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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100년 전 그날 “독립만세”…그의 묘에는 명패조차 없었다

등록 2019-08-31 09:15수정 2019-08-31 21:03

[토요판] 르포
3·1운동100주년추진위 ‘독립대장정’ 동행기

1500㎞ 이르는 만주 항일유적 답사
용정서 북간도 최초 3·13 만세운동
청산리전투 등 항일투쟁 기폭제

중국 정부, 항일투쟁 견학 견제
신흥무관학교 ‘촬영 가능, SNS 금지’
“한-중 틀어지면 기행 못할 수도” 우려
3·1운동은 국외로도 여파가 이어져 3월13일 중국 용정에서도 독립선언과 만세시위 운동이 전개됐다. 북간도에서 일어난 최초의 만세운동이었다. 만세시위 운동을 하다 숨진 시위대원들이 3·13 반일의사릉에 모셔져 있다.  다큐멘터리 사진가 김동우 제공
3·1운동은 국외로도 여파가 이어져 3월13일 중국 용정에서도 독립선언과 만세시위 운동이 전개됐다. 북간도에서 일어난 최초의 만세운동이었다. 만세시위 운동을 하다 숨진 시위대원들이 3·13 반일의사릉에 모셔져 있다. 다큐멘터리 사진가 김동우 제공
일제 치하에 선열들은 이역만리 타향에서도 독립을 위해 뜨겁게 싸웠다.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국외에 거주하던 동포들도 독립만세 운동을 전개했다. 서간도(백두산 서북방, 압록강 접안 지역)와 북간도(백두산 동북방, 두만강 접안 지역)를 포함한 만주에서는 국내가 무단통치 상태일 때 가장 활발하게 항일투쟁과 민족운동이 일어났다.

올해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독립대장정팀이 지난 17~21일 4박5일간 만주 항일유적지 답사를 떠났다. 역사에 관심 있는 일반시민 15명과 지원단으로 구성된 답사팀은 중국 대련(다롄)을 시작으로 단동(단둥)·용정(룽징)·도문(투먼)·연길(옌지) 등을 잇는 약 1500㎞를 버스로 이동하며 민족운동이 벌어진 현장을 눈으로 보고 몸으로 체험한 뒤 돌아왔다. 그 길에 <한겨레>가 동행했다.

만주 항일투쟁 기폭제 ‘3·13운동’

“용정지명기원지우물은 한인들이 1879년 이곳에 처음 와 팠던 우물입니다. 용정이라는 지명을 만든 곳으로, 이곳 사람들은 아이의 첫돌, 환갑 같은 생일 때 이곳에 와서 기념사진을 찍습니다. 서울에서 일어난 3·1운동을 따라 3월13일 만세운동이 일어난 곳이기도 합니다.”(이광평 용정3·13기념사업회 부회장)

길림(지린)성 연변조선족자치주에 있는 도시인 용정은 인구 26만여명이 사는 도시다. 조선족 비율이 67%에 이르는 이곳은 가곡 ‘선구자’로 알려진 정자 일송정과 시인 윤동주의 생가가 있다. 3·1운동은 국외로도 여파가 이어져 같은 해 3월13일 용정에서도 독립선언과 만세시위운동이 전개됐다. 상해(상하이)에서 발행된 <독립신문>은 3월13일 용정에 모인 한인이 3만명으로 추산된다고 보도했다. 북간도에서 일어난 최초의 만세운동이었다.

놀란 일본 군부는 중국 정부를 압박해 시위대에 발포명령을 내린다. 중국 군대의 무차별 사격으로 현장에서 13명의 시위대원이 희생됐고, 30여명의 부상자가 생겼다. 이에 북간도의 민족 지도자들은 연길에 모여 대한국민회의 모체가 되는 조선독립기성회를 결성하고, 북간도의 독립운동을 조직화하기로 결의한다. 3·13만세운동이 봉오동·청산리 전투 등 항일무장투쟁으로 이어지는 기폭제가 됐다.

3·13만세운동 기념비는 용정지명기원지우물에서 걸어서 5분 거리 안팎에 세워져 있다. 용정 제1유치원 앞마당에 우뚝 서 있는데 국가급 문화유산인 ‘용정시 문물중점보호단위’로 지정돼 접근이 어렵다. 기념비에서 도보 10분 거리엔 3·13만세운동을 탄압했던 간도일본총영사관이 있다. 1909년 일제가 대륙침략정책을 위해 세운 곳으로, 수많은 항일운동가가 총영사관 소속 경찰서에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이광평 부회장은 “현재 이 건물은 용정시 인민정부 건물로 활용되고 있으며, 감옥은 2015년부터 연변 조선족 항일투쟁사를 보여주는 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3·13만세운동 때 중국 군대의 공격으로 사망한 시민들은 용정 시내에서 멀지 않은 허청리 양지바른 언덕에 묻혀 있다. 13구의 시신이 잠들어 있는 ‘3·13 반일의사릉’은 봉분 하나를 제외하곤 누구의 묘인지 알 수 없어 명패조차 없다. 이광평 부회장은 “단체 묘지가 만들어지고 일본이 경비를 세워 감시하는 통에 참배도 할 수 없었는데, 그사이 유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진 게 아닌가 싶다”며 “올해 3·13만세운동이 100주년을 맞으면서 관심이 쏠리자 중국 정부가 의사릉 앞의 논밭을 밀어 광장을 조성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철혈광복단이 독립운동에 사용할 무기 구입을 위해 조선은행에서 당시 돈 15만원을 탈취한 자리에 ‘15만원 탈취사건 유적지’ 비가 세워져 있다. 다큐멘터리 사진가 김동우 제공
철혈광복단이 독립운동에 사용할 무기 구입을 위해 조선은행에서 당시 돈 15만원을 탈취한 자리에 ‘15만원 탈취사건 유적지’ 비가 세워져 있다. 다큐멘터리 사진가 김동우 제공
영화 <놈놈놈> 모티브 ‘15만원 탈취사건’

이름 없이 스러져간 시위대를 향해 묵념을 마친 독립대장정팀이 이어서 찾아간 곳은 ‘15만원 탈취사건 기념비’다. 용정시 지신에서 백금으로 들어가는 도로 입구에 표지석이 세워져 있는데, 이 사건은 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의 모티브가 됐다.

간도에는 통감부 시기부터 일찌감치 일제 금융기관이 설치됐다. 조선은행 용정출장소는 일제가 대륙을 침략하기 위한 금융창구 구실을 했다. 1920년 1월4일 최봉설·임국정·엄인섭 등으로 구성된 철혈광복단은 독립전쟁을 위한 무기 구매를 위해 조선은행 회령점에서 용정출장소로 가져오던 돈 15만원을 탈취한다. 당시 15만원은 5천명을 무장시킬 수 있는 거금이었다.

임국정은 엄인섭과 함께 러시아로 넘어가 항일운동을 펼치려 했지만 변절한 엄인섭 탓에 철혈광복단은 모두 체포된다. 답사에 동행한 박광일 역사작가는 “철혈광복단이 훔친 돈은 한화였다. 일본은 한반도 경제 상황이 일본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해 엔화를 쓰지 않았다. 일본이 얼마나 치밀하게 침략전쟁을 준비했는지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15만원 탈취사건 유적지를 둘러보고 독립대장정 단원들이 발걸음을 돌린 곳은 윤동주 생가가 있는 명동촌이었다. 1910~1920년대 북간도 지역 한인의 문화교육운동 중심지였던 곳이다. 윤동주·송몽규·문익환 등을 배출한 명동학교는 규암 김약연 선생이 세운 만주지역 최고의 민족학교로, 3·13만세운동에도 깊이 관여했다. 박 작가는 “독립운동가들은 세계 어디를 가서 독립운동을 하든 학교부터 짓고 교육에 힘을 쏟는 한편 국내외 네트워크를 통해 일제의 침략 사실을 끊임없이 알리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봉오동전투 전적비를 보려면 봉오저수지 철문을 지나 올라가야 한다. 중국이 수자원 보호를 이유로 접근을 막아 철문이 굳게 닫혀 있다. 다큐멘터리 사진가 김동우 제공
봉오동전투 전적비를 보려면 봉오저수지 철문을 지나 올라가야 한다. 중국이 수자원 보호를 이유로 접근을 막아 철문이 굳게 닫혀 있다. 다큐멘터리 사진가 김동우 제공
중국 공안에 답사 일정 다 신고

우리 역사임에도 타국에서 벌어진 일들은 온전히 우리 것으로만 취할 수 없다. 올해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한국 답사객들이 상해와 만주 등지를 부쩍 많이 찾으면서 중국 정부의 견제가 심해졌다. 예정된 답사 일정이었던 봉오동전투 전적비는 출입문이 닫혀 가까이 가보지도 못한 채 입구인 봉오저수지와 인근 조선족 마을인 수남촌을 둘러보는 것으로 끝내야 했다.

화룡(허룽)시에 있는 민족종교인 대종교 삼종사 묘는 중국 공안들의 감시 속에 빠르게 둘러봐야 했고, 같은 지역에 있는 청산리전투비는 볼 기회마저 없었다. 길림성 유하현 고산자진에 세워졌던 신흥무관학교 옛터 역시 사진 촬영은 가능하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 올리면 안 된다는 조선족 가이드의 당부를 들어야 했다.

독립대장정 답사를 준비한 클럽스카이여행사 박동호 대표는 “답사팀이 오면 중국 공안에 일정을 다 신고하게 돼 있다. 사드 문제 같은 이유로 다시 한-중 관계가 틀어지면 역사기행을 앞으로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이광평 부회장도 “만주지역 항일투쟁 역사는 중국과 이 땅에 살았던 조선족의 역사이기도 하다. 한국의 역사라고만 강조해 중국을 자극하지 말고 일본의 핍박에 맞선 피압박 국민의 역사로 넓게 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답사에 참여했던 대학생 김승호씨는 “압록강에 손을 담가 보는데 남의 땅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세대가 나라를 위해 할 일이 무엇인지 깊이 고민해봐야 할 것 같다”고 했다.

단동 용정 도문 연길/김미영 기자 instyle@hani.co.kr

“독립군 숫자 늘어나 3천명분 식사 준비하기도”

“봉오동전투 전적비는 답사 오기 전부터 못 올라갈 줄 알았어요.”

최성주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 이사는 봉오동전투 전적비 출입문이 닫혀 가까이 가지 못했지만 실망하지 않는다고 했다. 중국 당국이 수자원 보호를 이유로 봉오저수지 안쪽 전적비 출입을 막을 걸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최 이사는 “그동안 학계에서는 봉오동전투 현장이 수몰됐다고 했지만 실제 전투가 있었던 곳은 봉오저수지를 10㎞ 정도 거슬러 올라간 곳일 만큼 봉오동전투에 대해 잘못 알려진 게 많다”고 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할아버지 최운산은 ‘간도 제1의 거부’였다. 중국이 토지정리사업을 할 때 대규모의 황무지를 헐값에 불하받아 경작했던 그는 장사 수완이 좋아 콩기름공장·국수공장·성냥공장 등 다수의 생필품 기업을 차렸다. 청년시절 형제들과 함께 중국 동북3성 지배세력인 장작림 군벌에 들어간 최운산은 중국군에 복무하면서 군사 지식과 군조직 운영을 익혔다. 장작림의 신임을 얻고 있던 최운산은 1912년 조선인의 생명과 재산 보호를 명목으로 자위부대를 구성했다. 이 군대가 점차 커지면서 정규 군대와 같은 편제를 갖추게 됐다. 최 이사는 “독립군 숫자가 점점 늘어나자 최운산 장군은 봉오동 산중턱에 막사를 여러 개 짓고 독립군을 훈련시켰다”며 “할머니(최운산 장군 부인 김성녀) 말씀으로는 한 끼에 3천명의 식사를 준비하기도 했다더라”고 전했다. 그의 말을 증명하듯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가 가지고 있는 봉오동전투 현장 답사 사진엔 맨홀보다 훨씬 큰 맷돌이 땅에 박혀 있다.

봉오동전투 승리 이후 조여오는 일본군의 압박에 독립군들은 연해주로 이동한다. 4천여명에 이른 독립군들이 부대별로 이동하던 중 일본군이 그해 10월21일 청산리에서 따라잡아 전투를 벌인 게 청산리전투다. 최운산은 연해주에서 자유시참변(1921년 6월28일 한인부대와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이 자유시에서 한 무장충돌)을 겪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와 무장독립운동을 계속했다. 그는 일본 경찰에게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한 장남 최봉우를 보러 평양에 갔다가 그곳에서 고문후유증으로 숨을 거둔다. 도문/김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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