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제주 칼호텔 사진전시장 앞에 선 김봉규 선임기자.
<한겨레> 사진부 김봉규 선임기자는 지난 십수 년 동안 한국의 방방곡곡과 외국 여러 나라에서 민간인 대량학살 현장을 취재해왔다. 이따금 <한겨레>와 <한겨레21> 지면을 통해 작업이 공개되긴 했지만 대부분은 그가 회사업무와 별도로 따로 휴가를 내고 이 작업을 고단하게 진행해왔다. 이 프로젝트의 이름은 ‘제노사이드’(Genocide)다. 김 기자는 최근에 ‘제노사이드’의 마무리를 선언했다.
김 기자는 지난 2008년 기자생활 20년차가 되었을 무렵에 “내가 어떻게 기자생활을 해왔는지 돌이켜보고 싶어서” 기자생활을 시작했던 1990년부터 취재한 사진파일을 정리해봤다고 했다. 사안별로 분류해보니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열쇠말이 ‘분단’이었다. 크게 보자면 6·25전쟁과 제주 4·3을 비롯해, 낱낱의 사안으로 보자면 한총련, 전대협, 통일선봉대, 교련, 민방위, 철책 등의 낱말이 모두 분단을 피해가지 않았다. 그 사진들을 모아서 2011년에 그의 첫 다큐멘터리 사진집 ‘분단 한국’을 내면서 20년이 정리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남은 기자생활 동안 해야 할 일이 눈에 들어왔다. 분단이란 큰 테마 안에는 죽음, 그것도 민간인들의 대량학살이 있었다.
휴일이나 휴가 이용해 한 곳 한 곳
김 기자는 자신의 사진파일에서 대량학살과 관련된 것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에 대해 말했다. 2007년에 열린 한강인도교 폭파희생자 합동위령추모식이 그것이었다. 1950년 6·25전쟁이 터지고 3일 후인 6월 28일 새벽 2시30분에 국군의 예고 없는 다리 폭파로 피난민 800여 명이 숨진 참사다. “그날 국가는 국민을 버렸다.” 57년이 지나 처음으로 평화재향군인회와 6·25전쟁 전후 민간인희생자 전국유족회 지역대표자 등 몇 십 명이 한강 다리 아래에 모여 조촐하게 추모식을 연 것이다. 민간인희생자 전국유족회는 6·25전쟁 때 정부 당국이 학살한 희생자를 백 만명으로 보고 있다. 그것도 전투 중이 아니라 이승만 정권이 후퇴하며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그리고 서울 수복으로 다시 북으로 올라오면서 예비검속과 부역자 처벌이란 명분으로 아이와 부녀자까지 무차별로 살해한 것이다.
김 기자는 분단이 불러온 죽음들인 인혁당, 군의문사, 제주 4·3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사진 취재를 위해 사전조사가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많은 책과 논문, 자료집을 읽었다. 과거의 참혹했던 사실을 하나 둘씩 구체적으로 알게 되면서 ‘제노사이드’ 작업이 의무감으로 다가왔다. 사전조사를 거쳐 휴일이나 휴가를 이용해 한 곳 두 곳씩 찾기 시작했다. 여수, 순천, 노근리, 고양 금정굴, 대전 골령골 등 유해발굴 현장 차례로 순례했다.
남한의 민간인 대량학살 취재와 더불어 외국의 현장도 알고 싶었다. 킬링필드로 알려진 캄보디아가 먼저였다. 르완다의 부족학살 현장의 흔적도 찾았다. 이어서 독일과 폴란드에서 나치 독일의 만행 현장을 살펴보았다. 한국과 외국의 대량학살 현장의 공통점은 뭘까. 김 기자는 “아우슈비츠나 제주 4·3이나 그밖의 민간인 학살 사건은 모두 힘없고 빽 없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왜 죽는지 알지도 못하고 죽어갔다는 공통점이 있다. 큰 틀에서 보면 세월호 참사도 궤를 같이 한다. 그 배에 있던 사람들도 왜 자신들이 죽는지 모른 채 목숨이 가라앉았다. 누구 하나 반기를 들거나 저항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라고 말했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2018년 3월 14일 충남 아산 배방면-아이가 쥐고 있던 구슬. 2017년 4월 19일-독일 나치 치하의 아우슈비츠 -학살된 여인의 구두. 2015년 3월 1일 대전 산내면 골령골-대전형무소 학살된 수감자의 유골. 2017년 2월 27일 경남 진주시 용산고개-학살에 사용된 총탄. 김봉규 제공
진실화해법은 국회 문턱도 못 넘어
그러나 한국과 외국이 다른 점도 있었다. 독일이나 캄보디아는 역사청산을 하고 있는데 한국에선 역사청산의 시도도 못하는 사건이 대부분이다. 제주 4·3이나 보도연맹 사건의 경우, 연좌제라는 빨간 줄의 올가미 때문에 유가족들은 부모님의 희생을 입 밖에 꺼내는 것조차 두려워 했다. 진상규명이나 배상, 보상은 언감생심이었다. 김 기자는 “진보정권이 몇 번 들어섰지만 70년 전의 역사를 끄집어내는 것은 여전히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노근리야 미군이 개입했다는 명확한 증거가 드러났지만 제주 4·3도 알고 보면 미군정의 책임인데 장막 뒤에 있다. 올해 제주 4·3 70주년의 슬로건이 ‘미국의 책임을 묻는다’이다. 진상규명, 역사청산…, 정말 요원한 일이다”라고 했다.
김 기자는 지난해 충남 아산의 유해발굴 현장을 잊을 수가 없다고 했다. 그곳은 이승만 정권이 서울 수복 과정에서 북상하면서 인민군 부역자들을 처형한다는 명분으로, 특히 부녀자들을 대량학살한 현장이다. 그는 “총을 들이대면서 밥을 지으라고 하는데 어떻게 피할 수 있었겠는가? 그곳에서 비녀가 89개 나왔다. 한 비녀 옆에는 4살로 추정되는 작은 아이의 손뼈가 나왔고 그 손아귀에 푸른 구슬이 있었다. 확대해서 찍어보니 우주에서 본 지구처럼 보여서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2005년 12월 진실화해위원회가 항일독립운동, 일제강점기 이후와 광복 이후 인권유린과 폭력 학살 의문사 등을 조사, 은폐된 진실을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출범했다. 진화위가 밝혀낸 남한의 킬링필드는 163곳이다. 이중 정부 차원에서 발굴한 곳은 13곳, 민간단체로 구성된 공동조사단이 발굴한 곳은 5곳이다. 2010년 진화위는 기간 만료로 종료되었고 추가 유해 발굴 등 희생자 진실규명을 위한 관련법안(진실화해법)의 국회 통과는 여전히 요원한 상태다. 김 기자는 “우선 유해 발굴이 급선무다. 뭘 찾아야 그 다음에 진상을 규명하든, 학살자를 처벌하든, 희생자의 명예를 회복하든, 보상이나 배상을 할 수가 있다. 발굴은 돈이 많이 드는 작업이다. 민간단체에 떠맡길 순 없다”라고 했다.
“내가 죽지 않으려고 이 작업 한다”
발굴이 되지 않은 현장이 훨씬 많은데 제노사이드 작업이 마무리 단계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 그는 십여 년 동안 시간이 날 때마다 학살의 현장을 찾아다녔는데 이제 힘이 부친다고 했다. 개인의 역량으로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방대한 작업이었다는 것이다. 십여 년 찍었다고 어찌 남한의 대량학살을 다 봤다고 하겠는가. 다만 몸과 마음이 지쳐서 일단락한다는 뜻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완전히 손을 내려놓을 수는 없었다. 그는 “사실 얼마 전에도 세종시의 보도연맹 사건 유해발굴현장에 다녀왔다”라고 했다.
세월호 참사가 나고선 회사업무로서 취재와 개인적인 시간을 낸 취재 등을 합하여 진도대교를 50여 차례 건너갔다 왔다. 김 기자는 “거창한 명분이 있어서 제노사이드를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죽지 않으려고 이 작업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6·25 때 내가 있었다면 먹물 좀 먹었다는 죄로 죽었을 것이다. 세월호에 내가 타고 있었다면 속수무책으로 죽었을 것이다. 그러니 이 제노사이드 작업은 내가 살아남으려는 작업이다”라고 말했다.
지난달 4일부터 6일까지 제주 칼호텔에서 제주 4·3 70주년 기념사업위원회가 주최한 국제학술대회가 있었는데 주최 쪽이 김 기자를 초대하여 ‘제노사이드’ 사진전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 김 기자는 지구촌의 대량학살과 관련된 나라들인 캄보디아와 인도네시아에서 온 참가자들에게 ‘제노사이드’ 발표회를 했다. “놀랍다”라는 반응이 나왔다고 한다. 캄보디아에서 온 참가자는 “우리나라 안에서도 분위기가 좀 그런데 외국 사람이 우리나라의 아픈 역사를 기록한다는 것이 대단하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김 기자는 십수 년 작업을 정리하면서 사진집으로 기록을 남기고 싶다고 했다.
곽윤섭 선임기자
kwak1027@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