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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학술

“‘문송’ 넘어 ‘문망’? 기죽지 말고 공부하시라”

등록 2022-08-27 10:00수정 2022-08-29 14:53

[한겨레S] 특집
인문학도 키우는 ‘익명의 슈퍼히어로’

김희경장학재단 김정옥 이사장
“인문학은 인간성 회복의 길”
풍요로운 학문의 세례 속에서
인재 길러내는 것이 재단 목표
김정옥 이사장이 19일 오후 서울 서초구 김희경유럽정신문화장학재단 내 유럽인문학 전문도서관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김정옥 이사장이 19일 오후 서울 서초구 김희경유럽정신문화장학재단 내 유럽인문학 전문도서관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유럽인문아카데미라고 들어봤어요?”

학계와 출판계 사정에 밝은 연구자, 출판편집자들 사이에 최근 조용히 소문이 돌았다. 한 사설 아카데미의 세미나, 강의, 원전 강독이 국내 유수 대학원 수준을 뺨치고 심지어 대학교수들이 참석할 정도라고 했다. 강사료는 꽤 높은 수준인데 수강료는 시간당 단돈 5000원. 커피 한잔 값 정도에 불과하니 ‘시장’ 논리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이를 후원하는 장학재단이 있는데, 재단 이사장은 모습을 드러내길 꺼리는 ‘익명의 슈퍼히어로’라고 했다.

과연 그는 몇몇 대학에 통 큰 기부를 한 교수 출신이라는 사실 말고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었다. 다만 독일 프랑크푸르트사회연구소처럼 선대의 물질적, 정신적 유산을 아낌없이 사회에 돌려주고 있다는 얘기였다. 재단은 유럽에서 공부하는 인문학도를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으며, 어마어마한 장서를 보유한 도서관까지 갖추고 있다고 했다. 지난 19일 오후, 서울 서초구에 있는 김희경유럽정신문화장학재단 이사장실의 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장학재단, 전문 도서관 설립

“어지러운 세상에서 인문학 증진을 위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정말 큰 기쁨입니다. 기후변화에서 보듯 세기의 종말 같은 분위기가 느껴지고, 생각이 다르면 무조건 적으로 돌리는 요즘 아닙니까. 인문학은 인간성 회복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학문입니다.”

김정옥(75) 이사장은 손님을 환대하며 따뜻한 차를 건넸다. ‘문송’(문과라서 죄송하다)을 넘어 ‘문망’(문과라서 망했다)이라는 말이 유행인 시대에 김 이사장은 인문학에 대한 강한 신념으로 장학사업을 펼치고 학술연구사업을 후원하고 있다. 김 이사장은 2019년 작고한 초대 이사장 김희경씨의 맏딸이다. 2005년 설립한 이 재단은 2006년부터 2021년까지 햇수로 16년 동안 연인원 569명에게 총 103억원에 이르는 장학금을 지급했다. 인문학 계열에 국한해 박사학위 논문 작성 지원, 석박사 과정생 유럽대학 연수 지원, 학부생 어학연수와 교환학생 참가 지원, 학부생 등록금 지원 등을 한다. 재단이 배출한 총 82명 장학생 가운데 박사학위 취득자가 56명, 그중 국내외 대학에서 교수로 임용된 이들이 36명에 이른다. 한국만 해도 지난 8년간 대학에서 인문계 학과가 148개나 사라져 몇 안 되는 ‘교수 자리’를 놓고 이곳 장학생들끼리 경쟁할 수밖에 없는, 씁쓸하면서도 뿌듯한 장면까지 연출되었다고 한다.

“대학 순위를 매기고 구조조정으로 인문학 계열을 없애는 흐름 속에 우리 재단의 성과는 기적이라고 생각해요. 피폐해지는 인문학의 가치를 재평가하고 인재를 키워 현대사회의 물질 만능주의를 극복하는 일에 힘을 보태자는 것이 어머님과 저의 뜻입니다.”

재단은 초기부터 독일 학자들과 긴밀히 교류하며 2007년엔 괴팅겐 대학 서울사무소를 유치했다. 괴팅겐 대학은 의과대학이 유명하기에 그 분야를 포함한 학술 교류를 염두에 뒀지만, 미국 일변도의 학계 현실이 발목을 잡았다.

“미국에 가 보지 못한 사람은 뿌리를 내릴 수도 없는 것이 한국 대학의 현실이에요. 미국과 다르게 발전한 독일 의학 교류나 의료보험 같은 제도 연구 교류가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어요?”

재단이 보유한 하인리히 하이네 전집 중 한권. 문학 전문출판사 ‘호프만 운트 캄페’가 1876년 출간한 것이다. 이유진 기자
재단이 보유한 하인리히 하이네 전집 중 한권. 문학 전문출판사 ‘호프만 운트 캄페’가 1876년 출간한 것이다. 이유진 기자

김 이사장은 아쉬워했지만 양국 학자들은 장학재단의 취지에 뜨겁게 공감했다. 독문학자 볼프강 에머리히 브레멘 대학 교수 등은 자신의 소장 자료를 재단에 기증했다. 2011년 재단 건물 안에 문을 연 ‘유럽 인문학 전문도서관’은 독문학 전문출판사 ‘호프만 운트 캄페’가 1876년 출간한 하이네 전집, 라틴어 비문 모음집 등 독일,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스페인, 그리스에서 온 귀한 유럽 인문학 서적 3만4000권을 갖췄다. 특히 칸트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자료인 <칸트 시대>(Aetas Kantiana) 시리즈물 300여권은 재단이 독일 대학 도서관들을 샅샅이 뒤져 가까스로 입수한 귀한 책이다. 해마다 10억원 정도를 책 사는 데 쓰는데, 장학금을 헐어 쓰지 않도록 김 이사장은 올해만 7억5000만원을 도서관에 기부했다. 그는 “인문학자가 게을러지면 안 된다”고 말했다.

“책은 우리가 얼마든지 사줄 테니 열심히 읽고 연구하라는 거죠. 제가 1977년 12월에 독일에서 한국으로 들어왔는데, 그땐 사상에 문제가 있다며 브레히트 책을 갖고 들어올 수조차 없었어요. 책과 엘피(LP)판까지 하나하나 다 검열했어요. 1967년 ‘동백림(동베를린) 사건’이 터졌으니 독일 유학생들에 대한 신원 조회가 무시무시했던 때죠.”

김희경유럽정신문화장학재단은 2015년부터 독일어, 프랑스어 등 원어 연극을 하는 학생들에게 공연장을 무료 대관해준다. 김희경유럽정신문화장학재단 제공
김희경유럽정신문화장학재단은 2015년부터 독일어, 프랑스어 등 원어 연극을 하는 학생들에게 공연장을 무료 대관해준다. 김희경유럽정신문화장학재단 제공

재단은 또 2015년부터 독일어, 프랑스어 등 원어 연극을 하는 학생들을 위해 공연장인 영산홀(96석, 264㎡)을 무료 대관해왔다.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1898~1956)와 프리드리히 뒤렌마트(1921~1990)의 작품을 연구했던 김 이사장은 눈빛을 반짝이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들의 연극 작품이 정말 너무 재밌어. 브레히트의 관점은 세계를 개조해야 하는 거예요. 항상 문제의식을 갖고 비판적인 눈으로 세상을 바라봐요. 그의 작품 가운데 자전거 타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있어요. 발로는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을 누르고, 높은 사람에겐 고개를 숙이는 거죠. 이런 자본주의 사회의 속성이 지금 대학에 만연해 있어요. 대학의 서열을 없애야 합니다.”

나이 든 학자들이 모여 노변정담을 나누고 학생에게 돈만 주고 끝나는 형식적인 장학재단이 아니라, 실제로 풍요로운 인문학 세례 속에 인재를 길러내는 것이 재단의 목표다. 박사과정생들은 ‘박사학위 논문 진행발표 및 면접’에 참석해 선배 장학생들 앞에서 피드백을 받는다. 코로나로 지난 3년간은 비대면으로 진행했지만, 이전까지는 재단이 비행기표를 주고 학생들을 데려와 4~5일에 걸쳐 하루 종일 토론을 벌였다. 기종석 이사(건국대 철학과 명예교수)는 “행사가 시작되면 전공의 장벽을 넘어 인문학적 향연이 될 수밖에 없는 학제 간 토론을 뜨겁게 펼친다”며 “자기 논문 발표 이외에 인문학의 미래와 관련된 발표를 반드시 추가하도록 하는데, 인문학자로서 자기성찰과 설계도를 그리는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2016년도 박사학위논문 진행발표와 면접. 선배 장학생들이 모여 학제 간 장벽을 넘어 ‘인문학의 향연’을 펼친다. 김희경유럽정신문화장학재단 제공
2016년도 박사학위논문 진행발표와 면접. 선배 장학생들이 모여 학제 간 장벽을 넘어 ‘인문학의 향연’을 펼친다. 김희경유럽정신문화장학재단 제공

인문학도 양성 뜻 모은 모녀

김 이사장은 서울 태생이고, 어머니 김희경 초대 이사장은 평안북도 희천에서 태어났다. 진사를 지낸 외증조부는 여섯 아들을 두었는데 막내아들을 뺀 나머지는 모두 독립운동을 하다가 옥사했다. “반일 정신이 투철한 집안이었다”고 했다. 일제가 희천에 일본 학교를 세우려 하자, 외증조부는 이를 막으려고 한학 서당을 여러개 세워 동네 아이들을 모두 다니도록 했다고 한다.

김 초대 이사장은 근검절약하여 돈을 모았다. 젊어서부터 사학재단을 만들 뜻을 세우고 과천의 야산과 양재동 일대의 땅을 사들였지만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 여러 이유로 땅을 수용당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뒤 일부는 30년에 걸친 재판을 통해 되찾거나 다시 샀다.

“어머님이 오랫동안 재판을 해서 땅을 되찾게 되었으니, 개인이 갖는 것보다 건물을 만들어 그 수익금으로 장학재단을 설립하면 좋겠다고 아이디어를 내셨어요. 병상에서도 장학생들을 만나 너무 감격해 울곤 하셨습니다.”

김 이사장은 어려서 외삼촌이 가져다준 독일 동화책이나 <파우스트>를 읽으며 독일 문화를 만났다. 이화여중 3학년 때부터 스스로 학원과 독일어책 전문서점을 찾아다니며 열정적으로 독일어를 익혔고, 이화여대 독일어과에 진학했다. “어릴 때부터 결혼하지 않고 독일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독문학 교수로서 생을 마치겠다고 결심했다”는 것이다. 괴팅겐 대학에서 공부한 뒤 전북대와 건국대 교수로 일했지만 정년퇴임은 하지 못했다. 연로한 어머니를 모셔야 했기 때문이다. 공동체에 책임을 다할 수 있는 인문학 인재를 길러내자고 어머니와 딸이 의기투합하면서 장학사업은 본궤도에 올랐다.

독일 극작가 게오르크 뷔히너(1813~1837)의 희곡 <보이체크>는 드라마를 전공한 김 이사장이 꼽는 ‘인생의 책’이다. 뷔히너는 요절한 천재 작가로서 의학, 역사학, 철학을 공부하고 부조리한 권력에 맞서 저항적인 정치활동을 이어나갔다. “<보이체크>는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 생체실험 대상이 되는 가난한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부조리한 사회 현실을 고발하는 작품이에요. 제게 큰 인상을 남겼죠.”

김 이사장은 이제 독립적이면서 단단한 인문학의 후예를 키우는 일에 생애를 바치겠다고 했다. “저 또한 경제적으로 괜찮은 집안에서 자랐지만, 독일에서 6년 동안 교수님 밑에 조교로 일하며 생활했습니다. 높은 지위에 있을수록 공동체로부터 혜택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양보하고 사회적 책임을 다하도록 하는 게 독일 사회의 분위기였죠. 그렇게 시민의 양심으로 행동하는 인문학자를 만드는 것이 저의 꿈입니다.”

재단의 장학생들은 2020년부터 재단이 후원을 시작한 대안대학인 ‘유럽인문아카데미’에서 강의를 하기도 한다. 인문학도 양성을 넘어 학문과 지식이 재생산되는 터전을 가꾸고 있는 셈이다.

“우리 재단이 대안대학인 유럽인문아카데미를 만난 것은 운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학이 할 수 없는 일을 하고 있는 거죠. ‘유인아’에 진짜 고맙고, 어머님의 뜻이 이런 식으로 이어지는구나 싶어서 감격스러워요.”

김정옥 김희경유럽정신문화장학재단 이사장이 도서관 서가 앞에 서 자세를 취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김정옥 김희경유럽정신문화장학재단 이사장이 도서관 서가 앞에 서 자세를 취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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