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일 박도 선생(왼쪽)이 눈빛출판사에서 그동안 눈빛에서 펴낸 책을 쌓아두고 이규상 눈빛 대표와 자리를 함께했다.
<미군정 3년사>에 실린 ‘도시민중대회에 참석한 김 장군’. 1945년과 1946년 사이에 촬영됐다. NARA
2004년 1월 어느 날 초로의 한국인 남성 두 명이 미국 메릴랜드주 칼리지파크에 있는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 이하 ‘나라’) 사진자료실에 들어섰다. 한 명은 백범 김구 암살범 안두희의 배후를 지난 수십년 동안 추적하고 있던 권중희(1936~2007) 선생이며, 다른 한 명은 교단생활을 하다가 퇴직을 하고 한국의 근현대사에 관심을 쏟기 시작한 박도(73) 선생이었다.
그전부터 여러 책을 내온 박 선생은 2002년에 <오마이뉴스> 시민기자가 되었고 의미 있는 글을 쓰고 싶어 ‘의를 좇는 사람들’이란 글 연재를 시작했다. 첫 회가 박종철 열사의 부친인 박정기씨였다. 첫 회가 나가고 난 뒤 어느 날 밤늦게 스웨덴에서 산다는 동포 한 분이 전화를 했다. “정의봉을 휘두르며 김구 선생 암살범 안두희를 쫓던 권중희 선생의 근황을 취재해서 기사화해달라”는 요청이었다.
수소문 끝에 권 선생을 만나 인터뷰해 권 선생이 안두희의 존재를 파악하여 10년 동안 쫓아다닌 이야기를 기사로 썼다. 인터뷰 끝에 권 선생이 “로또에 당첨되고 싶다. 그 돈으로 미국에 가서 한국 관련 비밀문서를 열람하면 백범 암살 배후를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있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가 나가자 독자들이 먼저 모금운동을 제안했고 어떤 노동자는 하루 일당을 보내오고 국외 동포들도 한 푼, 두 푼 성금을 보내와 목표액인 3천만원이 12일 만에 넘어섰다. 박 선생은 “온전히 김구 선생의 힘이다. 백범은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살아있었던 것이다”라고 회상했다.
이때를 시작으로 박 선생은 2006년, 2007년, 그리고 지난해까지 모두 네 차례 ‘나라’를 방문해 한국 근현대사의 희귀한 사진자료들을 발굴해왔고 그 자료를 엮어서 여러 권의 책을 냈다. 특히 눈빛아카이브 한국근현대사 연작으로 <개화기와 대한제국(1876~1910)>, <일제강점기(1910~1945)>, <미군정 3년사(1945~1948)>까지 나왔다. 이달 초에 눈빛출판사에서 박 선생을 만나 그의 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 후 몇 차례 추가로 전화 인터뷰를 했다.
메릴랜드에 있는 ‘나라’는 미국 국적이 아니라도 여권만 있으면 무료로 출입할 수 있다. 6층에 있는 비밀문서 보관실을 제외하면 자료실에 모두 접근할 수 있으며 열람과 사진 촬영까지는 역시 다른 비용 없이 가능하다.
“잠자고 있는 사진 수십만장 추정”
―‘나라’에서 자료를 찾는 것은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가?
“검색과 절차가 복잡하지만 열람실까지는 누구든 갈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무슨 자료가 얼마나 있는지를 알 수 없다는 데 있다. 목록도 잘 모르고 제목도 잘 모른다. 끝이 어딘지를 알 수 없다. 내가 4번 다녀왔으니 어지간히 본 것 같긴 하지만, 서고 안에는 못 가고 신청한 것만 본다. 사진 자료실에 수십만장의 한국전쟁 사진이 있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데 다 복사할 순 없다. 스캐너를 들고 들어가면 비용 없이 스캔하게 해주더라. 앨범을 먼저 보면서 필요한 사진을 표시하면 그 사진의 원본이 있는 상자를 찾아서 다시 열람 신청을 해야 한다. 그런데 원본 상자는 바로 주는 게 아니라 하루 두세 차례 정한 시간에만 준다. 그걸 받아서 흰 장갑 끼고 사진 뒷면의 원문 설명을 보고 팩트가 분명한 것만 골라 스캔했다.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이다. 내가 영어를 거의 못하니 대한민국 임시정부 2대 대통령이었던 박은식 선생의 손자 박유종씨가 미국에 살고 있었는데 그분이 자료 신청과 원문 번역을 해주셨다. 큰 도움을 받았다.”
―2004년 첫 방문 때 이야기를 들려달라.
“첫 방문은 백범 암살의 진상을 밝히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현지 교민과 유학생들의 도움을 받아 팀을 꾸려 열심히 자료를 찾았으나 미루어 짐작할 기록만 있을 뿐 ‘바로 이거다’라고 할 만한 똑 부러지는 자료는 없었다. 9·11 테러 이후 미국은 국익에 반대되는 모든 문서의 97~98% 이상을 파기했다는 것이다. 일행은 백범 선생 암살과 관련된 어떤 실마리를 찾고, 그다음 내용을 찾아 들어가면 ‘destroyed’(파기)와 마주치는 경험을 수도 없이 했다. 자칫 빈손으로 돌아가야 할 처지에 놓인 어느 순간 눈이 번쩍 떠지는 경험을 했다. ‘1950 Korean War’라는 파일을 발견했는데 그 당시까지 한국 내에선 본 적도 없는 사진들과 만난 것이다. 가장 크게 놀란 것은, 해방이 되고 9월9일에 미군이 서울 중앙청(일제 조선총독부)에 와서 일본군의 항복을 받고 일장기를 내리고 성조기를 올리는 사진이었다. 사진이 말해주는 것이 컸다. 우리나라가 해방이 된 것이 아니라 오너가 바뀐 것이 아닌가. 충격을 받았다. 또 넘겨보는데 피난민 사진들이 있었다. 딱 우리 식구가 피난 가던 기억이 났다. 내가 6·25 때 여섯살이었다. 이후 쭉 반공교육만 받았잖나. ‘무찌르자 오랑캐’ 그러면서 공산군이 침략한 사진만 봤는데 거기 ‘나라’엔 민중들이 고통받는 사진이 줄지어 나오는 거다. 이걸 한국의 독자들에게 꼭 알려야겠다고 결심했다. 박유종씨와 함께 그날부터 본격적으로 사진을 찾기 시작했다.”
1950. 7. 29. 경북 영덕, 피란민 한 가족이 포화에 쫓겨 뜀박질을 하고 있다. NARA
1950. 8. 18. 미8군 하사관이 가장 나이 어린 북한 소년병 포로를 심문하고 있다(포로 이름은 김해심, 통역비서의 이름은 이수경이다). NARA
“만주 답사 뒤 날마다 도서관 출퇴근”
―미국 ‘나라’에서 발굴한 사진으로 책을 몇 권이나 냈나?
“<지울 수 없는 이미지> 연작 세 권을 포함해 <백범 김구, 암살자와 추적자>, <영웅 안중근>, <허형식 장군>,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 등이 있다. 가장 최근 책인 <미군정 3년사>엔 북한 관련 사진이 대거 들어 있다. 북한에서 제작한 해방 1주년 기념 북조선민주주의 건설 사진집(302~354쪽)을 전재하여 해방 후 북녘의 실상도 가늠해 볼 수 있다. 당시까진 북에서도 태극기를 사용하고 있었다. 1946년 ‘도시 민중대회의 김 장군’이란 사진에선 김일성 뒤로 태극기가 나란히 걸려 있다.”
박도 선생은 경북 구미에서 태어나 고려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학훈단 7기로 임관하여 전방에서 보병 소대장으로 복무했다. 여주제일중학교, 오산중학교, 이대부속고등학교 등에서 33년간 교단 생활을 했다. 교사 재직 때부터 소설과 산문집을 꾸준히 펴냈으며 2004년에 교직을 떠난 이후에는 강원도 원주에서 글쓰기에 전념하고 있다. 박 선생의 이력에서는 역사 혹은 사진과 관련한 것이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역사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어떤 계기가 있는가?
“1999년 8월에 만주를 방문했는데 항일유적 답사로 동북 3성을 찾았다. 당시에 동행했던 분들이 석주 이상용 선생의 증손자 이항증 선생과 일송 김동삼 선생의 손자 김중생 선생이었다. 하얼빈에 갔다가 동북열사기념관에 들렀다. 경북 구미 출신의 파르티잔 허형식 장군의 이름을 보게 되었다. 장군은 항일의병장 왕산 허위의 종질이다. 그래서 책을 쓰기로 결심했다. 처음엔 허형식 장군과 만주군 장교 출신 박정희 전 대통령을 대비해 작품을 쓸까 했었다. 둘은 모두 구미 출신으로, 박 전 대통령이 태어난 구미 상모동과 허 장군이 태어난 임은동은 철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지척이다. 만주를 다녀와서 도서관에 출퇴근하다시피 하며 역사 관련 자료는 거의 다 샅샅이 훑었다.”
1950. 8. 24. 경북 낙동강 부근의 피란민 행렬. 박도 선생은 “벌거벗은 아이의 모습이 내 모습이 아니었을까 하는 착각이 들었다”고 했다. NARA
“내가 할 수 있는 일 비로소 찾아”
―참으로 많은 일을 하셨다.
“난 역사를 전공하지도 않았다. 영어도 거의 못한다. 미국 ‘나라’에서 백범 관련 자료를 제대로 찾지 못하고 한국전쟁 사진을 발견했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누구나 사진은 볼 수 있지 않나. 내가 중국을 비롯하여 미국, 일본, 러시아, 그리고 우리나라 곳곳의 근현대사 현장을 기웃거렸고 그 이야기와 내가 찍은 사진, 찾은 사진으로 역사를 조금 더 알기 쉽고 현장감 있게 젊은 세대들에게 전해주는 일 정도를 할 뿐이다. 마치 어미 닭이 모이를 찾아 잘게 쪼아 병아리들에게 먹여주는 그런 역할을 나는 하고 싶었다. 누군가는 그러더라. 문익점 선생이 목화씨를 들여와 우리 백성들이 그걸 이용해 옷도 해 입고 여러 가지로 활용하여 오늘에 이르게 된 것처럼 내가 들여온 사진 자료들을 밑거름 삼아 후세 사가들이 잘 활용해 한국 근현대사의 공백을 메워주면 그것으로 대만족이다. ‘기록하는 자가 앞서 간다’고 한다. ‘기록문화 없이는 역사 발전도 민주 발전도 없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근현대 이후 기록문화에 매우 소홀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현대사 자료를 찾기 위해 남의 나라에 보관된 기록을 봐야 한다. 말 그대로 기록문화 후진국이다. 이렇게 기록문화가 소홀한 현실에서 사진을 전문으로 출판하는 ‘눈빛’에서 이 사진자료들을 역사적인 사진집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 무엇보다 다행이다.”
정운현(전 한국언론재단 이사, 친일문제 연구가)씨는 박도 선생의 활동에 대해 “현재 인터넷에 떠도는 한국전쟁 관련 희귀사진의 절반 정도는 박도 선생이 발굴, 입수해낸 것이라고 봐도 될 것”이라며 “가까이서 박 선생을 지켜본 사람 중 한 명으로, 이런 표현을 써도 좋을지 모르겠으나 전문연구자도 아닌 분이 학계나 정부 관련 기관이 방치하다시피 해온 우리 근현대사의 자료들을 개인의 열정과 노력으로 수차례에 걸쳐 발굴·입수해온 공로는 많은 연구자를 부끄럽게 한다. 그 사진 자료 중에는 완전히 처음 발굴한 것도 많다. 무엇보다도 그동안 사진의 출처와 연도가 정확하지 않았던 것이 많았으나 박 선생이 찾아낸 자료는 명백한 사진 설명과 연도가 있다는 점에서 소중하다. 이게 있어야 사료 가치가 커지는 것이다. 개인이 하기엔 방대한 작업이었다. 박 선생에게 큰 감사를 드린다”고 말했다.
글·사진 곽윤섭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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