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방송계 종사자의 고백
신입시절 나는 선택받아야 할 ‘을’
“나랑 자야 집에 갈 수 있다”며
내 어깨 잡고 돌려세우려는 ‘갑’
소리 지르며 무작정 내달려 도망
갑들과 싸우기엔 불리한 방송계
항의해봤자 미친년 독한년 취급
참고 넘기며 쿨한 척 괜찮은 척
자포자기 심정 남의 아픔도 침묵
남자들 뒷담화에 맞장구 죄책감
익명이라도 조금씩 목소리 낼 터
“성폭력 가해자들, 벌벌 떨기라도 했으면”
신입시절 나는 선택받아야 할 ‘을’
“나랑 자야 집에 갈 수 있다”며
내 어깨 잡고 돌려세우려는 ‘갑’
소리 지르며 무작정 내달려 도망
갑들과 싸우기엔 불리한 방송계
항의해봤자 미친년 독한년 취급
참고 넘기며 쿨한 척 괜찮은 척
자포자기 심정 남의 아픔도 침묵
남자들 뒷담화에 맞장구 죄책감
익명이라도 조금씩 목소리 낼 터
“성폭력 가해자들, 벌벌 떨기라도 했으면”
한국여성단체연합,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 등 여성단체 회원들이 지난 1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법무부와 검찰이 조직 내 성폭력 사건의 진상을 철저히 규명하고 대책을 마련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 나는 피해자입니다
“신입 시절이었다. 악, 소리를 지르며 뛰쳐나와 택시를 잡아탔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난 선택받아야 하는 을이었고, 그는 나를 선택해줘야 하는 갑의 위치였다. 계약을 위해 만난 자리에서 그는 반주한다며 술을 시켰다. 권하는 몇 잔을 마셨을 뿐, 난 전혀 취하지 않았다. 그는 연거푸 자작을 하더니 “그 가슴 다 니 거냐”는 등 언어 추행을 일삼았고 마침내 본색을 드러냈다. “나는 술이 취하면 섹스를 해야 해. 섹스를 하지 않으면 집에 들어가질 않아. 나랑 섹스해야 내가 집에 들어가.” “무슨 소리 하시는 거냐”며 일어섰지만 이내 따라와 내 어깨를 잡고는 강압적으로 돌려세우려고 했다. 소리를 지르며 무작정 내달렸다. 애써 잊고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문화방송> 피디 성추행 사건을 접하면서 온몸이 떨렸던 그때의 공포가 다시 밀려왔다. 어쩜 이 바닥은 하나도 달라진 게 없는 걸까.”
“신입 시절이었다. 악, 소리를 지르며 뛰쳐나와 택시를 잡아탔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난 선택받아야 하는 을이었고, 그는 나를 선택해줘야 하는 갑의 위치였다. 계약을 위해 만난 자리에서 그는 반주한다며 술을 시켰다. 권하는 몇 잔을 마셨을 뿐, 난 전혀 취하지 않았다. 그는 연거푸 자작을 하더니 “그 가슴 다 니 거냐”는 등 언어 추행을 일삼았고 마침내 본색을 드러냈다. “나는 술이 취하면 섹스를 해야 해. 섹스를 하지 않으면 집에 들어가질 않아. 나랑 섹스해야 내가 집에 들어가.” “무슨 소리 하시는 거냐”며 일어섰지만 이내 따라와 내 어깨를 잡고는 강압적으로 돌려세우려고 했다. 소리를 지르며 무작정 내달렸다. 애써 잊고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문화방송> 피디 성추행 사건을 접하면서 온몸이 떨렸던 그때의 공포가 다시 밀려왔다. 어쩜 이 바닥은 하나도 달라진 게 없는 걸까.”
■ 나는 방관자였습니다
“그렇게 괴로우면서 왜 문제제기 하지 않았느냐고? 이런 일들이 처음이었고,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대부분 성추행은 업계에 발 디딘 지 얼마 안 된 이들을 상대로 벌어진다. 지금처럼 연륜과 나이가 쌓였다면 몰래 녹취 버튼을 누르거나 고소하겠다며 협박이라도 했겠지만, 그때는 너무 갑작스럽게 닥친 일들에 그저 집에 와서 우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을’ 중에서도 ‘을’인 당시의 내가 갑들과 싸우기에는 이 바닥의 구조는 여러 가지로 여자한테 불리했다. 작가나 스크립터, 외주제작사 프로듀서 등으로 일하는 여자들이 방송 콘텐츠 제작 과정의 권력관계 속에서 권력의 가장 밑바닥에 놓여 있는 경우가 많다. 하청에 하청을 거듭하는 비정규직 백화점이라 ‘갑’이 한 곳만 있는 것도 아니다. 방송사에서 을인 외주제작사는 또 다른 하청업체에는 갑이 된다.”
“그렇게 괴로우면서 왜 문제제기 하지 않았느냐고? 이런 일들이 처음이었고,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대부분 성추행은 업계에 발 디딘 지 얼마 안 된 이들을 상대로 벌어진다. 지금처럼 연륜과 나이가 쌓였다면 몰래 녹취 버튼을 누르거나 고소하겠다며 협박이라도 했겠지만, 그때는 너무 갑작스럽게 닥친 일들에 그저 집에 와서 우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을’ 중에서도 ‘을’인 당시의 내가 갑들과 싸우기에는 이 바닥의 구조는 여러 가지로 여자한테 불리했다. 작가나 스크립터, 외주제작사 프로듀서 등으로 일하는 여자들이 방송 콘텐츠 제작 과정의 권력관계 속에서 권력의 가장 밑바닥에 놓여 있는 경우가 많다. 하청에 하청을 거듭하는 비정규직 백화점이라 ‘갑’이 한 곳만 있는 것도 아니다. 방송사에서 을인 외주제작사는 또 다른 하청업체에는 갑이 된다.”
“무엇보다 항의를 해봤자 그 피해는 고스란히 내가 떠안게 된다는 사실이 나를 침묵하게 만들었다. 항의를 해도 그들이 늘어놓는 변명은 뻔했다. “농담인데 별것도 아닌 걸 갖고 그래” “술 먹어서 기억이 안 나네.” 방송계는 어느 조직보다 말이 많고 빠른 동네이기에 갑인 가해자들은 오히려 피해자를 문제를 일으키는 ‘미친년’으로 몰아간다. 나를 꽃뱀으로 몰고 행실을 문제 삼았다. 쟤를 고용하면 시끄러워진다며 피하고 권력을 이용해 찍어 누르며 일을 못하게 하는 경우가 많다. 성추행 그 자체보다 참기 힘들었던 건 2차 피해다. 조직원이 아닌 나를 보호해주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나도 용기를 낸 적이 있다. 10년차를 넘어섰을 무렵,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생각에 고소하려고 변호사까지 알아봤다. 하지만 그래 봤자 너만 손해라는 얘기들만 오갔고, 나를 응원하던 이들도 어느 순간 ‘이제 그만하라’며 ‘독한 여자’로 몰고 갔다. 실제로 한 여자 스태프는 남자 스태프한테 성추행을 당한 뒤 제작사에 문제제기를 했다가 둘 다 잘렸다. 남자 스태프는 곧 다른 작품에 투입됐지만 여자 스태프의 행방은 묘연하다. 먹고 살아야 해서 참고 있다고? 밥벌이보다 중요한 건, 내가 너무 사랑하는 소중한 이 일을 더는 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그냥 참고 넘기자는 생각이 반복되면 어느순간 자포자기의 심정이 된다. 남자가 90% 이상 되는 곳에 내가 내 발로 들어갔으니 이 정도는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여자라서 그래’라는 소리 듣지 않으려고 쿨한 척, 괜찮은 척 해온 것도 성폭력을 배불린 게 아닐까, 생각하면 자괴감만 들 뿐이다.”
■ 나는 가해자입니다
“그래서 나는 방관자이고 그러했기에 가해자가 됐다. 문제제기를 해도 결국 피해를 보고 달라지는 건 없다는 걸 알았기에 나는 남의 아픔에도 침묵했다. 한 여자 스태프가 성추행을 당했고, 남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피해자를 욕할 때, 그 틈에 껴서 영혼 없이 맞장구를 치기도 했다. 내가 사랑하는 일을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뭔가를 결정할 수 있는 위치였거나 목소리를 내도 지켜줄 보호막이 있었다면 가만있지 않았을 텐데’라고 자위해도 내 안위를 먼저 걱정했다는 죄책감을 씻을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방관자이고 그러했기에 가해자가 됐다. 문제제기를 해도 결국 피해를 보고 달라지는 건 없다는 걸 알았기에 나는 남의 아픔에도 침묵했다. 한 여자 스태프가 성추행을 당했고, 남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피해자를 욕할 때, 그 틈에 껴서 영혼 없이 맞장구를 치기도 했다. 내가 사랑하는 일을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뭔가를 결정할 수 있는 위치였거나 목소리를 내도 지켜줄 보호막이 있었다면 가만있지 않았을 텐데’라고 자위해도 내 안위를 먼저 걱정했다는 죄책감을 씻을 수 없다.”
“과연 우리나라에도 외국처럼 ‘미투’ 운동이 거세게 불 수 있을까? 나는 좀 회의적이다. 할리우드와 달리 입을 여는 유명 배우들이 없고, 아직은 간부 다수가 남성이라 성추행에 대한 문제의식이 부족한 경우가 많다. 각 분야의 협회 간부들도 대부분이 남성들이며 그중엔 본인이 성폭력에 휘말린 이들도 있다. 어쩔 수 없는 구조를 당장 변화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자책하기에 앞서 익명이라도 조금씩 목소리를 내려고 한다. 힘없는 보조 작가, 막내 스태프들을 위해 나라도 싸워줘야 한다는 책임감이 들고 있다. 한두마디씩 보태진다면, ‘적어도 잠재적 가해자’들의 입과 손을 묶을 수는 있을 것이다.”
이슈한국판 #미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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