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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방송·연예

“김기팔 작가 빈소는 마치 ‘촛불광장’처럼 격앙됐다”

등록 2018-02-11 14:20수정 2018-02-21 16:11

【길을 찾아서】 고석만의 첨병 ⑥ 민주언론상 수상

<한겨레>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 21번째 주인공은 고석만 프로듀서다. 1973년 <문화방송>(MBC)에 입사한 이래 그는 30여년간 숱한 화제작을 제조했다. ‘정치드라마의 대부’ ‘스타 피디 1세대’ 같은 명성과 더불어 ‘문제 피디’라는 시비도 따라다녔다. 특히 ‘공화국 시리즈’와 ‘재벌 시리즈’는 한국 사회의 가장 민감한 환부를 정면으로 드러낸 까닭에 대부분 ‘조기 종영’을 해야 했다. 끝내지 못한 드라마의 숨은 이야기들을 ‘고석만의 첨병’에서 마침내 직접 털어놓는다.

1991년 4월 대하드라마 <땅>의 강제 폐지 울분을 술로 달래던 김기팔 작가는 그해 12월24일 돌연 눈을 감고 말았다. 의료사고사인데다 생전에 워낙 사진찍기를 좋아하지 않은 탓에 영정사진조차 구하기 어려웠다. 서울 강동성심병원 장례식장에는 3일장 내내 수많은 시민 추모객이 몰렸다. <경향신문> 91년 12월29일치에 실린 빈소 사진, 그나마 원본은 찾을 수가 없다.
1991년 4월 대하드라마 <땅>의 강제 폐지 울분을 술로 달래던 김기팔 작가는 그해 12월24일 돌연 눈을 감고 말았다. 의료사고사인데다 생전에 워낙 사진찍기를 좋아하지 않은 탓에 영정사진조차 구하기 어려웠다. 서울 강동성심병원 장례식장에는 3일장 내내 수많은 시민 추모객이 몰렸다. <경향신문> 91년 12월29일치에 실린 빈소 사진, 그나마 원본은 찾을 수가 없다.
?김기팔 작가는 ‘술병’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다.

1991년 11월26일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에서 선정한 ‘제1회 민주언론상’에 <땅> 제작진이 선정되었다. <땅>이 15회로 도중하차한 지 꼭 7개월 만의 일이다. 또한 김중배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공동수상하게 된 것도 뜻깊은 일이다. 우리는 김기팔 작가를 앞세우며 시상식장에 나가고 싶었지만 병원에 입원 중이라 글로서 수상 소감을 대신 밝혔다. <언론노보>에 게재된 글을 여기에 전재한다. 조금 길게 느껴지겠지만, 그의 ‘마지막 글’이라는 의미가 있다.

“‘도둑놈 제 발 저리다’는 우리 속담이 있다. 유신독재 시절부터 방송중단을 수없이 당해오면서 늘 머리에 떠오르는 속담이다. 왜 도대체 방송을, 그것도 일개 드라마를 무쪽 자르듯 중단시키는가. 우리의 기성세대가 그렇게 자신없이 이 나라를 이끌어가는 증거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특히 우리 기득권층, 더 좁혀서 우리의 집권층이 마치 도둑처럼 자신이 없어서(발이 저려서) 압력을 가해온다는 생각이다.

드라마 <땅>을 준비하면서 고석만 연출과 나는 ‘이번에는 괜찮겠지’ 하는 생각을 했었다. 비록 군 출신이지만 직선 대통령 아래, 민주화를 말끝마다 내세우는 정부가 설마 ‘발이 저릴 리가 있으랴’ 하는 생각이었다. 하도 당해서 웬만한 데는 속지 않는 우리지만 ‘이번에는…’이었다.

첫회가 나갔다. 여기저기서 기분 좋게 보았다는 연락이 와서(그러나 일부 기득권층에 있는 측에서는 ‘표현이 좀 지나치지 않으냐’는 조심스러운 논평도 해왔다) 드라마 <땅>이 성공하는구나, 생각했다. 이즈음 뒤숭숭하기까지 한 땅투기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주제가 먹혀 들어가는구나, 차제에 그 심각성을 철저히 부각시켜 국민 각 계층 간의 위화감을 해소시키자, 의욕에 차 있었다. 표현 문제를 검토하기도 했으나 내용은 애초대로 밀고 나가기로 했다. 사실 땅투기로 인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도시와 농촌, 기성세대와 젊은세대, 그리고 이데올로기를 무기로 한 좌우익 간의 갈등은 우리 현대사에서, 그리고 오늘날까지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가, 탄압이 오리라는 생각은 전혀 안 했었다.

그런데 이상한 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방송사 사장이 모처에 불려갔다…, 방송국 공기가 이상하다…, 방송위원회가 열려서 징계를 논의한다…, 신문이 보도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방송위원회가 우스꽝스러운 논리를 내세워 ‘사과방송’ 조처를 내렸다. 사과하라니,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인지라 이상한 문구의 사과방송이 나갔다.

그러나 이것이 전주곡이었다. 14회 녹화를 앞두고 15회로 중단하라는 결정이 방송국에서 내려진 것이다. 이전 정권에서는 그래도 떳떳하게 중단을 통고했었는데 이번에는 방송국의 결정으로 ‘자진중단’ 하는 형식을 취했던 것이다. 출연진들도 들고일어났고, 피디(PD)연합회가 항의했고, 각 신문도 전에 없이 양비양시론이 아닌 정공법으로 중단의 부당성을 지적했지만, ‘발이 저린’ 사람들은 ‘이런 문제야 늘 망각의 그늘로 사라지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중단을 강행했다.

그로부터 반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망각의 그늘 속에 묻혀 지내고 있는데 언론노련의 민주언론상이 우리 <땅>에 수여됐다는 소식을 듣고 ‘발이 저린 사람들’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이 나라는 언제쯤 가야 정직하고 떳떳한 사람들이 이끌어가고, 언제쯤 가야 방송 드라마 한편 편히 내보낼 수 있을까.”

‘땅’ 폐지 뒤 끝내 ‘술병’ 입원한 김 작가
1991년 11월 ‘제1회 민주언론상’ 선정
시상식 참석 대신 쓴 소감 ‘마지막 글’
“언제쯤 이 땅에서 드라마 편히 만들까”

암 선고에 수술했으나 끝내 의식불명
91년 12월24일 김기팔 별세…향년 54
‘수십년 지기’ 최창봉 사장 밤새 문상
“끝내 화해 못한 채 보내 착잡했을 것”

‘땅’ 마지막 50회 방송 예정일에 삼우제
“제목 ‘하나되는 땅’ 좋아했는데…” 오열
‘오랜 술친구’ 김지하 시인 애도시 바쳐

1991년 11월26일 대하드라마 <땅> 제작진은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위원장 권영길)에서 제정한 ‘민주언론상’을 최초로 수상하며 강제종영의 회한을 뒤늦게나마 위로받았다. 김기팔 작가는 와병 중이어서 연출가 고석만(오른쪽 둘째)과 탤런트 최낙천(가운데)·김소원(왼쪽 둘째)·최명수(맨왼쪽) 등 출연자 대표들만 시상식에 참석했다. <한겨레> 사진.
1991년 11월26일 대하드라마 <땅> 제작진은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위원장 권영길)에서 제정한 ‘민주언론상’을 최초로 수상하며 강제종영의 회한을 뒤늦게나마 위로받았다. 김기팔 작가는 와병 중이어서 연출가 고석만(오른쪽 둘째)과 탤런트 최낙천(가운데)·김소원(왼쪽 둘째)·최명수(맨왼쪽) 등 출연자 대표들만 시상식에 참석했다. <한겨레> 사진.
작가 김기팔. 그의 창조의 원천은 어디인가? ‘의심’으로부터 샘솟는다고 본다. ‘의심, 의문, 의심의 철학’이다. 모두가 정답이라고 확신한 것을 의심했다. ‘왜 나쁜 놈은 잘사는가’, 우리에게 인간과 삶을 곱씹을 계기를 안겨준 스승이었다. 마르크스는 ‘역사’를, 니체는 ‘신’을, 프로이트는 ‘인간의 의식’을, 하이데거는 ‘존재’를, 사르트르는 ‘타인’을, 베냐민은 ‘예술’을, 그리고 아렌트는 ‘정치’를 의심했듯이… 그는 ‘의심의 철학’으로 무장했다.

그런 김기팔이 아파서 누워 있다. 우리는 그의 회복력을 항상 믿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의 이름 ‘기팔’(起八)을 놓고 숫자 맞추기를 할 때마다 웃었다. 그러기로 하면 70전80기도 부족하다. 그에게 ‘대장암’이 선고되었다. 그가 지금 당장 해야 할 일들이 많다. 못다 한 이야기들이 많다. <땅>도 부활시켜야 하고, 오래전부터 얘기 나눴던 ‘제이슨 리’도 기다리고 있고, 얼마 전 구상의 일단을 들려주었던 ‘형제’. 기획 도중 정지된 ‘아리랑’도 그가 아니면 쓸 작가가 누군가.

한림대 강동성심병원에서 수술 날짜와 시간이 정해지고, 수술실에 들어가기 직전, 작가는 아끼는 후배인 성우 이완호에게 연필과 종이를 찾더니 몇자 적었다고 한다. 흔들리는 글씨로 “내가 왜 이렇게 된지 모르겠다.”

수술은 잘되었다고 한다. ‘수술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의사를 본 적이 없다. 그런데 더 아프다. 진통제를 더해도 아프다. 그 다음날, 그 다음날도 아프다. 병원에서는 잘 잡수시고 운동을 하란다. 아파 죽겠는데 운동만 하란다. 사흘째 되는 날, 노희엽 교수의 아들인 의사 노 박사가 찾아왔다. 이 병원으로 온 것부터 양아들로 여기던 노 박사 때문이었다. 노 박사는 아프다는 김 작가의 부푼 배를 만져보더니 질겁을 하며 응급수술실로 옮겼다. 몸집이 비대하여 생긴 현상으로만 알던 의료진은 곧 재수술에 들어갔다. 다시 응급실로 내려왔을 때는 이미 의식이 없었다. 열었더니 안에서 다 터져 손도 못 대고 곧 닫았다고 한다. 부인은 가슴을 감싸안고 오열하고 있었고, 처형은 의사의 멱살을 잡고 울부짖었다. 나는 식어가는 그의 손을 꼭 쥐고 있었다. 사탄은 마지막 힘을 다해 죽음을 맞는 영혼을 흔든다. 영혼의 구원을 위해….

작가 김기팔이 1991년 4월26일 드라마 <땅> 강제종영에 항의해 절필선언을 할 즈음의 모습으로 생전 마지막 사진인 셈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작가 김기팔이 1991년 4월26일 드라마 <땅> 강제종영에 항의해 절필선언을 할 즈음의 모습으로 생전 마지막 사진인 셈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돌아가셨다. 1991년 12월24일 밤. 향년 54. 본명 김용남. 삼일장을 모시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다. 이 땅의 뜻있는 사람들의 ‘촛불광장’ 같았다. “기억하자! 항의하자! 살아나가자!”

<동아방송>에서 김 작가와 같이 근무했던 김학천 동지가 추도사를 썼다.

“한 시대가 분노할 줄 아는 작가를 가졌다는 것은 축복에 속합니다. 순박한 민중에게 비록 행간을 이용해서라도 전해야 할 사연을 전하고 미소짓게 할 수 있는 작가를 지녔다는 것 또한 축복입니다. 비록 그것이 간단없이 끊겨 토막 쳐진 줄거리라 하더라도 작가가 고통스러운 시대의 증언을 적는다는 게 얼마나 힘든 용기인가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더구나 텔레비전이라는 대중매체를 통하여 압축된 언어로 증언의 핵심을 전하려 한 작가정신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70년대 <동아방송> 라디오의 인기 다큐 드라마 <정계야화>를 집필하던 시절 스튜디오에서 안평선 피디(왼쪽)의 연출 장면을 김기팔 작가(맨 오른쪽)가 지켜보고 있다. 사진 블로그 ‘춘하추동방송’ 제공
70년대 <동아방송> 라디오의 인기 다큐 드라마 <정계야화>를 집필하던 시절 스튜디오에서 안평선 피디(왼쪽)의 연출 장면을 김기팔 작가(맨 오른쪽)가 지켜보고 있다. 사진 블로그 ‘춘하추동방송’ 제공
기팔 형, 그런 일을 해내다 말고 나이 쉰다섯에 느닷없이 붓을 놓다니요. 1970년대 중반, ‘유신’이 극성을 떨던 때 형께서 줄기차게 들려주던 저 <동아방송>의 드라마 <정계야화>가 바야흐로 4·19 전날에 이르러, 마지막 대사가 “…권력이란 무엇인가. 한번 쥐면 그토록 놓기 싫은 것인가. 그럼 내일 계속하겠습니다”까지 왔을 때였죠. 역사가 두려운 사람들이 드라마를 거기서 중단하도록 억압하여 방송국은 풍비박산이 되고 작가에게도 그 ‘내일’이 없어졌을 때, 형께서는 감연히 붓을 꺾고 70년대가 다 가도록 시장판에 단추 장수로 나섰던 일을 기억합니다. 그걸로 돈을 벌었다는 소문을 들은 일이 없고, 술만 늘었다는 소식이 우리를 안타깝게 했습니다.

한창나이인 30대 후반에서 40대 초까지 돈과 명성을 던져버린 채 성내고 있던 모습에 우린 마주하기조차 민망한 세월을 살았습니다. 그러니 그 뒤에 다시 붓을 들고서도 계획대로 끝맺음한 작품보다는 시달리다 중단한 작품이 많음은 당연한 귀결이겠지요. 하지만 달라진 것은 우리가 그 드라마를 끝까지 다 본 것 같은 넉넉한 느낌으로 당신을 대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정계야화>, <야망의 25시>, <제1공화국>, <땅> 등이 유독 부대낀 작품인데도 당신은 늘 어눌한 표정으로 주변의 고생하는 사람들을 위로할 뿐 스스로의 고통을 입에 담는 일이 없었습니다. 주변에서는 선이 굵은 현실 드라마의 사실성을 추구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곧 속아서는 안 되는 ‘속임수의 역사’와 대결했을 뿐, 자잘한 속물들의 얘기는 모두 가지 쳐버린 까닭이 아니겠습니까.

기팔 형, 하기 힘든 그런 시대의 증언과 고발을 머릿속에 챙기다 말고 느닷없이 눈을 감다니요. 아직도 지켜보아야 할 일들이 산적해 있는데 혼자 술집에라도 들어가듯 훌쩍 떠나다니요.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모든 미련, 분노, 서글픔을 다 우리에게 미루고 평안한 명복을 누리시구려.”

삼일장 내내 꼼짝 않고 한자리를 지키며 훌쩍거리는 노인이 보였다.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노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뉘신데 이렇게 섧게 우시냐고. 그가 말했다. “팬입니다. 인천에 사는, 그냥 팬입니다”

1950년대 후반 중앙고생 김기팔와 고려대생 최창봉으로 처음 만난 두 사람은 1960~70년대 <동아방송>에서 작가와 피디로 활약한 각별한 사이였으나 91년 <땅>의 강제 폐지 이후 끝내 화해하지 못했다. 최창봉(왼쪽)은 56년 한국 최초의 텔레비전 방송 <HLKZ TV> 개국 때 드라마 <사형수>를 연출해 ‘방송 프로듀서 1호’로 기록됐다. 사진 블로그 ‘춘하추동방송’ 제공
1950년대 후반 중앙고생 김기팔와 고려대생 최창봉으로 처음 만난 두 사람은 1960~70년대 <동아방송>에서 작가와 피디로 활약한 각별한 사이였으나 91년 <땅>의 강제 폐지 이후 끝내 화해하지 못했다. 최창봉(왼쪽)은 56년 한국 최초의 텔레비전 방송 개국 때 드라마 <사형수>를 연출해 ‘방송 프로듀서 1호’로 기록됐다. 사진 블로그 ‘춘하추동방송’ 제공

<문화방송> 최창봉 사장이 부하 직원들을 우 몰고 문상을 왔다. 문상을 끝낸 뒤 직원들에게 먼저 돌아가라 이르더니, 늦은 시간까지 홀로 지키고 앉아 있었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할까? 김기팔이 중앙고등학교에서 연극 <김성수>의 희곡을 쓰고 공연을 준비하고 있을 때, 고려대 연극반 선배 최창봉이 연출을 맡아 인연을 만들었다. 그때부터 두 사람의 인연은 깊었고 참으로 돈독했다. 그런데 주변에서는 언제부터인가 소원함을 감지했다. 최창봉이 <동아방송>을 떠나 <한국방송> 부사장으로 옮긴 다음부터다. 그때부터 김종필과 최창봉이 나란히 앉아 있으면, 참 많이 닮았다는 얘기가 들려왔다고 했다. <문화방송>에서의 서먹서먹한 관계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터이다. 형제보다 가까웠으면서 단 한번의 연락도 하지 않은 두 사람. 그 세월이 어떠했는지 남들은 모른다. 이제, 화해 없이 갈라지게 된 김기팔과 최창봉. 두 사람이 해야 할 얘기가 많을 것이다. 최 사장은 그날 밤 참으로 착잡했을 것이다.

12월27일. 삼우제 날. 경기도 포천 언덕엔 진눈개비가 흩날리고 있었다. 가족과 친지들만 단출하게 예를 갖추었다. 오늘은 바로 <땅>이 제대로 나갔다면 마지막 50회 ‘하나되는 땅’이 방송되는 날이다. 일년 전, 김 작가와 함께 매회 부제를 붙이기로 했었다. ‘오늘의 땅’부터 시작해 매회 특징적 제목을 명명하며 즐거웠다. 우리는 특히 마지막 회 제목을 ‘하나되는 땅’이라 정하며 참 좋아했다. 통일된 땅을 그려보자 했다. 그것이 꿈이라 해도 잘 그려보자 했다. 임종부터 지금까지 줄곧 옆을 지키며 눈물 한 방울 나지 않더니, ‘하나되는 땅’을 떠올리며 많이 울었다.

1991년 4월말 드라마 <땅>이 폐지되자마자 고석만은 출장 명령에 따라 3개월간 유럽과 중국 등으로 ‘국외 유배’를 돌아야 했다. <김산의 아리랑> 등 새 작품 구상을 안고 귀국한 그는 작가 김기팔의 임종을 지켜야 했고, <땅>의 마지막 회 방송 예정일이었던 12월26일 삼우제를 올리며 끝내 오열했다.  사진 그해 7월 중국 연변에서 백두산을 오르고자 장백산 입구에서 찍은 것이다.
1991년 4월말 드라마 <땅>이 폐지되자마자 고석만은 출장 명령에 따라 3개월간 유럽과 중국 등으로 ‘국외 유배’를 돌아야 했다. <김산의 아리랑> 등 새 작품 구상을 안고 귀국한 그는 작가 김기팔의 임종을 지켜야 했고, <땅>의 마지막 회 방송 예정일이었던 12월26일 삼우제를 올리며 끝내 오열했다. 사진 그해 7월 중국 연변에서 백두산을 오르고자 장백산 입구에서 찍은 것이다.
‘오랜 술친구’ 김지하 시인도 이 글을 바치며 많이 울었을 것이다. 93년 2주기 때 세운 ‘김기팔 추모비’에도 새겨진 글이다.

“밤새 뜬눈으로 지새다 신새벽에 돌아가셨다/ 밤새 사악한 무리를 질타하고 한 품은 이들을 달래시던 님은/ 민주와 통일의 먼동이 틀 무렵 기어이 돌아가셨다/ 그리시던 북녘 고향 저만큼 보이는 이곳에서 님이시여/ 아직도 온전히 걷히지 않은 어둠을 지켜 끝내는 다가올/ 찬란한 대낮으로 증거하시라”

기획·진행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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