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현지시각) 미국 로스앤젤레스 할리우드 돌비극장에서 열린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 레드카펫에 올라 단원고 아이들의 얼굴이 담긴 펼침막을 함께 든 <부재의 기억>의 이승준 감독(왼쪽부터), 오현주씨, 김미나씨, 감병석 프로듀서. 이승준 감독 제공
“아카데미상은 못 받았지만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도 다행이고, ‘416기록단’과 세월호 가족협의회와 같이 처음부터 주욱 올 수 있었던 것도 다행이고, 아카데미 후보에 오른 것도 다행이고, 좋은 반응을 얻은 것도 다행입니다. 지금 돌아보면 (모든 게) 참 다행이었습니다.”
단편 다큐멘터리 영화 <부재의 기억>의 이승준 감독이 18일 서울 중구 한국언론회관에서 열린 ‘귀국 보고 기자간담회’에서 말했다. 그는 지난 9일(현지시각) 열린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 다녀왔다. 세월호 참사를 다룬 <부재의 기억>은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과 함께 한국 영화 최초로 아카데미 단편 다큐 부문 후보에 올랐다. 비록 수상하진 못했지만 세계인들에게 존재를 알린 것만으로도 큰 성과라는 평가가 나온다.
이 감독은 지난달 26일 미국으로 건너가 공식 행사, 상영회, 인터뷰 등 일정을 소화했다. 단편 다큐 후보작 5편을 모두 상영하는 자리에서 <부재의 기억>에 대한 반응이 특히 좋았다고 한다. “상영 후 저에게 와서 ‘내가 아카데미 회원인데 <부재의 기억>에 투표하겠다’고 한 사람들도 있었어요. <뉴욕 타임스> <가디언> <인디와이어> 등 외신에서도 <부재의 기억>을 최고로 꼽는 기사가 나왔고요. 하지만 상을 받는 건 다르더라고요. 그래도 많이 알려졌다는 건 분명해요. 해외에 나가 많이 알리겠다고 한, 유가족과의 약속을 지킬 수 있어서 만족합니다.”
지난 1일(현지시각) 미국 뉴욕 링컨센터에서 열린 <부재의 기억> 상영회에서 봉준호 감독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날 <기생충>도 이곳에서 상영됐다. 왼쪽부터 김미나씨, 감병석 프로듀서, 오현주씨, 봉준호 감독, 이승준 감독. 이승준 감독 제공
시상식에는 감병석 프로듀서는 물론 단원고 학생 김건우군의 어머니 김미나씨, 장준형군의 어머니 오현주씨도 참석했다. 두 어머니는 단원고 학생들의 명찰을 달고 아이들의 캐리커처를 그린 스카프를 펼쳐 들고 레드카펫을 걸었다. 이날 간담회에 참석한 김미나씨는 “레드카펫 참석은 원래 예정에 없었다. 감독님과 피디님의 배우자께서 우리에게 양보해주셔서 가능했다”고 설명했다. “평범한 정장을 가져갔더니 교민들이 ‘잔치에 아이들을 데리고 가는데 엄마들이 당당하게 들어가야 한다’며 드레스도 빌려주고 화장도 해줬어요. 시상식장에 엄마가 아니라 아이들 입장으로 들어갔어요. 거기서 유명 배우들을 본 것보다도 아이들 얼굴을 들고 사진 찍은 게 가장 행복했어요.”
오현주씨는 현지 교민의 얘기를 전하며 <부재의 기억>이 이룬 결실을 강조했다. “저희가 미국에서 처음 간 곳이 뉴욕 상영회였어요. 현지 교민들이 와서 많은 응원을 해줬죠. 맨해튼에서 꾸준히 세월호 관련 집회를 해오던 분들이 ‘어제도 집회를 했는데, 길을 가던 미국인들이 유독 더 다가와 관심과 응원을 보냈다’고 하더라고요. <부재의 기억> 덕인 것 같아 기뻤어요.”
<부재의 기억> 영문 포스터. 이승준 감독 제공
<부재의 기억>은 미국 다큐 제작·배급 단체 ‘필드 오브 비전’의 제안에서 시작됐다. 애초 박근혜 대통령 탄핵 촛불집회에 관한 다큐를 만들어달라는 요청을 받은 이 감독은 세월호 얘기를 역제안했다. 동료 독립피디들이 참여한 ‘416기록단’에서 수천시간에 이르는 방대한 기록을 받고 유족들의 도움을 얻어 추가 촬영을 해나갔다. 이를 사고 당일 시간순으로 재구성해 29분짜리로 압축한 다큐는 2018년 뉴욕다큐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은 데 이어 아카데미상 후보에도 올랐다.
‘416기록단’ 한경수 피디는 “세월호 참사가 벌어지고 사흘째부터 찍기 시작해 실종자 수색이 끝난 11월까지 촬영을 했다. 애초 작품을 만드는 게 목표가 아니었다. 언론에 대한 불신이 높아진 상황에서 지금 기록하지 않으면 영원히 사라질 수도 있겠구나 하는 심경으로 기록했다. 15테라바이트에 이르는 방대한 기록을 이 감독과 가족협의회에 다 넘겨줬다. <부재의 기억>처럼 세월호 진상 규명을 위한 작품을 만드는 데 얼마든지 가져다 쓰면 좋겠다”고 말했다.
제92회 아카데미시상식 단편다큐멘터리 부문에 노미네이트된 <`부재의 기억' 그 못다 한 이야기> 귀국 보고 기자 간담회가 18일 오전 서울 중구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려 이승준 감독(가운데)이 소회를 밝히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간담회에는 4·16 세월호 참사 가족협의회 장훈 운영위원장도 참석했다. “국가도 언론도 아무도 믿지 못할 때 몇몇 젊은 감독이 와서 찍겠다고 했습니다. 기성 언론처럼 카메라부터 들이대는 대신 같이 아파하고 공감하며 인간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우리 말을 왜곡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전했습니다. 오늘만큼은 유가족이 아니라 독립피디분들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게 마땅합니다. 아픔을 찍는다는 게 많이 힘들고 트라우마까지 남는 일인데, 그걸 감수하고 작품을 만들어준 감독님께 감사드립니다. 다른 분들도 세월호를 여러 시각으로 바라보는 작품을 많이 만들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감독은 “오늘 간담회 이후 <부재의 기억>에 대한 관심이 식을 수도 있는데, 이게 시작이었으면 좋겠다. 이 작품을 통해 다시 한번 세월호 얘기를 많이 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나타냈다. 현재 <부재의 기억>을 유튜브에서 볼 수 있지만, 극장에서 상영하는 방안도 논의 중이다. 그는 “온라인으로 보는 것과 모여서 함께 보고 얘기를 나누는 건 차이가 크다”며 “극장 상영은 저 혼자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어서 프로듀서, 배급사 등과 함께 고민하는 단계”라고 전했다.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