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운 시대를 헤쳐온 우리 국민들에게 위로가 됐으면 좋겠어요.” 6월항쟁을 다룬 영화 <1987>을 만든 김경찬 작가(왼쪽부터)와 장준환 감독, 이우정 우정필름 대표가 영화가 개봉한 다음날인 지난달 28일 서울 삼청동 국립미술관 뜰에서 만나 청와대 뒤의 북악산을 배경으로 활짝 웃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 지난 연말 개봉된 영화 <1987>이 화제를 모으고 있다. 1987년 6월항쟁을 다룬 첫 대중적 상업영화일 뿐 아니라 영화 형식에서도 기념비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즉, 한두명의 주인공이 영화를 끌어가는 보통의 형식이 아니라 다수의 주인공이 바통을 이어가며 주역을 맡는 방식이다. 게다가 관객들의 반응도 좋다. 13일까지 누적 관객수가 500만명을 넘어섰다. 영화를 만든 감독과 작가, 영화사 대표를 한자리에서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영화 <1987>은 6월항쟁을 배경이 아니라 정면으로 다룬다. 그러다 보니 많은 실존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이런 면에서는 다큐멘터리적 성격이 강하다. 그러면서도 영화적 감동이 살아 있다. 실화의 진지함과 극적인 재미라는 두마리 토끼를 잡은 감독(장준환·47)과 작가(김경찬·47), 영화사 대표(이우정·47)를 지난달 28일 서울 삼청동의 카페 ‘라디오엠’에서 한자리에서 만났다.
“이한열 열사가 쓰러지는 장면에서는 신파든 국뽕이든 무슨 말을 붙이든 간에 ‘같이 울어주세요 좀’이라는 생각을 했다”고 <1987>의 장준환 감독은 말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영화를 보고 감동받았다는 댓글이 많더라. 에스엔에스(SNS) 반응도 좋고.
장준환(장) “댓글들이 대부분 길게 올라오더라. 당시 직접 겪은 분들은 특히 감회가 더 새로운 거 같다. 어떤 이는 아이들과 같이 봤는데 딸이 자기를 안아주면서 ‘고맙다’고 얘기하더라고 적었더라. 그런 것을 보면서 나도 눈물이 났다. 한편으로는 보람도 있고.”
김경찬(김) “사람들 가슴속의 뜨거운 것을 끄집어낸 것 같다. 2016년 겨울의 경험이 있어서 세대간 공감대도 만들어진 것 같다. 무엇보다 우리가 이 영화를 시작할 때 약속한 것을 잘 지킬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다.”
―그 약속이 뭐였나?
김 “치열하게 싸우신 분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리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영화 흥행을 위해 손쉬운 선택을 하지 말고 좀 힘들더라도 원칙대로 가자고 약속했는데 그 초심을 잃지 않은 것 같다.”
“세번의 혁명을 이룬 나라는 우리밖에 없다. 국민들이 자부심을 갖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1987>의 김경찬 작가는 말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YTN 기자의 술자리 질책이 출발점
―그동안 1980년의 광주항쟁 영화는 더러 있었는데 1987년 6월항쟁을 영화화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영화를 처음에 누가 먼저 하자고 했나?
김 “저였다. 원래는 이 대표와 사극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2015년 6월쯤 송태엽 기자(와이티엔 전주지국, 얼마 전 보도국장으로 지명됐으나 고사함)를 만나 술을 마셨다. 영화 얘기를 하다가 송 기자가 ‘영화 하는 사람들은 6월항쟁은 왜 안 만드냐’고 하더라.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 그날 밤 잠이 안 왔다. 며칠 뒤에 이우정 대표를 만난 자리에서 그 얘기를 했더니 이 대표가 자기도 마음에 담아둔 것이라면서 같이 해보자고 하더라.”
이우정(이) “나도 영화를 하면서 꼭 다뤄보고 싶었던 소재였다. 이 작가가 6월항쟁을 하자고 했을 때 동지를 만난 기분이었다.”
김 “그런데 영화를 만드려고 막상 조사를 해 보니 여태 왜 안 했는지 알겠더라.”
―무엇이 문제였던가?
김 “우선 관련된 인물이 너무 많다. 기간을 1월(박종철 열사 고문 사망)부터 6월(이한열 열사 최루탄 피격)까지로 한정하더라도 어느 인물에 집중해서 보여줘야 할지 막막했다. 이래서 다들 못 했구나 하는 것을 그제야 알겠더라. 허락받으러 이한열기념사업회와 박종철기념사업회 분들을 만났더니 ‘그동안 왔던 사람들이 아무도 성공 못 했다’면서 ‘해보려면 한번 해보세요’ 하는 분위기였다.”
이 “박종철 열사나 이한열 열사를 중심으로 하거나 그들의 전기를 만드는 식으로 접근했던 것 같더라. 그런 점에서 여러 등장인물이 나오고 모두가 주인공인 우리의 시나리오는 단점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독특한 접근이었다.”
―모두가 주인공이 되는 형식이 쉽지는 않았을 것 같다.
김 “실화를 깨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 감독도 보통 영화처럼 풀어서는 안 된다는 것에 동의하면서 본인이 하고픈 것도 그 방식이라고 했다.”
장 “그게 예술적으로나 영화적으로 도전이면서 쉽지 않은 일이다. 보통의 고전적 작법은 프로타고니스트(연극이나 영화 등에서 사건의 중심이 되는 인물)에 감정을 이입해서 그 사람을 따라가다가 카타르시스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다르다. 악의 축을 하나 놓고 많은 사람들이 부딪쳐 가면서 나중에 눈덩이와 파도가 되는, 그리고 광장에 나온 시민들이 주인공이 되는 그런 얘기 구조이다. 그것은 이 영화가 얘기하고자 하는 바와 형식이 잘 맞아서 오히려 너무 좋았다. 어렵지만 도전해보자고 처음부터 생각했다.”
“모두가 주인공인 우리의 시나리오는 독특한 접근이었다”고 <1987>의 제작자인 이우정 우정필름 대표는 말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1987>도 지구를 지키는 프로젝트”
―2015년에 6월에 영화화를 결심한 뒤 시나리오는 언제 마무리했나?
김 “7월까지는 다른 작품을 했고, <1987>은 8월에 자료 수집해서 9월부터 쓰기 시작했다. 3고까지 시나리오를 쓴 뒤 그해 12월쯤 감독이 합류했다.”
―장 감독은 어떻게 합류했나?
이 “영화 제작사를 운영하는 후배가 원래 다른 작품을 가지고 장 감독과 협의하고 있었다. 그 후배랑 친해서 이 작품(<1987>) 모니터링을 부탁한 상태였다. 장 감독이 고민 끝에 후배 작품을 거절하는 자리에서 그 후배가 <1987> 작품에 대해 물었다. 장 감독이 관심 있어 했다는 얘기를 전해듣고 내가 바로 메일로 시나리오를 드렸더니 장 감독이 만족해했다.”
―시나리오 보고 바로 연출을 맡기로 결심했나?
장 “바로는 아니었다. 이걸 보고 너무 재밌었고 독특했다. 왜 이 이야기를 그동안 아무도 안 했지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게 만들어질 수 있을까라는 걱정도 들었다. 나중에 불이익을 받는 것은 상관이 없는데 못 만들어지는 만큼 창작자한테 힘든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런 것 때문에 고민을 좀 했다. 하지만 나도 애를 낳아서 키우다 보니까 사회적인 부분에 대해 좀 더 관심이 가고, 우리 아이들에게 어떤 세상을 물려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한다. 그런 생각을 하니까 이 이야기는 꼭 해야 한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가보자는 결심이 서더라.”
―그때가 2015년 12월이었다. 박근혜 정부의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 정책이 한창일 때였다. 영화를 못 만들 수도 있다고 생각한 이유는 그런 정치 상황 때문인가?
장 “그렇죠. 당연히.”
이 “감독이 철이 없는지 쉽게 생각한 게 있었던 것 같다.(웃음) 작가님도 감독님보다 더 쉽게 생각했던 듯하다.”
김 “그렇다. 객관적으로 보면 제작 가능성이 거의 제로였던 시절이었다. 대통령이 ‘혼이 비정상’이라고 했던 시절이니까. 그런데 아무 근거는 없는데 이건 될 것 같다, 제작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왔다. 아무리 무소불위의 권력이라도 힘이 빠지는 순간이 올 것이기에 미리부터 떨지 말고 까짓것 한번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이 “내가 이 영화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했던 힘은 6월항쟁은 어쨌든 역사에서 민초들이 승리했고, 그 결과가 가장 오래 지속됐고 그 이후 상황의 초석이 됐던 혁명적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영화아카데미(11기) 출신인 장준환 감독은 2003년 블랙코미디물인 장편 <지구를 지켜라>로 데뷔했다. 그는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넘치는 <지구를 지켜라>로 대종상, 대한민국 영화대상 등 국내외의 각종 영화제에서 신인감독상을 받는 등 천재감독이라는 평을 받았으나, 흥행에는 참담하게 실패했다. 10년 만인 2013년 두번째 장편 영화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를 만들었지만, 크게 성공하지는 못했다. 아내 문소리가 감독한 <여배우는 오늘도>(2017년)에 잠깐 출연하기도 했다.
―리얼리즘에 기반한 <1987>은 그동안 장 감독이 만든 발랄하고 재기 넘치는 영화들과는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 영화 스타일이 바뀐 건가?
장 “<지구를 지켜라>나 <화이>가 미세한 현미경으로 인간을 바라보는 것이었다면 이번 작품은 약간 거시적으로 인간을 보는 느낌이었다. 다양한 인간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하면서 결국 힘이 모아진다는 부분은 유니버설한 인간에 대한 이야기여서 이전 작품들과 맥락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엉뚱한 B급 감성에 끌리는 경향이 있기도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 이야기냐, 어떤 인간의 이야기냐는 측면을 더 따진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도 사실은 지구를 지키기 위해서 만든 프로젝트라고 생각한다.”
배역 없어 출연 못한 배우들 많아
중앙대 국문학과를 졸업한 이우정 대표는 명필름 등에서 오랫동안 영화 제작 관련 일을 해왔다. 노근리 사건을 다룬 <작은 연못>(2010)을 비롯해 <고지전>(2011), <쎄시봉>(2015) 등이 그가 제작에 참여한 대표적인 작품이다. <1987>은 그가 독립해 세운 우정필름이 만든 첫 영화다.
―영화를 만들면서 배우 캐스팅과 투자 유치 가운데 뭐가 더 어려웠나?
이 “영화산업에서 원래 캐스팅이 가장 어려운 작업인데 내 입장에서는 그동안 했던 어떤 영화보다 캐스팅이 쉬웠다. 감독이 쌓아온 인덕에 기반한 것이지만, 강동원 배우가 먼저 참여 의사를 감독에게 전달해 왔다. 또 김윤석과 하정우까지 하겠다고 나서는 등 캐스팅이 순조로웠다.”
장 “나는 쉽지 않았던 과정이었다. 강동원과는 단편영화를 같이 하면서 친분이 있었다. 서로 어떤 작업을 하는지 말하기가 편해서 그에게 ‘이런 작업을 한다’고 했더니 ‘나중에 완성되면 좀 보여주세요’라고 하더라. 시나리오가 나왔는데 톱스타인 강동원이 할 배역이 별로 없었다. 박처원 역을 맡길 수도 없었고(웃음), 다른 역은 너무 작았다. 그가 한다면 ‘잘생긴 남학생’이라는 배역명을 가진 역할뿐이었다. 나중에 이한열 열사로 밝혀지는 배역인데, ‘네가 잘생겼으니까 작은 역이지만 어떨까’라고 제안했다. 그의 일정이 매우 바쁜데도 열흘쯤 뒤 연락이 와서 만났더니 ‘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영화에 폐가 되지 않으면 하겠다는 조건부였다. 자기가 너무 알려져 있는 사람이니까 혼자서만 영화에 나오면 작품에도 해가 될 것 같다고 부담스러워했다. 그러면 내게는 또다른 미션이 있는 거다. 이런 균형을 어떻게 다 맞출까 하고 걱정했는데 나중에 김윤석 선배가 완성된 시나리오를 보더니 흡족해하면서 동참하겠다고 했다. 그때만 해도 시국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태였다. 최순실 사건이 막 터지고 할 때였다. 그런 상황에서 (김윤석 선배가) ‘우리 셋이 합치면 뭐가 되지 않겠느냐’면서 형님처럼 끌어줬다. 그때 하정우 배우는 너무 쿨하게 ‘감독님 걱정하지 마세요, 이 시나리오 너무 좋아요, 재밌어요’ 하면서 용기를 줬다. 그래서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작가, 준비중인 사극 대신 제안
영화사 대표, “하고픈 소재” 동의
시나리오 본 감독도 의기투합
강동원, “작은 역” 불구 맨 먼저 결정
김윤석, “힘 합해서 해보자” 끌고
하정우도 “시나리오 좋아” 용기줘
오달수 등 “어떤 역이나 맡겠다”
―이 영화에는 설경구가 김정남 역으로 나오는 등 쟁쟁한 배우들이 워낙 많다. 저는 영화를 보면서 저렇게 호화 캐스팅을 하면 돈이 많이 들 텐데, 저분들이 일종의 재능 기부를 했나 하는 생각까지 들더라.
이 “그건 내가 힘든 부분이었다.(웃음) 원래 감독의 연출 방향이 그랬다. 등장인물이 많으니 무명 배우를 쓰면 누가 누군지 파악하는 데 시간이 걸려서 관객들이 감정이입 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설경구나 오달수 이런 분들을 작은 배역에 기용했는데 나로서는 제작비가 한정돼 있어서 고민이 좀 됐다. 하하.”
―오달수는 어떤 역이라도 맡겨달라면서 일종의 셀프 캐스팅까지 했다고 하던데?
장 “너무 감사했다. 오달수뿐 아니라 조우진, 정인기 배우 이런 분들이 다 그랬다. 그 외에도 많은 분들이 하겠다고 했는데 더 이상 맡을 역이 없어서 눈물을 머금고 그분들에게 탈락시켜서 죄송하다고 말씀드려야 했다. 시나리오의 힘, 이 영화의 취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의 의미에 배우분들이 크게 공감했던 것 같다. 그런 점이 이 영화를 하면서 또 하나 감격스럽고 감동스러웠던 부분이었다.”
“역사 변화를 이끌어낸 것은 연희나 한병용 가족 등 보통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얘기를 하고 싶었다”고 장준환 감독은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1987>에서 연희(김태리 분)가 삼촌인 교도관 한병용으로부터 비둘기(감옥에서 몰래 보내온 편지)가 든 잡지를 건네받고 있다. 씨제이이앤엠 제공
“신파든 국뽕이든 같이 울었으면”
김경찬 작가는 방송사 피디(PD) 출신이다. 1995년 <목포 문화방송(MBC)>에 입사한 그는 2008년 퇴사할 때까지 피디로 있으면서 다큐 3부작 ‘가야금', ‘섬' 등을 연출해 한국방송대상 우수작품상 등을 수상했다. 퇴사 뒤 콘텐츠 기획 및 개발을 하다가 2011년부터 영화 시나리오 작가로 본격적으로 나섰다. 마트 비정규직 노동자의 해고 반대 투쟁을 그린 <카트>(2014)가 영화화된 그의 첫 작품이다.
―<1987> 영화 제작을 비밀리에 진행했다고 들었다.
김 “우리가 시나리오 개발하고 할 때는 시절이 엄혹해서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동네방네 떠들 일이 아니었다.”
―남영동 대공분실 책임자인 박처원 처장을 죽일 놈으로만 그리지는 않고, 그 역시 남북한의 이데올로기 대립의 희생자로 그렸더라.
장 “나하고 작가하고 그 부분에 대해서 생각이 잘 맞았던 것 같다. 악당이 무서워 보여야 하는데 그러려면 ‘나 무섭지? 잔인하지?’ 해서 되는 것은 아니고 히스토리가 있는 게 더 무서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전쟁을 겪고 이념의 트라우마 때문에 왜곡된 애국심을 갖게 되고, 그것이 또다른 폭력으로 번진 인물의 히스토리를 가져오면 훨씬 더 리얼한 악당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김 “조사해 보니까 박처원은 경찰에 투신할 때부터 빨갱이를 살려둘 수 없다면서 그러한 개인사를 계속 얘기했더라. 1960년대와 70년대 그에게 잡혀가서 고문받았던 사람들을 만났더니 그가 술 마시면 꼭 그 얘기를 했다고 한다. 그의 고향(평안도 용강군) 사람들을 만나봤는데 그 얘기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쩌면 월남한 인사가 경찰에서 성공하기 위해 포장한 것일 수도 있다고 본다.”
―영화에서 유일하게 완전히 허구 인물은 김태리 배우가 연기한 연희다.
장 “실존 인물이 아니긴 한데 사실은 당시에 수많은 연희들이 있었다. 역사는 보통사람들을 기록하지 않지만, 역사 변화를 이끌어낸 것은 연희나 한병용 가족 등 그러한 보통사람들이다. 그러면서도 영화에서 연희는 여러 기능과 역할을 맡아야 했다. 이한열 스토리를 자연스럽게 끌어와야 하고, 자기 개인의 트라우마를 떨쳐내면서 극적으로 변화하는 인물이어야 하고, 그러면서도 보통사람의 시선이나 갈등을 내재하고 있어야 했다. 또 여성으로서 주체적으로 보여야 하는 부분도 있어야 했다. 그래서 시나리오 작업도 어려웠고, 실제로 연기하면서 캐릭터를 만들어갈 때도 굉장히 조심스러웠다.”
―연희 존재는 처음부터 있었나?
김 “캐릭터는 원래부터 있었는데 누구의 가족이어야 하는지는 계속 바뀌었다.”
장 “작가와 작업하다가 한재동, 전병용 두 교도관을 한병용 한명으로 합치면서 그러면 이 가족으로 넣는 것으로 했다.”
―영화에서 가장 강렬한 부분이 연세대 교문 앞에서 이한열 열사가 쓰러지는 장면이더라.
장 “두 열사 부분은 연출적으로 굉장히 신경을 많이 썼다. 나는 어떤 생각이었느냐 하면 ‘그냥 여기서는 같이 울어주세요’였다. 그래서 고속 카메라도 사용했다. 왜 이 꽃다운 나이의 젊은 청년들이 국가의 폭력 앞에 쓰러져 갔어야 됐냐는 것이 이 영화를 하게 된 강력한 요소의 하나였기에 신파든 국뽕이든 무슨 말을 붙이든 간에 ‘같이 울어주세요 좀’이라는 생각을 했다. 영화가 할 수 있는 게 뭐냐. 영화 한 편으로 세상을 바꿀 수는 없으나, 같이 화내고 울어주고 이런 게 그 시대를 살았던 많은 분들한테 그리고 우리 스스로한테 위안이 되지 않을까라고 나는 생각했다.”
―“왜 그렇게 데모를 하느냐, 그런다고 세상이 달라지는 것도 아닌데”라는 연희의 질문에 이한열이 “나도 그러고 싶지만 그게 잘 안 돼. 마음이 아파서”라고 대답하는 장면에서도 가슴이 찌르르하더라.
장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그 장면이 굉장히 크게 다가오는 것 같다. 사실 그건 제 마음 같기도 하다. 사실 그게 이 영화의 핵심이었다. 나도 가만히 있고 싶지만 마음이 아파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던 것,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움직여 광장에 있었던 이야기 전체를 함축하고 있는 부분이 아닐까 싶다. 사실은 그 얘기를 하려고 이한열 열사가 잘생긴 남학생으로 극중에 들어왔다.”
<1987>에서 남영동 대공분실 책임자인 박 처장(김윤석 분)이 기자회견에 참석해 박종철의 사망과 관련해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고 말하고 있다. 2016년 초 감독과 영화사 대표가 박근혜 정권의 문화예술 탄압 정책 때문에 배우 캐스팅을 고심할 때 김윤석은 “힘을 합해서 해보자”며 출연을 흔쾌히 결정했다. 씨제이이앤엠 제공
작가 “고3 때 이한열 쓰러진 사진 보고 충격”
―명동성당 내부를 촬영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장 “의미있는 장소에서 의미있는 촬영을 하고 싶었다. 시나리오를 드리고 촬영 요청을 드렸더니 너무 감사하게도 수락해주셨다. 촬영하면서 처음이란 것을 알았다. 영광이고, 너무 감사하다. 그런데 제일 안타까운 것은 6월항쟁 때 굉장히 큰 역할을 한 김수환 추기경을 영화에 넣어보려고 했는데 그러지 못한 점이다.”
―시청 앞 광장에서 사람들이 모여서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는 장면은 2016년 겨울의 촛불을 연상시키더라.
김 “그것을 염두에 두고 만든 장면이 아니다. 시나리오를 쓸 때는 그러한 촛불집회를 전혀 예상조차 못 했다.”
―6월항쟁 때는 뭐 했나?
이 “그때 고3이었다. 1988년에 대학에 들어왔는데 우리가 6월항쟁의 수혜를 가장 많이 받았다. 문화적으로 광장 자체가 많이 열려 있어서 대학 생활 자체가 자유로웠다. 비록 6월항쟁에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그 수혜를 받았기에 영화업을 하면서도 그 경험이 세상을 바라보는 제 관점이 됐다.”
김 “나도 그때 고3이었다. 어느 날 떨어진 신문(<중앙일보>)을 주워 들었는데 이한열 열사가 쓰러진 사진이 있었다. 그때 받았던 충격과 공포, 울분, 분노 이런 것들이 지금도 안 잊힌다. 연희가 그 사진이 실린 신문을 집어 들었을 때의 감정이 내가 그때 받았던 감정이다. 그걸 고스란히 담고 싶었다.”
장 “나도 직접 거리에 나갈 수 없는 고교생 신분이었다. 수업 중에 최루탄 냄새가 계속 날아오고 등하교 때 대학생 형과 누나들이 싸우는 것을 봤다. 광주 비디오를 처음 접한 시기였던 것 같기도 하다. 나한테도 잊힐 수 없는 한해였다.”
―이 영화를 만들면서 가졌던 바람이나 기대가 있었을 텐데.
이 “영화라고 하는 매체 또는 영화관이라는 공간이 결코 개인적인 게 아니다. 대중이 모이고, 어찌 보면 소통하는 광장이라고 할 수도 있다. 1987년의 광장은 우리한테 환희에 찬 역사의 한 순간이었다.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잘 기록한 기념물이 됐으면 좋겠다.”
김 “대한민국 현대사를 보면 세 번의 혁명이 있었다. 4·19 혁명과 87년 6월항쟁, 그리고 2016년 촛불혁명이 그것이다. 전세계를 봐도 이런 나라가 없다. 정말 국민이 위대한 나라다. 국민이 자부심을 갖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장 “나는 이 영화가 굉장히 착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우리 국민이 이렇게 훌륭하니 자부심과 용기를 가져도 된다는 생각을 나타내려고 노력했다. 물론 이 영화로만 끝나면 안 된다. 2017년에 또다른 광장이 있었듯이 6월항쟁 광장에 있었던 세대로서 왜 30년 만에 우리 사회는 이렇게 각박해지고, 아파트값은 이렇게 높은 건지 등에 대해 반성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어떻게 해야 우리가 외치고 불렀던 ‘그날’을 향해 갈 수 있을지에 대한 또다른 담론들이 나타나는 그런 확장된 고민의 시작으로 이 영화가 작용을 했으면 좋겠다는 욕심을 가지고 있다.”
★누구도 눈치채지 못한 장면 둘
#박종철 열사의 마지막 대사=박 열사가 물고문 끝에 숨져가면서 마지막 대사를 한다. 물속에서 하는 말이라 거의 들리지 않지만, 두 글자 “엄마”다. 장 감독이 촬영 현장에서 배우(여진구)에게 주문해서 들어간 대사다. 김경찬 작가는 “촬영된 필름을 보면서 분명히 엄마라고 하는 것 같아서 스태프에게 물어봤더니 맞더라. 내가 미처 안 쓴 부분인데, 추가된 대사가 비수처럼 제 가슴을 찌르더라”고 말했다.
#이한열 열사가 부른 친구 이름=이 열사가 연세대 교문 앞 시위를 하는 장면에서 그의 옆에 있던 학생 한명이 먼저 쓰러진다. 그에게 달려가면서 “주열아! 주열아!”라고 외친다.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됐던 마산의 김주열 열사를 염두에 두고 지은 이름이다. 6월항쟁이 4·19 혁명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상징하는 장면이다.
진행·정리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