛불은 언제 꺼질지 모를 일이다.
”괜찮다”지만 괜찮지 않다
지난달 31일 서울 충무로에서 열린 ‘아름다운 예술인상’ 시상식에서 만난 배우 명계남은 “그간 마음고생이 심하셨다”는 얘기에 이렇게 말했다. “어찌할 방법도 없고 받아들이고 살아야지. 나보다 더 고생한 사람들이 많은데, 나야 뭐 괜찮아요.” 하얗게 세고 듬성듬성 빠진 머리, 주름진 얼굴이 아파서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괜찮다”지만, 괜찮지 않다. 영화인들은 그가 블랙리스트 피해로 활동하지 못했고, 간간이 연극 무대에 섰지만 오랫동안 은둔생활을 했으며, 치과에 갈 돈이 없어 지인들이 모아서 줬다고 했다. 그런 그를 촛불이 다시 살게 했다. 그러나 인생의 한구석을 망쳐놓은 보상은 누가 할 것인가. 폐허를 복원하는 첫삽이 이제 막 떠졌을 뿐이다.
남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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