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의 세월 동안 한국영화는 탁월한 작품을 낳으며 눈부시게 발전했지만 허술한 보관으로 필름을 잃어버리거나 친일 논란에 휩싸이는 등 상처로 얼룩지기도 했다. <한겨레>는 원본을 확인할 수 없는 유실 영화를 시작으로 한국영화 100년의 빛과 그늘을 짚어나간다. 일제강점기 영화들, 대중에게 사랑받았던 스타들, 조명받지 못했던 여성 영화인, 한국영화사의 사건·사고 등을 발굴해 소개할 예정이다. 첫 회는 이번 100선 선정 과정에서는 제외됐지만, 한국영화사의 온전한 복원을 위해 반드시 수집·발굴해야 하는 작품들을 다뤘다.
한국영화 자료를 수집하고 보존하는 한국영상자료원 원장이 취임 뒤 처음 출석하는 국정감사 자리에 어떤 예상 질의 답변 자료를 가지고 갈까? 시기는 달라도 바뀌지 않는 질문이 하나 있다. “<아리랑>은 못 찾나요?” 혹은 “<아리랑>은 어디 있나요?” 한국에 영화가 들어온 지 120년, 1919년 <의리적 구토>라는 연쇄극(필름으로 영사되는 영상과 연극이 합쳐진 공연 형태, 일명 키노드라마라고도 한다)을 시작으로 한국영화가 만들어진 지 100년째이고, 1960년대에는 2000년대만큼이나 한국영화가 전성기였으며, 지난 100년간 만들어진 한국영화가 거의 9400편에 이른다는 사실, 신상옥·유현목·김기영·이만희·이장호·임권택과 같은 한국영화사 거장들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아리랑>이라는 제목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만큼 <아리랑>은 마치 한국영화사의 국보이자 시원처럼 거론되어왔다. 그래서 가끔은 <아리랑>이 최초의 한국영화라 착각하는 분들도 만난다.
문제는 한국영화사의 첫번째 거목인 나운규가 주연까지 겸한 연출 데뷔작이자 민족영화의 전설로 남아 있는 <아리랑>(1926)의 필름이 남아 있지 않으며, 어디서도 다시 볼 수 없다는 사실이다. 더 놀라운 사실은 한국영상자료원이 중국의 영상자료원을 통해 일제강점기 말 조선영화 7편을 발굴한 2005년까지 한국에는 200편에 가까운 조선영화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리랑>이 문제이긴 하지만 <아리랑>만 문제는 아니었던 셈이다. 그런데 일제강점기만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 더 큰 문제다. 예컨대 1966년 이만희 감독이 연출한 한국 예술영화의 걸작 <만추>도 없다.
2013년 한국영상자료원이 한국영화 100선을 선정할 때, ‘잃어버린 한국영화 100선’을 같이 선정했는데, 여기에는 <아리랑>과 <만추>뿐 아니라, 최초의 한국영화로 인정받는 <의리적 구토>, 최초의 극영화로 인정받는 <월하의 맹서>(1923), 나운규의 몇몇 걸작들, 이규환의 <임자 없는 나룻배>(1932), 신상옥의 데뷔작 <악야>(1952), 김기영의 초기작 <10대의 반항>(1959), 유현목의 <잉여인간>(1964), 임권택의 <잡초>(1973) 등 하나하나 발견되면 한국영화사를 새로 쓸 만한 중요작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실제 한국영상자료원에 보존된 통계를 보면, 한자릿대에 불과한 일제강점기 영화의 보존율은 말할 것도 없고, 1950년대 영화가 22%, 1960년대 영화가 44%에 불과한 실정이다. 한국영상자료원이 설립된 1970년대 보존율이 84%를 넘어서게 되고, 개봉 영화를 의무적으로 제출하게 한 1996년 이후로는 거의 100%의 보존율을 보이고 있다. 말하자면 누군가 1960년대 이전 작품의 제목을 대며 자료원에 필름 존재 유무를 문의한다면 열 작품 중 세 작품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답변이 돌아간다는 의미다.
그 필름들은 다 어떻게 사라졌을까. 우선 염두에 둘 것은, 한꺼번에 최대 2천개의 스크린에 상영되는 지금으로서는 상상하지 못할 일이지만 1980년대까지만 해도 전국적으로 동시에 상영할 수 있는 필름의 복사본이 6개 내외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 소수의 필름을 개봉관, 재개봉관, 재재개봉관으로 돌리다 보니 마지막 종착 극장쯤 되면 필름은 거의 누더기가 되어 고물상에 팔리거나, 어딘가에 버려져 쓰레기로 소각되곤 했다. 힘겹게 살아남았더라도 전쟁을 거치면서 파손되거나(한국전쟁 이전 영화들), 밀짚모자의 테두리 장식용으로 조각조각 잘려나가는 운명에 처했다. 필름에 함유된 은을 추출하기 위해 녹였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전해진다.
다시 <아리랑>과 <만추>의 이야기로 돌아오자. 이 필름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제는 작고한 일본의 수집가 한분이 한때 자신이 <아리랑> 필름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여 큰 파장을 낳은 적이 있다. 이분이 작고한 뒤 대부분 영화 필름이 일본의 영상자료원에 기증되었는데, 수년간의 검수 끝에 일본 영상자료원이 내린 결론은 <아리랑> 필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한국영상자료원을 비롯한 다양한 한국의 기관과 개인이 필름을 구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이분을 접촉했던 사실을 고려하면 참 허무한 결론이었다. 현재 영상자료원은 여전히 <아리랑>을 찾고 있지만, 발굴의 희망은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만추>에 대한 정보도 있다. 제작자인 호현찬씨의 증언에 따르면 <만추>의 원본 필름은 미국에 수출했다가 반환받을 때 관세를 내지 못해 관세청에 보관되다 소각되었다고 한다. 본인의 뼈아픈 증언이니 정확할 것이다. 또한 납북되어 북한의 영상자료원(국가영화문헌고)을 방문한 경험이 있는 고 신상옥 감독의 증언에 따르면, 그곳에는 남한 영화의 별도 수장고가 있고 1970년대 이전 한국영화가 200편 이상 보관돼 있는데, 그중에 <만추>의 복사본 필름이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북한 공작원들이 영화광이었던 김정일을 위해 외국에 수출된 필름을 수집했을 것이라는 게 신상옥 감독의 짐작이다.
사실 북한의 영상자료원은 한국영상자료원 직원에게는 전설 속의 엘도라도 같은 곳이다. 목록이 공개되지 않아 어떤 작품이 얼마나 있는지 정확히 모르지만, <만추>를 비롯해 유실한 수많은 남한 작품들, <아리랑>은 아니지만 적어도 <아리랑 3편> 등 일제강점기 작품도 상당수 있다는 풍문이 있다.
2018년 이후 남북 관계가 호전되면서 남북영화교류특위가 만들어졌다. 남북영화교류특위의 첫번째 대북 제안이 북한 내 남한 영화, 혹은 일제강점기 영화의 반환 및 교류였다. 남북 교류와 협력에서 영화의 우선순위가 높지 않고, 최근 남북 관계나 북-미 관계가 급변하고 있어 성사 가능성이 높아 보이지는 않지만 이루어지기만 한다면 그 성과는 우리 영상자료원의 과거 10년 치를 능가하지 않을까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남북관계가 진일보하기를 바라는 또 다른 이유다.
조준형(한국영상자료원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