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 21번째 주인공은 고석만 프로듀서다. 1973년 <문화방송>(MBC)에 입사한 이래 그는 30여년간 숱한 화제작을 제조했다. ‘정치드라마의 대부’ ‘스타 피디 1세대’ 같은 명성과 더불어 ‘문제 피디’라는 시비도 따라다녔다. 특히 ‘공화국 시리즈’와 ‘재벌 시리즈’는 한국 사회의 가장 민감한 환부를 정면으로 드러낸 까닭에 대부분 ‘조기 종영’을 해야 했다. 끝내지 못한 드라마의 숨은 이야기들을 ‘고석만의 첨병’에서 마침내 털어놓는다.
1991년 4월26일 명지대생 강경대
시위중 ‘백골단’ 쇠파이프에 사망
학생·노동자·시민들 ‘항의 분신 사태’
‘땅’ 4월28일 15회 ‘예고없이’ 종영
“작가 양심도 죽었다” 김기팔 절필
언론들 ‘최창봉·김종필 친분’ 의혹
“99% 심증 있으나 1% 물증이 없다”
‘유서대필’ 조작 이은 ‘정원식 봉변’
‘운동권 도덕성’ 공세로 정국 반전
50부작 대하드라마 <땅>은 1991년 4월28일 15회로 중도하차했다. 하지만 <문화방송>은 시청자들에게 사전 예고도 사과 방송도 하지 않았다. <경향신문 1991년> 5월5일치
1991년 4월26일 명지대 신입생 강경대군이 시위 도중 ‘백골단’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맞아 사망하자 분노한 학생·시민들의 분신이 이어졌다. <한겨레> 자료사진
1991년 4월26일, <문화방송>(MBC) 대하드라마 <땅>은 도중하차되어 죽었다. 그날, 강경대도 죽었다. 명지대 경제학과 학생 강경대군이 학교 앞에서 등록금 인하를 주장하다 구속된 총학생회장을 석방하라고 시위하다가 붙잡혀 ‘백골단’이라고 불리던 사복 진압경찰들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2~3분 동안 두들겨 맞아 숨졌다. 백주대낮에 경찰이 쇠파이프로 학생을 두드려패서 숨지게 하는 나라. 50회 방송을 시청자와 약속해 놓고 위정자의 맘에 들지 않는다 하여 15회에 죽여버리는 나라.
“<땅>과 함께 이 땅에서 작가 양심도 죽었다. 바른말 못 할 바엔 더 이상 글 안 쓰겠다.” 김기팔 작가는 절필을 선언했다.(<국민일보> 1991년 4월27일치 기사)
강경대군이 사망한 1991년 4월26일, 대하드라마 <땅>의 김기팔 작가는 언론 인터뷰를 통해 ‘절필 선언’을 했다. 그 뒤 <땅>은 다시 볼 수 없었고, 김 작가도 다시 붓을 들지 못했다. <동아일보> 4월27일치 인터뷰 기사.
노태우 대통령은 ‘강경대 사망사건’ 다음날 내무부 장관을 경질했지만, 학생들은 대통령의 사과와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며 연세대에 모여 시위를 벌였다. 시위는 곧 전국으로 번져나갔다. 4월29일, 전남대생 박승희양이 ‘강경대 사건’ 규탄집회 도중 분신했다. 이어서 5월1일에는 안동대 김영균군, 5월3일에는 경원대 천세용군이 분신했다. 백골단을 동원한 정부의 무자비한 시위 진압에 대한 항의였다.
모든 언론은 사회현상에 대한 비판을 ‘땅의 도중하차’ 비판으로 분출시키는 듯했다. 도하 신문의 문화면 대서특필은 물론 사설에서까지 비판의 수위를 높였다. ‘누가 <땅>을 중단시키는가?’ <조선일보>(1991년 4월21일치)까지도 사설로 그 대열에 가세할 정도였다.
‘<문화방송>의 대하드라마 <땅>이 회사의 방침에 따라 조기 중단된다고 한다. 방송의 책임자는 “이 드라마가 애초의 기획의도와 달리 정치드라마로 나가고 있어 빨리 끝내라고 한 것”이라면서 “외부의 압력은 없었다”고 해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 드라마의 연기자들은 “당초 50회 예정된 드라마의 출연 계획을 해놓고 시청률이나 방송 내용에 문제가 없음에도 불구, 회사측이 일방적으로 도중하차 시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투표 끝에 녹화를 거부했다고 한다. 우리는 이 사태를 보면서 대중매체인 방송과 이를 통한 창작의 자유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 차이가 지금 민주화 과정을 거치고 있는 우리 사회에 첨예하게 제기되고 있다는 점을 발견한다. 이는 비단 방송 내부의 문제일 뿐 아니라 우리 사회 구성원들 사이의 문제이기도 하다. 동일한 드라마를 본 사람들 사이에서도 어떤 이는 사회적 갈등과 부조리를 숨김없이 파헤치고 있다고 통쾌함을 느끼는가 하면, 어떤 이는 정치적 편향 시각에서 우리 사회의 부정적인 측면을 과도하게 부각한다고 불만이다. 그러나 이처럼 시청자의 견해 차이가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중요한 것은 그런 견해차의 존재를 위험시하여 기본적으로 허구일 수밖에 없는 방송 드라마를 중단시키겠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며 이들이 자유민주주의의 기본틀인 표현의 자유는 물론 예술행위의 기본인 창작의 자유를 침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물론 ‘5공 시대’ 언저리에서 적지 않은 드라마와 코미디들이 뜻 아니게 중단된 것을 알고 있다. 그중엔 우리 사회의 미풍양속을 해칠 수 있는 저속한 표현과 비윤리성 때문에 문제가 된 것도 있지만 일부는 정치인이나 재벌의 비리를 들췄다고 해서 그리된 경우도 있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시대는 아니지 않은가. 물론 우리는 창작의 자유가 보장된다고 해서 무한정의 표현의 자유가 허용될 수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 법이 허용되고 우리 사회가 용인할 수 있는 일정한 테두리의 양식은 지켜져야 한다. 따라서 공산주의자를 무조건 미화하는 터무니없는 선동 선전극이 아닌 한 우리 사회가 엄존하는 ‘사실’ 자체를 호도하여 표현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정치를 소재로 한다고 해서 방송할 수 없다고 하는 생각은 잘못이다.’
‘방영 중단 결정, 외압 여부 의혹’(<중앙일보> 4월22일치), ‘방송통제 되살아나는가?’(<한국일보> 4월23일치), ‘방송가에 반 자율 한파’(<경향신문> 4월23일치), ‘방송외압 사실인가?’(<경향신문> 4월23일치 사설), ‘<땅> 중단결정 각계 항의 움직임’(<한겨레> 4월24일치), ‘<땅> 도중하차가 남긴 것’(<중앙일보> 4월25일치 분수대), ‘김기팔 작가 일문일답에서 절필선언!’(<세계일보> 4월26일치), ‘방송 1991년 봄―5공으로 가는가’(<시사저널> 5월9일치 특집)…기사가 쏟아졌다.
특히 <한겨레>(최보은 기자)는 ‘민용기 편성이사, 고흥칠 편성국장과 직격 인터뷰’로 핵심을 파고들었다. 세 차례(4월20일치·4월24일치·4월27일치) 기사를 재구성해본다.
‘기자: 외압은 없었다고? 모두들 대통령 명령이라 추측하는데?
편성: …기획의도와 달리 정치드라마로 흘러서….
기자: 편성이사도 결재하고 공개한 기획의도다. 무엇이 다른가?
편성: 시청률이 안 나와서….
기자: 첫회 41%, 그 후 줄곧 30% 후반, 최근 종료가 발표되자 약간 주춤해 30% 초반으로, 3사 대비 압도적 우위인데?
편성: 외주를 준 프로다. 프로덕션에서 알아서 할 일이다. 본사 편성은 납품계약을 준수할 뿐이다.
기자: 사상 최초로 연기자들이 결의를 하고 성명까지 발표했는데?
편성: 까짓, 드라마 한 편에….
기자: ‘드라마 한 편’이라니? 연기자들은 그 한마디에 불출연 결의를 했다던데…, 내년 봄, 연임을 노린 지휘부의 보신인가?
편성: …….
기자: 최창봉 사장과 김종필 최고위원의 인연이 깊다고 들었다.
편성: 모르는 일이다.’
대하드라마 <땅>의 중도하차 배경에는 최창봉(맨 가운데) <문화방송> 사장과 김종필(맨 오른쪽) 민자당 최고위원의 친분관계 등 정치권의 외압 의혹이 있었다. 사진은 1991년 12월 문화방송 창사 30돌 기념 연회 때 모습이다. 왼쪽부터 김대중 (통합)민주당 총재, 박준규 국회의장, 최창봉, 김영삼 민자당 대표최고위원, 김종필. <한겨레> 자료사진
<한겨레>의 보도는 계속된다. ‘외압 여부와 관련해 경영진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하고 있으나 방송계에서는 정치적 압력에 따른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프로듀서연합회의 김윤영 회장은 “지난 3월부터 <땅>과 관련한 직간접적 압력에 대한 뒷얘기가 끊이지 않았다”며 “99%의 심증은 있으나 1%의 물증이 없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러나 방송계의 한 고위관계자는 “정부 차원의 공식압력이라기보다는 정치권 일부의 개별적인 항의가 있었다고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관계자는 “이 드라마의 배경인 ‘제3공화국’의 주역들이 최창봉 사장과의 개인적 친분을 통해 불만을 나타냈으며 특히 민자당의 김종필 최고위원이 불쾌해했던 것으로 안다”고 밝히고 “그러나 최 사장이 내년 1월 임기 만료를 앞두고 연임 가능성 등을 의식, ‘호신책’을 쓴 것은 분명하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드라마 <땅>이 앞으로 6·3 사태, 10·17 유신개헌 등 큰 정치적 사건을 잇따라 다룰 예정인데다 ‘수서택지특혜비리’ 사건으로 마무리될 것으로 알려져 신·구 정권 정치인들이 불안해한다”고 내다봤다.’
1991년 4월 드라마 <땅>의 중도하차 사태를 맞아 문화방송노조는 철야농성를 벌이며 정치권의 외압과 이에 결탁한 내부세력의 방송통제를 규탄했다. <땅> 출연 연기자들의 방송 사상 최초 ‘촬영 거부 선언’을 주도한 조경환 등 탤런트들도 노조와 연대 투쟁 에 나섰다. <문화노보> 91년 5월2일치.
한국프로듀서연합회(회장 김윤영)는 91년 7월 <방송시대> 창간호를 내면서 ‘프로그램 집중분석 1―<땅>’을 특집으로 게재했다. ‘드라마 관점으로 본 <땅>―재갈 물린 미완성 드라마’(전재수·방송비평가), ‘사회운동 측면에서 본 <땅>―결코 정치드라마가 아니다’(이진수·도시빈민연구소), ‘<땅>의 정치학적 해부―생산의 원천이며 만인의 삶의 원천’(김광식·한신대 강사·정치학).
<땅>은 이미 국회 문공위에서도 의제가 되었다. ‘여당인 민자당의 신상우 의원은 “드라마 제작에 관계한 사람들은 다른 나라가 아닌 우리나라에서 오랫동안 활동하면서 나름대로의 위치를 인정받은 중견 극작가이거나 프로듀서인데, 과연 이들이 방송위의 판정대로 ‘방송의 품격을 현저히 훼손시켰다’거나 ‘계급의식, 빈부간의 갈등을 심화시켰다’고 볼 수 있는 것인지 의심스럽다”며 “방송위가 독자적으로 판정했는지 많은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야당의 조세형 의원은 이를 더 구체화시켜 “분배정의의 문제는 드라마 제작에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정한 것은 드라마 소재를 원천적으로 제한, 방송의 자율성을 침해하고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라며 “실제로 존재하는 심각한 빈부격차를 금기시하며 은폐하는 것이야말로 계층 간의 갈등을 심화시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조 의원은 특히 앞서 1월17일 방송위의 연예오락심의소위에서 ‘표결’로 제작자에 대한 ‘해명’을 결정했는데 그로부터 5일 뒤인 1월22일 방송위 전체회의에서 ‘만장일치’로 더 강력한 제재인 ‘사과명령’을 결정한 것은 정부의 압력행사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실례 아니냐고 따졌다. 이에 최창윤 공보처 장관과 강원용 방송위원장은 정부 개입 사실을 부인하면서 “방송법상 ‘해명’보다는 ‘사과명령’이 약한 징계”라고 변명했으나 야당 의원들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다”고 이런 해명에 반발했다.(<한겨레> 91년 2월2일치 곽병찬 기자)
결국 방송위원회는 물론이고 공보처는 심한 혼란에 빠진다. 3월19일 강 위원장이 물러나고 고병익 서울대 교수가 위원장에 들어서며 방송사 쪽에 유감을 표시해 눈길을 끌었다. 그는 “방송편성이란 방송사 자신은 물론, 시청자에게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방송하겠다는 공약”이라며 “<땅>의 경우를 지켜보면서 시청자들은 방송이 과연 국민의 방송인지 회의를 느낄 것”이라고 말했다.(1991년 5월9일)
5월14일, 강경대군 장례식이 사망 19일 만에 명지대에서 치러졌다. 재야인사, 학생, 노동자 등 1만여명이 참가했다. 그러나 애초 계획했던 서울시청 앞 노제가 경찰의 저지로 무산되자, 대책회의 쪽은 운구 행렬을 연세대로 되돌렸다. 신촌 사거리에서 열린 ‘6인 분신 사망자 추모제’에는 7만~8만명이 나와 주변 도로를 가득 메웠다. ‘분신 정국’은 김기설의 유서를 강기훈이 대신 썼다는 ‘유서대필 사건’으로 전환되는 듯했으나, 성균관대 김귀정양이 시위 중 사망하는 또 하나의 살인사건이 터지며 걷잡을 수 없는 일대 혼란의 소용돌이로 빠져든다. 이때 등장한 사람이 정원식 국무총리다.
1991년 6월3일 정원식 국무총리서리가 외대 교육대학원에서 마지막 강의를 하고 나오다 일부 학생들에게 밀가루와 계란 봉변을 당했다. 학생들은 정 총리서리에게 문교부 장관 사질 ‘전교조 불법화’와 전교사 교사 대량 해직의 책임을 항의하고자 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6월3일, 시위 정국의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노재봉 총리가 사퇴하면서 신임 총리로 지명된 정원식 국무총리서리가 취임 전 출강해온 외대 교육대학원에서 마지막 강의를 하러 갔다가 외대 학생들에게 봉변을 당했다. 정 총리서리는 학생들로부터 계란과 밀가루 세례를 받았다. 밀가루로 범벅이 된 추태가 대기하고 있던 사진기자들에게 송두리째 찍힌다. 총리는 교문 밖까지 밀리다 사복 경찰관들에게 구출되었다. 언론에서는 이 사건을 속보로 보도하면서, 그동안 민주화운동에 크게 기여해온 학생운동의 도덕성에 치명적 타격을 주는 사건이라고 규정했다. 시민들도 경악했다. 한국 전통윤리와 사제관계를 저버린 ‘반인륜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이면서 강한 어조로 학생들을 비판했다. 미리 짜놓은 시나리오라는 얘기도 돌았고, 함정에 학생들이 빠졌다는 소문도 돌았다.
노태우 정권은 1991년 ‘6·3 사태’를 운동권 학생들의 패륜으로 몰아 대대적인 공안몰이를 함으로써 분신정국에 대한 반전을 시도했다. <한겨레> 91년 6월5일치.
5월14일 강경대 열사 장례식은 ‘6인 분신 합동 추모제’와 함께 국민대회로 열렸다.
그러나 여론은 급격하게 나빠졌다. 이날 저녁 87명의 수사관으로 구성된 수사본부를 설치하고, 시경 3부장인 경무관 이완구(훗날 짧은 국무총리)를 본부장으로 임명했다. 아울러 9개 중대 1200명을 동원해 외대 정문부터 청량리 일대에서 모두 347명을 연행하며 “경찰은 더 이상 폭력시위를 묵과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시위정국의 전환점이다.
예정된 스케줄이었다. 군사작전 하듯 치밀하게 <땅>은 붕괴되었다.
기획·진행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