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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방송·연예

“한달간 ‘음주면접’ 끝낸 김기팔 ‘시대의 첨병 돼라’ 했다”

등록 2018-02-24 10:03수정 2018-02-24 17:24

[길을 찾아서] 고석만의 첨병 ⑦ ‘작가 김기팔을 만나다
고석만(오른쪽)과 김기팔(왼쪽)은 1981년 1월 드라마 <제1공화국>의 연출자와 작가로 처음 만난다. 매개자는 80년 신군부의 낙하산을 타고 문화방송에 입성한 ‘실세 사장’ 이진희의 ‘킬러 콘텐츠 전략’이었다. 처음 한달 동안 매일 술을 마시며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91년 김 작가가 별세할 때까지 꼬박 10년간 각별한 인연을 맺는다. 사진은 1982년 9월 ‘퉁명스런 마누라와 싹싹한 서방’이란 제목으로 실린 <엠비시 가이드>의 인터뷰 장면이다.
고석만(오른쪽)과 김기팔(왼쪽)은 1981년 1월 드라마 <제1공화국>의 연출자와 작가로 처음 만난다. 매개자는 80년 신군부의 낙하산을 타고 문화방송에 입성한 ‘실세 사장’ 이진희의 ‘킬러 콘텐츠 전략’이었다. 처음 한달 동안 매일 술을 마시며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91년 김 작가가 별세할 때까지 꼬박 10년간 각별한 인연을 맺는다. 사진은 1982년 9월 ‘퉁명스런 마누라와 싹싹한 서방’이란 제목으로 실린 <엠비시 가이드>의 인터뷰 장면이다.

▶ <한겨레>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 21번째 주인공은 고석만 프로듀서다. 1973년 <문화방송>(MBC)에 입사한 이래 그는 30여년간 숱한 화제작을 제조했다. ‘정치드라마의 대부’ ‘스타 피디 1세대’ 같은 명성과 더불어 ‘문제 피디’라는 시비도 따라다녔다. 특히 ‘공화국 시리즈’와 ‘재벌 시리즈’는 한국 사회의 가장 민감한 환부를 정면으로 드러낸 까닭에 대부분 ‘조기 종영’을 해야 했다. 끝내지 못한 드라마의 숨은 이야기들을 ‘고석만의 첨병’에서 마침내 직접 털어놓는다.

광주학살, 언론 통폐합, 1980년의 방송가는 먹구름에 짓눌려 있었다. <문화방송>도 불안 속에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 때, 감사원 감사가 들이닥쳤다. 6층 회의실에 무려 20여명이 진을 쳤는데, 넓은 회의실의 의자와 회의 탁자들을 뒷문 쪽에 바리케이드 쌓듯 밀어놓고, 넓은 방 가운데를 텅 비운 다음 그들은 벽을 등지고 삥 둘러앉았다. 누구라도 그 방에 들어서면 20여개의 총구를 마주하고 선 사형수 같은 공포를 느꼈으리라.

1980년 광주학살·언론통폐합 먹구름
‘문화방송’에도 감사원 ‘표적감사’ 태풍
바람처럼 ‘낙하산 사장’ 이진희 입성
‘전두환 대권 대망론’ 첫 공론화 ‘공신’

차장급 이상 전간부 사표…80명 해고
“전사원 10% 대학살에도 항의 없어”

‘개혁칼날’ 이 사장 “킬러콘텐츠 만들라”
1981년 1월 ‘제1공화국’ ‘쇼2000’ 낙점

정동 다방에서 처음 만난 작가 김기팔
뒷모습 보고 ‘커다란 꿀돼지’ 떠올려

“서른세살? 아니 애가? 정치 뭘 알아?”
훗날 ‘고석만 애늙은이 만들었다’ 회한

전 부서가 감사에 들어갔다. 여기저기서 한두명씩 불려 갔다 왔다. 갔다 온 사람들은 모두 질려 있는 기색이었다. 문화방송으로서는 초유의 경험이었다. 법적으론 감사원 감사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놓고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도 없었고 쉬쉬하는 분위기였다. 하루 이틀 사흘쯤 지나면서 오래된 선배들은 떨고 있다는 걸 느꼈다. 눈도 마주치지 않고 떠다니는 우주선의 진공 상태 같았다.

‘서 있다고 생각하는 이는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일반적인 행정감사라면서 재무·경리 인사까지 다 뒤져보더니, 공사 담당도 불려 갔다고 전해왔다. 회의실의 전구알까지 다 세더니 조목조목 대답하자, 감사원이 앉아 있던 뒷벽을 못으로 뿍 긋더란다. 페인트칠의 횟수와 농도를 따지는 데 꼼짝할 수 없이 인정하고 말더란다. 시중 얘기론 감사 막판에 털어도 털어도 안 나오면 토목 파트가 나서서 아스팔트를 뚫는다고들 했다. 흙, 모래, 자갈의 깊이와 농도를 재면 안 걸리는 토목공사가 없다잖은가? 그런 격이었다. 한국 사회 어디에서도 보이는 현상이었다.

1980년 ‘5·17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의 5공화국 정권은 11월30일까지 ‘동아방송·동양방송’을 ‘한국방송’으로 흡수시키는 등 모두 19개 신문·방송을 없애는 ‘강제 언론통폐합’을 감행한다.  하지만 경향신문·문화방송 사장 이진희는 이미 7월 취임하자마자 간부급 80여명을 잘라내며 ‘언론대학살’의 선두에 나섰다.
1980년 ‘5·17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의 5공화국 정권은 11월30일까지 ‘동아방송·동양방송’을 ‘한국방송’으로 흡수시키는 등 모두 19개 신문·방송을 없애는 ‘강제 언론통폐합’을 감행한다. 하지만 경향신문·문화방송 사장 이진희는 이미 7월 취임하자마자 간부급 80여명을 잘라내며 ‘언론대학살’의 선두에 나섰다.
급기야 가요 담당 피디들까지 불려갔다. 방송의 질적인 부분까지 인과관계를 걸어 감사하기 시작했다. 간부급 대부분을 포함하여 200여명이 호출당했다. 열흘 넘게 난리를 피우더니 어느날 썰물처럼 싹 빠져나갔다. 그 뒤 아무도 감사에 대해 언급하는 사람이 없었다. 소문으로만 흉흉하던 ‘표적감사’였다. 하지만 훗날 ‘5공 청문회’ 때도 감사원은 이때 감사를 정당했다고 반박했다.

감사원이 빠져나가고 문화방송은 공허했다. 헛발을 딛는 분위기였다. 그리고 일주일쯤 지났을 때, ‘낙하산 사장설’이 나돌았다. 이진희다. 그도 그럴 것이 엊그제 <서울신문> 1면 가로 상단을 꽉 채운 특별 시론을 쓴 사람이 이진희 논설위원이었다. 사설의 내용인즉, 신군부의 최초 노출이며 전면 진출의 당위성을 설파한 것이다.

동아일보 기자로 출발한 이진희는 서울신문 주필이던 1980년 2월 ‘대통령중심제는 현명한가’, 4월 ‘역사의 무대는 바뀌고 있다’ 등 노골적인 ‘추앙 시론’을 통해 신군부의 5공화국 집권 공신이 됐다.
동아일보 기자로 출발한 이진희는 서울신문 주필이던 1980년 2월 ‘대통령중심제는 현명한가’, 4월 ‘역사의 무대는 바뀌고 있다’ 등 노골적인 ‘추앙 시론’을 통해 신군부의 5공화국 집권 공신이 됐다.

1980년 7월 사장설이 바람처럼 불더니, 이진희는 바람처럼 부임했다. 문화방송에 첫발을 딛는 날, 그는 현관에서 사장실까지 진입하는 동안 아무하고도 악수를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인사를 받지 않았다고 한다. 사장실에 본부장급 이상 간부들이 쭉 뒤따라 들어와 뭔가를 하명받거나 예를 갖추려 나란히 섰는데, 한마디도 없이 사장실을 휙 둘러본 뒤 퇴청했다는 거다. 그리고 그 다음날 차장급 이상 전 간부의 사표를 받기에 이른다. 문화방송에는 전운이 감돌았다. 불안한 나날이 흐르고, 드디어 현관에 방이 붙었다. 기술이사 한명만 남기고 이사급 전원 사표 수리. 다음날 국·부장급 10여명의 해임. 또 그 다음날 보도를 중심으로 관리와 제작 50여명 해임. 그날엔 현관에 방으로 붙이지 않고 아예 책으로 나왔다. 도합 80여명 해임. 그때 전직원이 800명 남짓이니 10분의 1이 하루아침에 해고된 것이다.

문화방송의 ‘80년 대학살’은 군사작전처럼 진행되었다. ‘사람들은 어떤 의미에서 모두 내쫓긴 존재들이다.’ 획기적이다. 그러나 그때나 그 뒤에도 항의하거나 소송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렇게 인사 청산, 구조조정, 기본체제, 회사 로고, 사규, 서류 양식 등등 아주 기본적인 것의 정비를 6개월에 걸쳐 치러낸다. 라디오 20년, 티브이 12년의 기초를 뒤집은 것이다.

이진희(오른쪽)는 경향신문·문화방송 사장으로 취임한 직후인 1980년 8월11일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왼쪽)과 직접 단독 인터뷰를 진행해 방송했다. 1979년 ‘10·26’ 이래 장막 뒤에 숨어 있던 전두환의 ‘집권 야욕’을 처음 공론화한 이 방송을 계기로 이진희는 5공화국 내내 실세로 승승장구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이진희(오른쪽)는 경향신문·문화방송 사장으로 취임한 직후인 1980년 8월11일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왼쪽)과 직접 단독 인터뷰를 진행해 방송했다. 1979년 ‘10·26’ 이래 장막 뒤에 숨어 있던 전두환의 ‘집권 야욕’을 처음 공론화한 이 방송을 계기로 이진희는 5공화국 내내 실세로 승승장구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이진희는 이제 프로그램에 손대기 시작한다. 또 비상이 걸린 거다. 편성 전면개편! 태스크포스(TF)를 만들고 아이디어를 몇번씩 브리핑받았다고 한다. 체질적으로 중간 간부는 위아래 눈치를 봐야 하고, 사장은 한군데만 보면 된다. 사장은 자기 카드를 꺼낸다. 기본편성의 가로 줄긋기 폐지와 요일별 장벽 파괴, 그리고 꼼꼼하게 프로그램의 내용 개선을 요구했다. 오랜 타성을 깼다.

그때 제도로 장치된 것이 ‘프로그램 품평회’다. 이 제도는 훗날까지 문화방송의 자랑거리가 되었다. 주간 단위의 ‘엠비시 프로그램 품평회’는 신랄하기 그지없었다. 심의실장의 분석 발표에 해당 국장들의 해명보고가 이어진다. 보고 도중 사장이 일방퇴장이라도 하면, 그 국장은 곧 경질되고 만다.

1981년 봄 개편은 시작부터가 혁명적이었다. 뜻있는 몇몇 피디는 개편의 속내음를 맡으며 매일매일이 신선했다. 정권이 부당하여 싫어도, 그 정권의 낙하산 사장이라 경멸해도, 지금의 사장 개혁노선엔 내심 찬성이다. 왜 그랬을까? 그의 젊은 시절 꿈이 영화감독이었다지 않은가. 뒷날 보니 지혜도 감각도 있었다. 드디어 긴 회의 끝에 봄철 개편 작업의 마무리가 논의된단다. “대표 프로그램을 드라마에 하나, 쇼에 하나씩을 두자”는 사장의 제안. 이른바 킬러콘텐츠 작전이다. 방송 편성과 경영에 획기적인 개념 도입이었다. 그때 태어난 프로가 <티브이 정계야화>(‘제1공화국’의 원제)와 <쇼2000>이다.

1981년 3월 봄 개편부터 이진희 사장의 ‘킬러 콘텐츠 작전’을 대표하는 오락 프로그램 등장한 ‘쇼2000’의 로고.
1981년 3월 봄 개편부터 이진희 사장의 ‘킬러 콘텐츠 작전’을 대표하는 오락 프로그램 등장한 ‘쇼2000’의 로고.
1981년 3월 ‘쇼2000’ 초대 엠시를 맡은 탤런트 이덕화는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로 바뀐 뒤 91년까지 10년간 장수 진행자로 인기를 누렸다.
1981년 3월 ‘쇼2000’ 초대 엠시를 맡은 탤런트 이덕화는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로 바뀐 뒤 91년까지 10년간 장수 진행자로 인기를 누렸다.

1981년 3월 시작한 ‘쇼2000’의 첫번째 여성 엠시는 탤런트 정애리였다. 그뒤 미스코리아 출신 김성희, 탤런트 김청 등 시대를 대표하는 ‘청춘 스타’들이 물려받았다.
1981년 3월 시작한 ‘쇼2000’의 첫번째 여성 엠시는 탤런트 정애리였다. 그뒤 미스코리아 출신 김성희, 탤런트 김청 등 시대를 대표하는 ‘청춘 스타’들이 물려받았다.

81년 1월 하순. 드라마반의 표재순 반장이 날 부른다. 같이 어디 좀 가잔다. 3층 제작부 사무실을 나서 계단을 내려서며 불쑥 “이번 정치드라마 연출을 맡기기로 했다”. 무슨 소린가? 정치드라마 연출? 최근 이대섭 제작부장의 달필로 쓰인 ‘티브이 정계야화’ 시놉시스를 지나치며 보았지 않았던가? 대작 중에 대작이구나! 이런 작품을 우리 방송에서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놀라고 있던 터에, 그 간판 프로를 나한테 맡겨? 정문을 나서 좁은 앞길을 건너며 툭 한마디 건넨다. “작가 김기팔을 만날 거야.” 난 김기팔 작가를 본 적이 없다. 이름만 들어온 ‘김기팔’. 정치드라마의 대가. 그는 작품처럼 날카롭고 곧게 서 있고 빠짝 마른… 탤런트 박종관처럼 생겼을 거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정동 문화방송 정문 앞 30m 거리에 있는 ‘구미’라는 다방 앞에서 표재순 반장은 나를 힐끗 보더니 문을 밀고 들어섰다. 다방은 어둑했다. 반 칸막이 4인용 테이블로 둘러싸인 담화하기 좋은 다방 겸 경양식집. 손님 없이 한산하고 조용했다. 중간쯤 자리에 그가 뒤돌아 버티고 앉아 있는데, 어? 웬 ‘커다란 꿀돼지’가 있나 했다.

표 반장이 주춤거리며 “인사드려” 한다. “안녕하십니까? 고석만입니다.” 그는 버티어 앉은 자세로 나를 올려다보며 껌뻑껌뻑하더니 “몇살이야?” “서른세살입니다.” “아니 애가?” 표 반장도 어쩔 줄 모르고 멀쑥이 서 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정치에 대해서 뭘 알아?” “정치에 대해선 잘 모르고요. …저희 아버지가 국회의원에 나왔다가 떨어진 적이 있는데 그때 옆에서 좀 본 적이 있어요.” “그래? 언젠데?” “4·19 직후 7·29선거 때요.” “어 엉?” 그는 곧 희색이 만면해지고, 그때를 놓칠세라 표 반장은 “어, 어, 그럼 얘기들 해. 앉아 앉아” 하고는 서둘러 나가버렸다.

난 조심스레 맞은편에 앉고 두 사람의 어색한 시선이 오고 가고, 오고 가고…, 그로부터, 두 사람의 만남은 정례화되었다. 매일 오후 2시에 만나면 저녁 8시까지 맥주 4홉들이 큰 병으로 12병에, 내 몫으로 콜라 한 병 다 비울 때까지 온갖 얘기를 나누었다. 의심의 철학을 기반으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역사, 우주에서부터 개인사까지….

본명 김용남, 평양 출생, 한국전쟁 때 피난 내려와 충남 공주에서 중학교 다닌 뒤 고등학교는 서울로 올라와 중앙고 입학. 이때 만난 최불암(최영한)과 연극반에서 같이 활동했다. 당대 ‘중앙’의 세 친구 ‘김기팔·최불암·김종인’은 이 시대의 ‘진보주의·현실주의·기회주의’를 대표하는 상징적 캐릭터 아닌가? 선생은 ‘칠전팔기’(七顚八起)에서 따와 ‘기팔’(起八)이라 필명을 짓고, 서울대 철학과 1학년 때인 1960년 <한국방송>(KBS) 드라마 공모에서 ‘해바라기 가족’으로 당선돼 100만원 상금으로 친구들에게 원 없이 술 사주고 다녔단다. 그 시절 100만원이면, 요즘 1억원 가치(?). 그 뒤 <동아방송>의 라디오 프로그램 <정계야화>로 명성을 만방에 날리고 절필하기까지 선생의 칠전팔기는 끝없이 펼쳐졌다. 그 중심엔 항상 ‘민주주의’가 똬리를 틀고 있었다.

이진희 사장의 ‘킬러 콘텐츠 작전’을 대표하는 드라마로 기획된 ‘제1공화국’의 원제는 ‘티브이 정계야화’였다. 김기팔 작가가 1970년부터 5년간 집필했던 동아방송(DBS) 라디오의 다큐 드라마 ‘정계야화’의 영상 버전인 셈이었다. 봄 사진은 72년 2월 ‘정계야화’ 방송 500회 녹음 기념 자축연 때로, 앞줄 맨오른쪽이 김기팔, 맨왼쪽은 ‘이승만 역’으로 이름났던 성우 구민이다. 블로그 ‘춘하추동방송’ 제공.
이진희 사장의 ‘킬러 콘텐츠 작전’을 대표하는 드라마로 기획된 ‘제1공화국’의 원제는 ‘티브이 정계야화’였다. 김기팔 작가가 1970년부터 5년간 집필했던 동아방송(DBS) 라디오의 다큐 드라마 ‘정계야화’의 영상 버전인 셈이었다. 봄 사진은 72년 2월 ‘정계야화’ 방송 500회 녹음 기념 자축연 때로, 앞줄 맨오른쪽이 김기팔, 맨왼쪽은 ‘이승만 역’으로 이름났던 성우 구민이다. 블로그 ‘춘하추동방송’ 제공.
1963년 4월 개국한 동아방송(라디오)은 신군부의 언론통폐합에 따라 80년 11월 30일 마지막 방송을 내보낸 뒤 한국방송에 흡수됐다. 이 때문에 75년 절필했다가 80년 4월 부활된 ‘정계야화’를 다시 집필했던 김기팔은 7개월만에 또한번 ‘강제 폐지’의 좌절을 겪어야 했다.
1963년 4월 개국한 동아방송(라디오)은 신군부의 언론통폐합에 따라 80년 11월 30일 마지막 방송을 내보낸 뒤 한국방송에 흡수됐다. 이 때문에 75년 절필했다가 80년 4월 부활된 ‘정계야화’를 다시 집필했던 김기팔은 7개월만에 또한번 ‘강제 폐지’의 좌절을 겪어야 했다.
1981년 1월말 고석만 피디를 처음 본 순간 ‘어리다’고 실망을 드러냈던 김기팔 작가는 한달간 음주면접을 거친 뒤 ‘제1공화국’을 맡겼다.
1981년 1월말 고석만 피디를 처음 본 순간 ‘어리다’고 실망을 드러냈던 김기팔 작가는 한달간 음주면접을 거친 뒤 ‘제1공화국’을 맡겼다.
우리는 새 정치드라마의 제목을 <제1공화국>이라 정하고, 그 주인공을 ‘민주주의’로 하기로 마음을 모았다. 그리고 시대의 첨병이 돼라 하셨다. 전장에서 정글을 헤쳐 나가는 첨병처럼, 새로운 민주주의의 길을 간다는 것은 경이로움이었다. 첨병이 가는 길의 발자국을 뒤에 오는 무리들은 밟고 따른다. 첨병은 지형지물을 읽어내야 한다. 첨병은 ‘부비트랩’을 동물적 감각으로 알아차려야 한다. 첨병의 의지와 시야는 먼 곳을 보아야 한다. 첨병은 먼저 죽을 각오를 해야 한다.

“민주주의!” 생각만 해도 두근거리는 주인공을 탄생시키고 있었다. 세상사 모든 이야기를 기탄없이 했다. 더 이상 대화가 필요 없을 만큼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실제로 언어 이전에 느낌으로 통했다. 그 뒤에도 선생과는 작품 해석 논쟁을 해본 적이 없다. 다만 서로 간의 제안만 있을 뿐이었다. 특별한 교감이었다. 나에게 실로 새로운 세상이 열린 것이다. 탈각의 경지를 체험했다. ‘줄탁동시’(?啄同時), 어미닭이 쪼아준 껍질을 깨고 세상에 나온 병아리다.

어느날 밤, 선생은 “이제 그만 얘기하지” 하며 다음날 약속은 잡지 않고 헤어졌다. 돌아서며 생각하니 한달을 주말 없이 매일 만나 얘기 나눴다. 하루 6시간 넘게는 10시간씩, 30일이면 얼마만큼의 시간인가. 선생은 이미 한달을 다잡아 예정하고 계셨던 것이다. 1월말에 만나 벌써 2월의 마지막 날, 방송까지는 한달밖에 남지 않았다. 이제 본격적으로 역사적인 <제1공화국>을 준비해야 한다.

선생은 뒷날, 회한에 잠겨 말했다고 한다. “그때 고석만을 애늙은이 만들어버렸어.”

기획·진행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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