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지은의 조카 덕후감]
12. 녀석의 승부욕
2등 했다고 울지 마…나한테 넌 늘 1등이야
‘조카님’이 몇주째 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 ‘○○책의 지은이는 누구일까요?’ 엄마인 올케가 질문하면 답하기를 반복한다. 모르는 문제는 머리를 긁적이며 이내 책을 들어 다시 파고든다. “에잇, 엄마 다시 읽을래.” 장원급제라도 할 기세다. 유치원에서 열리는 ‘독서골든벨’ 대회를 앞두고 공부 중이다. 공부하느라 주말에 고모가 가도 거들떠도 안 보니 서운하지만, 그래도 이참에 책도 많이 읽고 좋은 경험이 되겠구나…, 라고 생각했던 게 오산이다.
대회가 끝난 날 울며불며 한바탕 난리가 났다. “엄마가 밉다”며 방에 들어가 나오지도 않는단다. 고모가 전화했는데도 안 받는다는 건 큰일이 났다는 거다. 올케가 들려준 이유는 이렇다. “아 글쎄, 출판사를 맞히는 문제가 나왔는데 틀려서 2등 했다고 울어요. 엄마는 왜 출판사는 안 알려줬냐며, 엄마 때문에 2등 했다고 지금 삐쳐 있어요.”
응? 2등 했다고 운다고?
이게 한두번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유치원에서 나간 어린이합창대회에서도 대현은 2등을 했다. 친구들과 있을 때는 메달을 목에 걸고 꽃다발을 들고 좋아했는데 집에 가서는 또 토라졌다. 조금만 잘했으면 1등인데, 라는 생각이 아이의 마음에 남아 있었나 보다.
처음엔 그럴 만도 하다고 생각했다. 합창대회 나간다고 고모와 할머니 앞에서 얼마나 연습을 했나. 모두 세 곡을 부르는데, ‘소낙비 친구’부터 ‘뱃놀이’ ‘아리랑’까지 순서대로 손동작까지 열심히 맞춰가며 안 틀리려고 노력했다. 덕분에 고음도 더 매끄러워지고 동작도 자연스러워졌다. 그렇게 열심히 밤낮없이 불러댔는데 2등을 하니 아쉬울 법도 하지. 순둥순둥해서 순둥이인 줄만 알았는데, ‘짜식, 은근 승부욕 있구나’ 머리 한번 툭 쳐주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런데 어쩌면 승부에 대한 집착은 이 고모가 키워준 게 아닐까, 라는 생각에 뒤통수가 찌릿했다. 한번씩 볼 때마다 “대현아 잘해” “대현아 꼭 1등 해” “1등 하면 고모가 선물 사줄게”라며 나도 모르게 1등을 반복해서 강조했다. 매일 만나는 부모가 아니라, 가끔 보는 주변인들의 말이 때론 아이한테 더 크게 작용할 수도 있다고 한다. 오수향 양육커뮤니케이션 전문가는 <말의 힘으로 키우는 대화 육아>라는 책에서 “말은 듣는 사람의 몸과 마음에 모두 영향을 끼친다”며 말의 힘을 강조하지 않았던가.
조카의 일등은 고모·이모·삼촌들한테는 자랑거리이기도 하다. 내 아이 공부 잘해서 뿌듯해하는 부모에 비할 수는 없겠지만, 어느 정도는 비슷하다. 애견인이 재주 부리는 강아지 영상을 귀엽다며 보여주듯, 고모·이모·삼촌들은 조카의 뿌듯한 영상을 보여준다. 강아지 덕후와 조카 덕후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각자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며 대화꽃을 피운다.
내 욕심이, 생각 없는 말이 조카를 때묻게 했나 싶었다. 유치원에 입학한 조카가 처음 ‘사회’를 경험하면서 세상의 때가 탈까 봐 걱정했다. 정작 조카한테 등수의 때를 묻힌 건 어쩌면 나였는지도 모른다. 대현아, 이젠 “1등 해”가 아니라 “최선을 다해”라고 고쳐 말할 테니 2등 했다고 울지 마. 경쟁에서 중요한 건 과정이지 결과는 아니란다. 그래도 넌 나한테는 1등이지만!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
12. 녀석의 승부욕
2등 했다고 토라져서 얼굴 안 보여주는 대현.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