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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가련한 젊음 위로하려다, 가위질 난도당한 ‘바보들’

등록 2019-05-21 09:50수정 2019-05-21 09:57

[한겨레-CJ문화재단 공동기획]
한국영화 100년, 한국영화 100선
①바보들의 행진

감독 하길종(1975년)

한국영화 탄생 100년을 맞아 <한겨레>와 씨제이(CJ)문화재단이 한국영화사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 영화 100편을 선정했다. 숨통을 죄는 시대의 폐부를 찌른 청춘영화의 기념비이자 선정위원들로부터 가장 많은 표를 받은 작품 중 하나인 <바보들의 행진>(1975)을 첫번째로 소개한다. <한겨레>는 올해 말까지 지면과 온라인을 통해 100편의 작품을 하나씩 다룰 예정이다.

영화 <바보들의 행진>은 1970년대 청년문화와 유신 독재의 억압 속에 발버둥치는 청춘의 고뇌를 그린 작품이다. 사진은 주인공 병태가 다니는 Y대학 문리대에서 과 대항 술 마시기 대회를 벌이는 장면. 술에 취한 학생들이 비틀거리며 바늘귀에 실을 꿰는 미션을 수행하고 있다.
영화 <바보들의 행진>은 1970년대 청년문화와 유신 독재의 억압 속에 발버둥치는 청춘의 고뇌를 그린 작품이다. 사진은 주인공 병태가 다니는 Y대학 문리대에서 과 대항 술 마시기 대회를 벌이는 장면. 술에 취한 학생들이 비틀거리며 바늘귀에 실을 꿰는 미션을 수행하고 있다.
나쁜 장소, 나쁜 시간. 1975년 남한은 모든 것이 나빴다. 그해 초 또다시 유신헌법이 통과되었다. 그리고 5월 긴급조치 9호가 발동되었다. 방위세가 신설되었고, 민방위가 창설되었다. 사회는 냉전 상태가 되었다. 하길종은 자포자기가 된 것 같았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그는 매일 술을 마셨고, 술집에서 난동을 부렸고, 만나는 사람마다 “피고는 할 말이 있는가”라고 시비를 걸었다. <바보들의 행진>은 야심적인 영화가 아니라 자기비하의 영화이며, 스스로를 학대하는 영화이며, 그러면서 부끄러움에 사로잡힌 영화이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식인들을 조롱하는 영화이며, 가련한 젊음을 위로하는 영화다.

소설가 최인호는 <일간스포츠>에 철학과에 다니는 대학생 병태와 영철, 그리고 불문과에 다니는 애인 영자와 순자, 그들의 친구들을 주인공으로 한 콩트를 매주 연재했다. 대부분 우스꽝스럽고 약간 쌉쌀한 풍속도에 지나지 않는 스케치를 그려냈다. 청바지와 통기타와 생맥주라는 청년문화, 혹은 <갈매기의 꿈>과 에릭 시걸과 라즈니시가 교양인 세대. 줄거리는 느슨하고 구성은 산만하며 많은 장면은 희극적이었다. 이를테면 길거리에서 장발단속 경찰에게 쫓기는 병태와 영철의 장면에서 들리는 송창식의 노래 ‘왜 불러’. 게다가 이 영화는 거의 균형감각을 상실해서 (최인호의 표현을 빌리면) ‘내내 낄낄거리다가’ 영철이 행진곡처럼 울려 퍼지는 ‘고래사냥’을 등 뒤로 하고 동해에 가서 자살을 한 다음 갑자기 다른 영화처럼 우울해진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것은 보는 내내 사무치는 비애의 감정으로 마치 폭탄처럼 거의 폭발하기 직전까지 몰고 가는 그 슬픔의 힘이다. 만일 나쁜 세상을 폭파할 수 없다면 부끄러운 자신을 파괴하겠다는 결심. 이 승산 없는 싸움, 하지만 복종하지 않겠다는 분노가 영화 내내 장면 구석구석, 대사 행간들 사이에서 어른거린다.

1975년에 그걸 가장 잘 알아본 사람은 검열관들이었다. 그들은 가차 없이 잘라내서 <바보들의 행진>을 거의 부숴버리다시피 했다. 잘라낸 네거필름은 사라졌고 원본은 복원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이 한가지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다. 그 상처 자체가 영화에 기록된 권력의 트라우마가 되었다. <바보들의 행진>은 그 자체로 하나의 역사적 이미지가 되었다.

정성일/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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