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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분노를 노래했다, 이젠 위로를 부르련다

등록 2021-04-24 09:12수정 2021-04-24 21:20

[토요판] 커버스토리
‘노래하는 사람’ 윤선애

1980~90년대 민중가요의 디바
‘마음의 노래’ ‘민주주의의 노래’
현재와 과거 담은 두 음반 내

“음악은 마음을 표현하는 것
스스로를 위로해야 좋은 노래”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다면
보수·진보가 무슨 상관 있나”
가수 윤선애씨는 지난 19일 인터뷰에서 “누구든 위로해줄 수 있는 것, 이런 게 제 노래가 해야 할 역할이 아닌가 싶어요. 특히 좀 더 아래로, 그리고 좀 힘든 분들한테 다가가서 위로해주는 그런 작은 공연을 좀 많이 하려고 해요”라고 말했다. 의왕/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가수 윤선애씨는 지난 19일 인터뷰에서 “누구든 위로해줄 수 있는 것, 이런 게 제 노래가 해야 할 역할이 아닌가 싶어요. 특히 좀 더 아래로, 그리고 좀 힘든 분들한테 다가가서 위로해주는 그런 작은 공연을 좀 많이 하려고 해요”라고 말했다. 의왕/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봄볕 내리는 날 뜨거운 바람 부는 날/ 붉은 꽃잎 져 흩어지고 꽃향기 머무는 날/ 묘비 없는 죽음에 커다란 이름 드리오/ 여기 죽지 않은 목숨에 이 노래 드리오/ 사랑이여 내 사랑이여 음~”(‘오월의 노래’, 문승현 시·곡)

5월 광주를 이보다 더 마음 저리게 표현할 수 있을까. 솟구치는 분노를 밀쳐낸 자리에 절제된 슬픔을 사랑의 언어로 승화시킨 노래다. 이렇게 슬프고도 아름다운 작품을 문승현은 놀랍게도 1980년 5월에 만들었다. 여러 사람이 이 노래를 불렀지만, 가수 윤선애(56·이하 호칭 생략)씨가 부르는 ‘오월의 노래’는 가슴을 더 메게 한다. 그는 최근에 낸 <민주주의의 노래> 음반에도 이 노래를 담았다.

윤선애는 ‘민중가요계의 디바’로 불릴 정도로 1980~90년대 투쟁 현장에서 활약했다. 그 뒤 국악과 포크 등 장르를 넓히며 자신의 음악세계를 구축해왔다. 지난달 발표한 <강은구의 마음의 소리 14> 음반은 그 연장선에 있다. 하지만, 윤선애 음악의 뿌리는 민중가요다. 그는 지금도 ‘오월의 노래’를 가장 좋아한다. 지난 19일 오후 경기도 의왕시 백운호수 근처 한 카페에서 윤선애를 만나 음악 얘기를 들었다.

1984년 7월 제5회 엠비시(MBC) 강변가요제에 20살의 대학생 이선희가 ‘제이(J)에게’를 불러 일약 스타가 됐다. 강변가요제는 당시 대학가요제와 함께 신인가수들의 등용문이었다. “제이 스치는 바람에/ 제이 그대 모습 보이면/ 난 오늘도 조용히 그댈 그리워하네~” 그는 폭발적인 가창력으로, 애틋한 사랑을 갈구하는 청춘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두달 뒤인 그해 9월 서울대 중앙도서관 앞 광장(아크로폴리스)의 임시 연단에 19살의 대학 새내기인 윤선애가 올라 ‘민주’를 불렀다. 독재정권이 강제했던 학도호국단을 해산하고 학생 자치기구인 총학생회를 출범시키는 자리였다. “너는 햇살 햇살이었다/ 산다는 일 고달프고 답답해도/ 네가 있는 곳 찬란하게 빛나고/ 네가 가는 길 환하게 밝았다…” 그는 청아하면서도 처연한 목소리로, 민주주의에 목마른 청년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군사독재 시대가 저물어가던 1980년대가 낳은 두 뮤지션이 걸어온 길은 데뷔 무대만큼이나 다르다. 이선희가 걸출한 대중가수로서 한국 가요계에 자리를 확고하게 잡은 반면에 윤선애는 민중가요계의 디바라는 별명을 얻었음에도 지금은 대중들에게 잊히다시피 했다. 하지만 윤선애는 한번도 노래를 떠난 적이 없다. 투쟁이나 집회 현장의 무대에서 내려온 지는 오래됐지만, 자신만의 음악을 찾는 여정을 계속하고 있다. 지난달 발매한 <강은구의 마음의 노래 14>(노래듣기) 음반과 최근에 낸 <민주주의의 노래> 음반은 ‘노래하는 사람’ 윤선애의 길을 보여준다.

민중가수 출신의 윤선애씨가 지난 16일 오후 경기도 성남시 성남아트센터에서 열린 &lt;민주주의의 노래&gt; 음반 발표회에서 ‘언제나 시작은 눈물로’를 부르고 있다. 노래가 나가는 동안 무대 위 화면에는 민주화 투쟁을 벌이고 있는 미얀마 시민들의 모습이 나오고 있다. 성남/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민중가수 출신의 윤선애씨가 지난 16일 오후 경기도 성남시 성남아트센터에서 열린 <민주주의의 노래> 음반 발표회에서 ‘언제나 시작은 눈물로’를 부르고 있다. 노래가 나가는 동안 무대 위 화면에는 민주화 투쟁을 벌이고 있는 미얀마 시민들의 모습이 나오고 있다. 성남/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윤선애씨가 지난 16일 경기도 성남시 성남아트센터에서 연 &lt;민주주의 노래&gt; 쇼케이스에서 ‘그날이 오면’ 등 이번 음반에 실린 노래를 부르고 있다. 성남/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윤선애씨가 지난 16일 경기도 성남시 성남아트센터에서 연 <민주주의 노래> 쇼케이스에서 ‘그날이 오면’ 등 이번 음반에 실린 노래를 부르고 있다. 성남/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예전의 쨍쨍함 빠진 목소리가 더 편해

지난 19일 인터뷰를 위해 마주 앉자마자 윤선애는 작은 고민부터 말했다. “예전 인터뷰 때 솔직하게 얘기했더니 함께 노래했던 사람을 비롯해 주변 사람들이 다 싫어하더라고요. 약간 고민 되긴 했는데 그래도 솔직하게 얘기할래요.” 실제로 그는 과거를 포장하지도, 현재를 다듬지도, 미래를 채색하지도 않았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 속에서 편안해했다.

―지난해 코로나 사태 이후로는 공연도 못 할 텐데 어떻게 지내고 있어요?

“작은 초청 공연이나 6·10 항쟁 기념식 등에는 참가했지만, 팬들과 만나는 무대를 갖지는 못하고 있죠.”

윤선애는 지난 16일 오후 경기도 성남아트센터에서 <민주주의의 노래> 음반 발표회(쇼케이스)를 조그맣게 열었다. 경기문화재단(대표이사 강헌)이 기획 제작한 <민주주의의 노래>에는 윤선애가 부른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벗이여 해방이 온다’ ‘그날이 오면’ 등 민중가요 10곡이 수록됐다. 그가 이날 “…앞을 보라 당당히 가자/ 진실은 눈물로 피는 꽃이니/ 자유는 그 꽃을 향한 미소/ 가자 승리 위해”(‘언제나 시작은 눈물로’)라고 노래하는 동안 무대 뒤 화면에서는 군사정권에 항의해 투쟁하는 미얀마 시민들의 모습이 미얀마어 가사 자막과 함께 흘렀다. 시대와 국경을 뛰어넘는 노래의 힘이 느껴졌다.

―<민주주의의 노래> 음반을 지금 낸 이유나 의미가 있나요?

“딱히 지금이어야만 하는 이유는 없지만, 이런 작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늘 있었어요. 비합법 테이프에만 들어 있던 노래들을 정식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거든요.”

―음반 발표회 때 ‘이제 마침표를 찍었다’고 말한 게 그 뜻이군요.

“네, 그날 ‘이 노래들로 2030 젊은 세대한테 무슨 얘기를 하고 싶냐’는 질문을 받고는 너무 죄송하고 미안했어요. 젊은 사람들이 이걸 좋아할 거라는 생각은 사실 없었거든요. 그렇다고 ‘우리 이랬는데 니들 좀 들어봐’라고 꼰대짓을 하고픈 생각도 없었고요. 당시 불렀던 노래를 내 목소리로 마무리 짓고 싶었어요.”

윤선애씨가 지난 19일 &lt;한겨레&gt;와의 인터뷰 도중 “목소리에 힘을 뺄 수 있게 됐다”고 말하며 밝게 웃고 있다. 의왕/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윤선애씨가 지난 19일 <한겨레>와의 인터뷰 도중 “목소리에 힘을 뺄 수 있게 됐다”고 말하며 밝게 웃고 있다. 의왕/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노래운동 단체 ‘새벽’서 활약
김광석·안치환·권진원 등과 노래
2005년 첫 앨범 내고 가수 데뷔
포크가수 김의철 만나 노래 공부

“예전엔 분노 담아 노래 불러
이제는 유행에 휘둘리지 않고
나의 음악적 영역을 지키고파”

민중문화운동연합(민문연) 12집 <저 평등의 땅에>(1988년) 등 비합법 테이프에 들어 있는 윤선애의 목소리와 <민주주의의 노래>에 담긴 윤선애 소리는 달랐다. 과거 윤선애의 소리가 차가운 겨울 새벽 얼음이 갈라지는 소리처럼 쨍쨍했다면 현재 음반의 목소리는 여전히 맑고 곱되 각진 데 없이 부드럽다.

―같은 곡이라도 예전과는 느낌이 달라요.

“사람마다 다르게 느끼는 것 같아요. 어떤 분들은 ‘어쩜 그렇게 옛날하고 목소리가 똑같아요’라고 하고, 어떤 분들은 ‘쨍쨍하게 불렀던 옛날 노래가 훨씬 좋아’라고 해요. 특히 저랑 당시 음악활동을 같이 했던 분들은 ‘너의 매력은 지르는 거였어. 지금의 니 목소리는 뭐가 빠진 거 같아’라고 해요. 저는 지금이 좋아요. 예전에는 무대에 설 때 되게 힘들었거든요. 제 깜냥보다 더 크고 우렁찬 소리, 그것도 생목으로 막 지르면서 표현해야 되니까 노래하다가 소리가 뒤집히는 피치브레이크가 올까봐 늘 공포스러웠어요. 지금은 목에 힘을 빼고 부르니 편안해요.”

총학생회 부활을 노래로 이끈 신입생

<민주주의의 노래>가 지나온 과거에 대한 정리의 의미라면, <강은구의 마음의 노래 14>는 실험적 성격을 띤 완전히 새로운 노래다. 전통적 노래인 정가의 여창(여성 가객이 부르는 노래)을 작곡가 강은구가 현대적으로 재창조했다. 국악과 서양 클래식이 조화를 이루고, 윤선애의 목소리와 피아노, 대금의 소리가 어우러져서 독특하고 신비한, 그러면서도 평온한 분위기를 만든다.

―<마음의 노래>는 기존 음악과는 완전히 다르던데 반응이 어때요?

“조용하죠.(웃음) 제 나름으로는 굉장히 의미있는 작업이었는데 많은 분들이 듣는 것 같지는 않아서 좀 안타깝죠. 이 음반은 제가 여태까지 불렀던 스타일이랑은 많이 달라요. 그동안에는 제가 좀 꽉 찬 소리로 노래를 했는데 이것은 가성을 써서 음역을 좀 넓혔어요. 제가 추구하는 창법의 한 부분이죠.”

―독특한 것보다 이왕이면 대중들한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경쾌하고 비트가 빠른 노래가 낫지 않아요?

“좀 밝고 리듬감 있는 노래를 하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죠. 그런데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쫓아가는 거는 저한테 안 맞는 거 같아요. 요즘엔 트로트가 다른 것을 완전 뒤엎어버리는데 그렇게 한쪽으로 확 쏠리는 게 너무 싫어요. 저라도 그런 거에 휘둘리지 않고 제가 할 수 있는 음악적 영역을 쭉 가져가려고요.”

1994년 12월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노찾사 1집 음반 발매 10주년 기념 공연에서 윤선애, 고 김광석, 권진원씨(오른쪽부터)가 노래를 부르고 있다. 윤선애 제공
1994년 12월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노찾사 1집 음반 발매 10주년 기념 공연에서 윤선애, 고 김광석, 권진원씨(오른쪽부터)가 노래를 부르고 있다. 윤선애 제공

윤선애가 노래를 처음 제대로 부른 것은 서울 강서구 개화동의 한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그의 목소리가 고운 것을 안 담임 선생님이 가끔 풍금 반주를 하면서 노래를 부르게 했지만, 학년이 올라가면서 끝났다. 중학교 때 친구 따라 간 교회의 성가대에서 잠깐 활동하기도 했으나, 중·고교 시절 모범적인 우등생으로 공부하기에 바빴다. 그가 노래 부르는 사람의 길에 서게 된 것은 1984년 대학(서울대 지구과학교육과)에 들어가면서였다. 혜은이의 ‘당신은 모르실 거야’ 등 당시 유행가를 잘 부르던 신입생이 노래 동아리인 ‘메아리’를 제 발로 찾아갔다.

―메아리의 문을 어떻게 해서 두드리게 됐어요?

“제가 맏딸이고, 집에서 문화를 향유할 만한 형편이 아니어서 청소년기에는 그냥 텔레비전 이런 데 나오는 노래를 따라 불렀어요. 그래서 대중가요밖에 아는 노래가 없었는데 대학교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 갔더니 김민기 노래가 나오는 거예요. 뭐 저런 노래가 다 있나 싶었죠. 대중가요도 아닌데 되게 신선했어요. 저기 가서 저런 노래 배워야겠다는 생각에서 바로 동아리방을 찾아갔어요. 갔더니 노래 얘기는 별로 안 하고(웃음), 선배들이 ‘80년 광주에서 말이야’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얘기를 주로 해서 엄청 무서웠어요.(웃음)”

―그해 가을 총학생회 출범식에서 ‘민주’를 불렀는데, 수천명의 청중 앞에서 노래 부른 건 처음이죠?

“네. 저는 그런 집회가 있다는 걸 몰랐어요. 선배들이 ‘민주’를 불러보라고 하더니 ‘지금 집회가 있는데 거기 가서 노래 부르라’는 거예요. 저는 힘들어도 내가 해야 되는 일이면 해내는 스타일이라서 엄청 긴장이 되는데도 올라가서 불렀죠. 제 목소리의 날카로운 요소들이 그날 집회와 좀 어울리겠다고 선배들이 생각했던 것 같아요.”

전두환 정권은 결국 이듬해 총학생회를 인정했으며, 다른 대학에서도 일제히 학생회가 부활했다. 각 대학의 총학생회는 1980년대와 90년대 민주화 시위 등 각종 투쟁의 중심이 됐다. 노래 하나로 학생회 부활을 이끌었던 윤선애는 그러나 이듬해 초 메아리를 탈퇴했다. 자기 확신이 없었던데다 메아리에 계속 있다가는 자칫 교사 발령이 안 날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노래가 없는 삶은 그에겐 더 큰 고역이었다. 학업에 몰두하기가 힘들었고, 저녁에는 잠도 잘 오지 않았다. 결국 1986년 노래운동 집단인 ‘새벽’에 합류했다. 새벽은 1984년 고려대 노래 동아리 ‘노래얼’ 출신의 표신중, 서울대 메아리 출신의 문승현 등이 만든 노래패로, 86년 메아리 출신의 이창학 등이 합류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문승현은 ‘그날이 오면’ ‘오월의 노래’, 이창학은 ‘벗이여 해방이 온다’ ‘부활하는 산하’ 등을 만든 민중가요 작곡가들이었다.

“바깥 말고 자기 몸을 울려봐요”

―‘새벽’은 메아리보다 훨씬 운동성이 강했는데요?

“메아리를 나온 뒤에는 사는 게 뭔지 갑자기 삶의 의미가 없어진 것 같아서 힘들었어요. 그렇게 힘없이 지내는데 이창학 선배가 와서 ‘너는 노래만 해’라면서 설득한 거죠.”

―새벽 활동에 잘 적응했던 것 같은데요.

“제 스스로 ‘자, 사회가 이러니 이걸 알리기 위해서 난 이런 노래를 부를 거야’라는 건 아니지만, 노래하는 사람으로서 ‘이런 노래가 지금 필요하다면 해야 되지 않겠나’라고 생각하면서 열심히 했어요. 그러나 ‘넌 왜 이 노래를 하니? 어떤 이념에서 하니?’라고 물어보면 난 정말 자신이 없었어요. 그래서 항상 선배들을 괴롭혔어요. ‘이런 건 어떤 논리적인 맥락이에요?’라고 계속 물어보곤 했죠.(웃음)”

1991년 8월 서울 대학로 학전소극장에서 열린 노찾사의 ‘푸른 내일을 위해’ 공연에 초청돼 노래를 부르고 있는 윤선애씨. 윤선애 제공
1991년 8월 서울 대학로 학전소극장에서 열린 노찾사의 ‘푸른 내일을 위해’ 공연에 초청돼 노래를 부르고 있는 윤선애씨. 윤선애 제공

새벽을 대표하는 여성 보컬 윤선애는 민중가요계뿐 아니라 운동권의 스타였다. 당시 고 김광석, 안치환, 권진원 등 다른 새벽 동료들보다 유명했다. 높게 내지르는 그의 목소리는 투쟁을 북돋는 함성이자 청량제였으며, 나지막이 부르는 소리는 동시대인들의 설움과 아픔을 다독이는 위로였다. 그는 새벽 소속이었지만, 당시 대중적인 활동을 했던 노래를 찾는 사람들(노찾사) 공연에도 자주 불려갔다. 새벽 활동에 열중하느라 중학교 과학교사직을 발령 3년 반 만에 그만뒀다. 대신 생계 유지가 안 돼 입시학원 강사 일을 병행하면서 1993년 새벽이 해체될 때까지 남아 있었다.

―새벽에서 같이 활동하던 김광석, 안치환, 권진원 등이 대중가수로 성공하는 것을 보고 저렇게 하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들었어요?

“많이 알려지고 싶다는 욕심은 있었지만, 저렇게 하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저 자신을 노래 부르는 사람으로만 규정했기에 그때는 가수란 말은 저와는 거리가 먼 단어였어요. 또 대중가요 쪽에서 전문적으로 노래할 자신이 없었어요. 그분들과 달리 작곡을 못 하고, 연주도 못 하니까 대중가수로 나갈 수 없다고 생각했죠.”

―노래운동의 의미를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요?

“새벽 등 당시 노래운동은 1980년 광주민주항쟁 등 시대가 만든 거죠. 처음에는 학생들 사이에서 노래 가사 바꿔 부르기가 유행했어요. 그러다가 이런 싸움을 노래로 표현하면 좋지 않을까라면서 음악성까지 확보한 저항가요를 만들기 시작했죠. 대학생 노래 서클이 사회 저항의 노래를 만들고, 이들이 연합해 전문적인 노래운동 단체들을 만든 예는 우리나라밖에 없는 것 같아요. 당시 나름대로는 열심히 했지만, 돌아보면 우리는 아마추어였어요. 민중가요가 하나의 음악 장르로 살아남지 못했죠. 그런 역사를 토대로 또 다른 음악적 모색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지난달 나온 윤선애의 새 앨범.
지난달 나온 윤선애의 새 앨범.

문승현은 1992년 러시아로 유학을 떠나면서 윤선애에게 국악의 정가를 배울 것을 권했다. 모범생 윤선애는 새벽 해체 뒤에 선배의 조언대로 한국예술종합학교 등에서 정가를 10년 가까이 배웠다. “승현이 형 입장에서는 정가를 배운 뒤 그걸 접목시켜서 음악계를 흔들 수 있는 정도의 뭔가를 하기를 바랐대요. 그런데 그걸 제가 못 하는 것을 보고 기대를 접었다고 하더라고요.(웃음)” 그때 익힌 국악의 창법은 그에게 큰 음악적 자산이 됐다.

하지만 윤선애 음악의 제2막은 포크송 가수인 김의철을 만나면서부터였다. 첫 앨범인 <하산>(2005년)을 발표한 뒤 홍대 앞 클럽에서 연 공연을 보러 온 김의철을 처음 만났다. 김의철은 고교 시절 ‘불행아’(저 하늘의 구름 따라, 1974년)를 만들었다가 유신 독재정권에 의해 곡이 난도질당하자 독일과 미국에 건너가 클래식 기타를 오래 공부했다. 그는 10여년 동안 경기도 파주 자신의 집으로 윤선애를 일주일에 한번씩 불러 노래를 부르게 했다. ―전문적인 노래 공부는 그때가 처음인가요?

“전문적이라기보다는 음악을 일상으로 한 게 처음이죠. 처음 김 선생님을 만났을 때는 특별한 게 없는 것 같았어요. 전문 용어도 안 나오고 특별한 스킬을 가르쳐주는 것도 아니었거든요. 대신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처럼 노래해요. 그리고 노래에 마음이 들어가 있어야 해요. 윤선애씨는 형식적으로 부르는 느낌이 들어요. 소리하고 마음이 따로 가는 거 같아요’라는 걸 짚어주시는 거예요. 결국 목에 힘을 빼고, 소리에 마음을 담을 수 있다는 것을 배웠어요.”

―노래 경연 프로그램에서 감정을 실으라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는데 소리에 마음을 담는다고요?

“네. 음악을 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죠. 인간을 이롭게 하는, 인간을 위한 그런 마음이 담긴 음악 말이에요.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끄집어내 돈 버는 음악이 아니라 우리를 위로할 수 있고,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는 음악이요. 그런데 저는 계속 남들한테 들려주려고 음악을 했던 거예요. 들려줄 때 ‘아, 뭐가 이렇게 미흡하지’라면서 저를 막 채찍질하고 했어요. 근데 어느 순간 그냥 내가 부르는 게 좋은 거예요. 지금도 혼자 기타 치면서 노래하는 그 시간이 요가를 수련하는 시간 같은 느낌이에요. 선생님이 했던 얘기 중에 ‘노래를 하면서 바깥을 울리려고 하지 말고 자기 몸을 울려요. 몸이 울리면 저절로 바깥으로 울려서 들리는 거예요. 자기를 위로하면 남들도 위로가 돼요’라고 한 말이 생각나요. 그런 것이 진정한 노래 같아요.”

김의철을 만난 뒤 윤선애는 그동안 ‘운동성’에 가둬뒀던 음악적 울타리를 사랑과 우애 등 보다 깊은 ‘인간성’으로 넓혔다. <아름다운 이야기>(2009년), <그 향기 그리워>(2012년) 등에 실린 노래는 음악적 색깔에서 이전과 뚜렷이 달랐다.

“아름다운 이야기 하나 파세요/ 아름다운 얘기를/ 세상에 즐겁고 행복한 얘기를/ 하나만 파세요/ 휴식을 구하는 이에게 주렵니다/ 고독한 사람에게 주겠어요…” ‘아름다운 이야기’처럼 그의 노래는 대부분 노랫말도 곡도 잔잔하고 따뜻하다. ‘다시 만날 날이 있겠죠’(2007년 발표)가 지난해 티브이엔(tvN)의 드라마 <화양연화> 주제곡으로 리메이크(클랑)됐던 것도 그런 점에서 호소력을 지녔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에 &lt;민주주의의 노래&gt;와 &lt;강은구의 마음의 노래 14&gt; 등 두장의 음반을 낸 윤선애씨가 지난 19일 오후 경기도 의왕시 백운호수 근처 한 카페에서 &lt;한겨레&gt;와 인터뷰를 했다. 의왕/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최근에 <민주주의의 노래>와 <강은구의 마음의 노래 14> 등 두장의 음반을 낸 윤선애씨가 지난 19일 오후 경기도 의왕시 백운호수 근처 한 카페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했다. 의왕/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가장 들려주고픈 노래, ‘그날이 오면’

―과거에는 마음속에 화가 많았다고요?

“분노가 참 많았죠. 태어나면서부터 삶의 조건이 결정되는 사회 구조에 대한 분노, 가부장 중심주의에 대한 분노, ‘기집애가 어쩌고’ 하는 사회적인 성차별에 대한 분노 등이 강했어요. 대학에서 그런 것을 바꿀 수 있는 사회변혁이 가능하다고 듣고는 그런 분노를 담아서 노래를 불렀죠. 부르고 나면 긴장했던 몸이 확 풀리면서 마음도 좀 정리되는 듯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제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분노가 사라졌어요.”

지난 16일 음반 발표회 때 윤선애는 “이제는 치열함뿐 아니라 따뜻함까지 아우르고 갔으면 한다”고 말했다.

“제가 많이 변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나만이 아니라 더불어 다 같이 잘 사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은 여전해요. 그런 세상을 위해 힘이 되는 한 제가 도울 수 있고 할 수 있는 부분은 노래로든 뭐든 하고파요. 그러나 예전에는 치열하게 사는 사람들에게 주로 맞췄지만, 지금은 동시대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다면 그게 꼭 진보세력이든 보수세력이든 무슨 상관이 있겠나 싶어요. 누구든 위로해줄 수 있는 것, 이런 게 제 노래가 해야 할 역할이 아닌가 싶어요. 특히 좀 더 아래로, 그리고 좀 힘든 분들한테 다가가서 위로해주는 그런 작은 공연을 좀 많이 하려고 해요.”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 가장 애정이 가는 노래가 뭔지 물었다. 문승현이 만든 ‘오월의 노래’(노래듣기)를 들며 “들을 때 빨려들어가는 느낌”이라고 했다. 사람들에게 가장 들려주고 싶은 노래도 궁금했다. ‘다시 만날 날이 있겠죠’나 세월호의 아픔을 다룬 영화(<생일>)의 주제곡이었던 ‘편지’가 아닐까 생각했으나 그는 새벽 시절의 노래인 ‘그날이 오면’을 들었다.

“‘그때 힘들 때, 무모하기도 했고 나약하게 흔들렸던 그때, 그래도 잘했어’라고 사람들을 토닥토닥 위로해주고 싶어요. 저 자신에게도요. 스스로를 다독인 뒤 더 넓고 따뜻하게 다른 사람들을 보듬을 수 있는 이 노래를 부르면서 젊은 시절의 나를 만났거든요.”

어느새 그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였다.

돌아오는 길에 그가 새로 부른 ‘그날이 오면’을 차 안에서 반복해서 들으며 문득 깨달았다. 과거에 대한 마침표라는 그의 말과 달리 앞으로 가야 할 미래의 노래임을.

“…드넓은 평화의 바다에/ 정의의 물결 넘치는 꿈/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녹취 홍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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