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3월24일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은 서울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대규모 민중가요 공연 ‘자, 우리 손을 잡자’를 열었다. 당시 대학과 노동권에서 인기 높던 노래패들을 참여시켜 노래운동을 통한 조직 확산과 연대를 강화하자는 게 목표였다. 박인배 전 세종문화회관 사장은 2014년 <한겨레> 기사에서 “(‘자, 우리 손을 잡자’ 공연은) 노래패들로서는 새로 창작된 노래를 선보이는 자리이자, 학생운동권에서는 새로 입학한 신입생들이 운동가요를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는 기회로 생각하여 조직적으로 동원을 했다”며 “매번 그런 것은 아니지만, 몇번은 제작비를 충당하고도 남을 정도의 흥행 성적을 올리기도 했다. 이 공연은 92년 봄까지 계속되었고, 그해 연말 대선 때는 서울에 이어 부산에서도 공연을 했다”고 회고했다.
‘민중가요’라는 말을 듣고 떠올리는 노래와 생각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어떤 이는 김민기, 안치환, 노래를 찾는 사람들(노찾사)을 연상할 것이다. 누군가는 꽃다지나 조국과청춘을 추억할 것이다. 우리나라, 연영석, 손병휘를 흥얼거릴 사람도 있을 것이다. 쏟아지는 최루탄의 기억이 이어지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 같다. 반면 민중가요라는 말 자체가 낯설거나 거북스러운 이들도 있지 않을까. 민중가요의 역사가 길고, 영향력이 깊은 탓이다.
한국에서 민중가요는 지배 권력에 맞서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활동하는 이들이 부르는 노래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쉽게 말해, 운동권 노래라거나 데모 노래이다.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활동한 이들은 1970년대 말까지 기존의 가곡, 대중가요, 민요, 번안곡, 찬송가에 다른 의미를 실어 불러야 했다. 사회문제를 명확하게 지적하거나 운동의 방향을 제시하는 노래는 아직 출현하지 못했다.
1980년 광주는 노래마저 바꿔버렸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알게 된 이들은 박치음의 ‘전진가’나 고 백기완 선생의 글 ‘묏비나리’에서 가사를 딴 ‘임을 위한 행진곡’
등을 만들고 부르며 결의를 다졌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백기완의 말처럼 혁명이 늪에 빠졌을 때 앞장선 노래였다. 팔뚝질하며 부르는 노래는 죽음을 각오하고 투쟁하겠다는 다짐이자 약속이었다. 비장하고 느린 노래들과 결기 넘치는 행진곡마다 광주의 피눈물이 스며들었다. 1970년대 지식인과 운동권이 부르던 노래와는 완전히 다른 노래가 새로운 운동권의 징표가 되었다. 대학 노래패들과 대학 밖의 노래패들이 민중가요를 이끌었다. 노래모임 새벽, 광주의 노래패 친구 같은 전문 집단이 등장해 민중가요가 담긴 불법 카세트테이프를 제작·유통했다. 일일이 손으로 악보를 그린 민중가요 노래책의 시대이기도 했다. 곳곳에서 공연들이 이어졌고, 노동운동과 종교계로도 민중가요의 물결이 넘실거렸다.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 1992년 ‘한국 근현대 노래 80년사-끝나지 않은 노래’ 공연을 하고 있다. 당시 공연은 한말 구전가요 ‘새야 새야 파랑새야’부터 일제강점기와 해방정국, 1950~60년대, 1970년대, 1980년대 대중음악과 민중음악을 노래해 큰 화제를 모았다. 이듬해 대중가요로는 처음 문예회관 대극장 공연이 이뤄지기도 했다.
1987년 6월 항쟁과 그해 7~9월 ‘789 노동자 대투쟁’이 폭발하면서 민중가요는 나라를 뒤덮었다. 대학가에서 불렀던 노래들은 세상으로 달려나갔다. 노찾사 2집이 50만장 이상 팔린 사건은 민주화에 대한 열망과 운동의 성장 없이는 설명할 수 없다. 노찾사 노래가 민중가요의 전부는 아니었다. 김호철이 작사·작곡한 노동가요들은 노동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학생운동권에서 직접 만든 노래들은 신념의 용광로에 기름을 부었다. ‘전대협 진군가’, ‘철의 노동자’, ‘파업가’, ‘노동조합가’, ‘단결투쟁가’ 같은 노래가 없었다면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은 더 가슴 뛰고 결의에 찬 운동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1990년대에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이 대중화하면서 민중가요는 더 많아지고 다양해졌다. 대학과 노동조합마다 노래패가 늘어났다. 지역에도 민중가요 전문 노래패들이 활동했다. 노동·반미·통일을 비롯한 메시지 역시 다양해졌다. 록, 민요풍 음악, 북한풍 음악 등 스타일도 풍성해졌다. ‘바위처럼’과 ‘전화카드 한 장’은 일상적으로 향유되는 1990년대 민중가요를 대표하는 명곡이다. 노찾사, 권진원, 안치환은 주류 대중음악 시장으로 진출했다. 정태춘은 헌법소원을 통해 음반 사전심의 제도를 무너뜨리며 대중음악계에 지체된 민주주의를 실현했다. 텔레비전과 라디오에 민중가요가 흘러나오고, 수만의 사람들이 한자리에서 민중가요를 열창하던 시절은 운동권이나 민중가요 진영 모두에게 좋은 시절이었다.
노래를 찾는 사람들 멤버들이 1991년 7월 서울 동숭동 학전소극장 공연을 앞두고 노래 연습을 하고 있다. 당시 노찾사는 전국 순회공연 뒤 이어진 20일짜리 학전소극장 공연에서 ‘일요일이 다 가는 소리’, ‘사계’처럼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노래뿐 아니라 교육 현실을 이야기하는 ‘언제나 시작은 눈물로’, ‘제발 제발’ 같은 노래를 레퍼토리에 담았다. 정태춘, 김광석, 한돌, 서유석, 임준철 같은 음악인들이 찬조출연했다.
1996년 1월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앞에서 구속 예술인 석방을 위한 첫날 거리공연을 벌이고 있다. 당시 공연에는 ‘노래마을’ ‘노찾사’ 등 민중가요 노래패들이 참여했다.
그러나 영광은 계속 이어지지 못했다. 학생운동은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이 주도한 1996년 범민족 대회를 기점으로 저물기 시작했고, 노동운동마저 외환위기(IMF) 사태를 맞아 비틀거렸다. 민중가요를 함께 듣고 부르며 같은 꿈을 꾸는 이들이 줄어들자 민중가요는 힘을 잃었다. 민중가요 뮤지션들은 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인터넷을 통해 작품을 발표하면서 더 많은 대중을 만날 수 있었다. ‘헌법 제1조’와 ‘이게 나라냐ㅅㅂ’로 잘 알려진 작곡가 윤민석과 민중가요 노래패 ‘우리나라’를 통해 2000년대의 열린 광장에서 민중가요가 울려 퍼졌다. 문진오, 손병휘, 손현숙, 연영석, 이지상 같은 싱어송라이터들도 제각각 자신의 노래를 선보이며 민중가요의 역사를 이어갔다.
2004년 10월 노래를 찾는 사람들은 노래패가 만들어진 지 20년을 기념해 2집과 3집 음반을 하나로 묶어 기념앨범을 냈다. 사진은 기념앨범 발매 당시 <한겨레> 기사에 싣기 위해 노찾사 쪽이 제공한 멤버들의 과거 사진이다.
2000년대 이후엔 집회가 촛불문화제 형식으로 변화하면서 더 많은 뮤지션의 노래가 함께했다. 촛불집회에서는 민중가수들의 노래보다 이상은, 이한철, 장필순, 허클베리핀 같은 비주류 인디 뮤지션의 노래를 자주 들을 수 있다. 이들이 민중가수는 아니다. 다만 더 많은 이들이 집회에 참여하면서 집회문화가 바뀌고, 뮤지션들 역시 사회적 연대와 참여에 자연스러워진 것이다. 덕분에 지금은 사회비판적인 노래를 더 다채롭게 들을 수 있다. 어떤 이들은 특정한 노래만이 민중가요의 전부라고 생각하겠지만 세상만큼 노래도 변한다. 그러니 오늘의 노래에 더 귀를 열어둘 일이다. 2021년에는, 2021년의 민중가요가 있다.
서정민갑 대중음악의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