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패한 나라를 숭고한 나라로 바꾼답시고 여자를 네발이라고 고쳐 부르며 기어 다니게 하는 남자들. 극소수 여성의 최초 대학 진학을 권력 탈취라고 비난하며 여성의 지위 향상으로 세상이 망한다고 울부짖는 마스트맨(주인 남자). 경찰국장을 비롯한 모든 권력자들을 포섭한 그들이 여성, 특히 여아들을 유괴하여 동물로 사육하는 이야기인 미셸 오슬로의 2018년 애니메이션 <파리의 딜릴리>의 첫 장면은 원주민의 평화로운 생활을 보여주다가, 사실은 그것이 파리 박람회 구경거리임을 알려주어 충격을 준다. 동물원 우리와 같은 곳에 갇힌 주인공 딜릴리가 흑인이어서 한국의 일부 매체에서는 아프리카 출신이라고 했지만, 태평양 중앙에 있는 뉴칼레도니아 원주민인 카낙족이다. 20세기 초 벨 에포크(좋은 시기) 시대의 파리를 배경으로 당대의 수많은 예술가와 과학자와 함께 유일한 혁명가인 루이즈 미셸이 유괴된 아이들을 탈출시킨다. 그는 영화 속 인물 중 유일하게 유형수로 뉴칼레도니아에서 7년을 살면서 딜릴리를 비롯한 원주민 아이들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쳤다. 영화 속 미셸은 “다른 사람이 뭐라 해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끝까지 주장하는 사람”으로 그려진다.
“저는 사회혁명을 전적으로 믿으며 제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집니다”라는 말로 시작되는 2009년 프랑스 영화 <루이즈 미셸>은 2020년에 죽은 아나키스트 작가이자 미술평론가였던 미셸 라공의 <조르주와 루이즈>에 근거해 유형지의 미셸이 당시 국회의원이던 조르주 클레망소(1841~1929)와 교환한 편지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클레망소는 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를 자신의 신문에 실은 것으로도 유명한 언론인으로 뒤에 총리를 역임했다. 19세기 유형지의 죄수가 지구 반대편에 있는 파리의 국회의원을 비롯한 많은 명사들과 편지를 주고받은 것도 놀랍지만, 7년간 유형지에서 살면서 파리의 연극을 비롯한 문화 활동에 적극적인 관심을 갖는 것도 놀랍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루이즈 미셸이 식민지의 순수한 자연 속에서 에콜로지에 눈을 뜨고 식민지인들의 고통을 함께하며 코뮌의 연장으로 민족해방운동에 나서는 등 아나키스트로 변신하는 과정이다.
뉴칼레도니아에서의 유형 생활을 마치고 1880년 파리로 돌아온 뒤 연 한 강연회에서의 루이즈 미셸. 르몽드신문 삽화. 위키미디어
1871년 파리 ‘노동자 자치정부’서
이혼의 권리·사실혼 인정 등 앞장
결혼반대 독신생활 한 페미니스트
아나키스트 된 뒤 동물권도 옹호
하녀의 사생아로 태어난 루이즈 미셸은 프랑스 북동부 시골에서 조부모에 의해 길러진 뒤 마을의 교사가 되었으나, 교육당국과의 충돌과 자유로운 수업 방식으로 여러 학교에서 쫓겨나 파리로 간다. 1865년 파리에 현대적이고 진보적인 학교를 세우고, 빅토르 위고와 서신을 주고받으며 시를 발표하면서 급진적인 정치에 관여한다. 1869년 페미니스트 단체에 참여해 소녀교육 향상을 위해 노력하면서 성매매나 결혼은 똑같은 거래관계라고 비판하며 평생 혼자 살아간다.
1870년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프랑스가 항복하는 것에 반대한 노동자들이 군대를 몰아내고 1871년 3월18일 파리에서 코뮌 자치를 시작한다. 70일 동안 지속된 그것은 세계에서 처음으로 노동자 계급의 자치에 의한 민주주의 정부다. 1일 10시간 노동과 야간노동 금지, 산재보험, 종교와 정치의 분리, 집세와 만기수표의 지급유예, 노동자 자주관리와 집단소유, 노동자의 최저생활 보장, 징병제와 상비군 폐지 및 인민군 창설, 결혼과 이혼의 권리 및 사실혼 인정, 성매매 폐지, 독신 여성과 자녀에 대한 연금 지급, 빈곤층 구제와 무상 의무교육 등 혁명적인 제도와 정책이 도입된다. 또 모든 교회가 민주적 토론 장소로 사용된다. 몽마르트르 여성위원회의 수장으로 혁명정부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미셸은 바리케이드를 쌓고 무장투쟁에 가담한다. 당시 그는 남자들에게 조롱을 당했지만, 그들에게 “남녀가 모든 인간성의 권리를 획득한 뒤 여성의 권리를 위한 투쟁에 한몫해달라”고 요구하며 함께 싸우지만, 코뮌의 평의원 선거에서 여성에게는 선거권이 주어지지 않는다.
1871년 파리코뮌이 진압된 뒤 체포되는 루이즈 미셸. 프랑스 화가 쥘 지라르데 그림.
두달 뒤 정부군이 파리를 탈환한 5월25일 이후 열흘 동안 2만명 이상이 붙잡혀 총살당하고, 4만명 이상이 포로로 전쟁재판에 회부된다. 미셸은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요구하지만, 1만명과 함께 유형을 선고받는다. 미셸은 오베르 감옥에서 20개월을 보낸 뒤 1873년 8월 태평양의 뉴칼레도니아로 추방된다. 그곳의 원주민인 카낙족과 친구가 된 그는 카낙족의 전설, 우주론, 언어 등에 관심을 가지고 카낙족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치고 1878년 카낙족 반란에 가담한다. 이듬해 알제리 반란(1871년)으로 추방된 카빌인 아이들을 가르친다. 유형지에서 아나키즘을 받아들이고 죽을 때까지 모든 형태의 정부를 거부한 그는 ‘권력을 가진 선한 사람은 무능하고, 나쁜 사람은 악한 사람’이라고 하면서 자유는 어떤 형태의 권력과도 연관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1880년 파리코뮌 참가자에게 사면이 내려져 미셸은 파리로 돌아와 유럽 전역에서 자본주의와 권위주의 국가를 공격하는 혁명 활동과 함께 사형제·동물실험 반대운동을 전개한다. 1882년에는 첫 아나키스트 연극인 <나딘>을 무대에 올리고 관객들이 연극의 갈등에 반응하고 재연하도록 격려하고, 강연과 시, 노래를 정치예술 프로그램으로 통합한다. 1883년 3월에는 검은 깃발을 들고 실직 노동자들의 시위를 이끌었는데 그 깃발은 그 후 아나키즘의 상징이 된다. 6년형을 받고 독방에 감금된 그는 1886년에 크로폿킨을 비롯한 아나키스트들과 동시에 풀려난다. 1890년에 체포되어 정신병원에 갇히게 될 위험에 처하자, 런던으로 망명해 5년간 그곳에서 살면서 예술과 과학을 무상으로 교육하는 국제자유학교를 세우고 교육과 창작을 계속한다. 폭력적인 혁명에 초점을 맞춘 초기작들과 달리 후기작에서는 민중들의 자발적인 봉기를 강조하면서 테러를 배척했다. 1895년에 프랑스로 돌아온 뒤 1904년 알제리로 가서 반식민운동에 투신하다가 1905년 1월 마르세유에서 폐렴으로 죽는다. 그의 파리 장례식에는 10만명이 넘는 사람이 참석했다. 남녀만이 아니라 식민지인이나 비서양인은 물론 동식물까지도 자유롭고 평등하기를 바란 미셸의 삶과 생각이 여전히 우리의 과제이기 때문에 절실하게 다가온다. 올해로 파리코뮌 150주년을 맞아 프랑스를 비롯해 세계에서 그 뜻을 기리는 반면 이 땅에는 여전히 마스트맨들이 설치고 있다.
전 영남대 교수(법학). 노동법 전공자지만, 철학, 문학, 예술에 이르기까지 관심의 폭이 넓다. 민주주의, 생태주의, 평화주의의 관점에서 150여권의 책을 쓰거나 번역했다. 기성 질서를 거부했던 이단아들에 대한 얘기를 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