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책이 나오길 목 빼고 기다리는 걸작이 있다. 세계 최고의 명작으로 평가되는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 비견되는 걸작인 바실리 그로스만의 <삶과 운명>이다.
독일군이 스탈린그라드를 포위한 1942년부터 43년까지를 묘사한 역사소설인 <삶과 운명>은 방대한 분량뿐 아니라 내용 면에서도 나폴레옹군과의 전쟁을 묘사한 <전쟁과 평화>를 연상하게 한다. 공교롭게도 나폴레옹군도 나치군과 마찬가지로 러시아를 침략했다가 패배했다.
그러나 단순히 전쟁 이야기를 넘어, 이 소설은 한나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과 함께 전체주의를 가장 잘 분석한 책으로 꼽힌다. 전체주의의 핵심은 전체에 대한 개인의 복종이다.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의 자율을 억압하고, 국가가 지시하는 전체라는 추상적 이념에 대한 복종만을 용인하는 전체주의에 반대하는 그로스만의 삶은 바로 자유 그것이다. 삶은 자유다. 그 자유를 짓밟는 것이 전체주의라는 운명이다.
톨스토이가 나폴레옹전쟁보다 한 세대 뒤에 태어난 반면, 그로스만은 종군기자로 격전지 스탈린그라드에서 전쟁을 직접 체험했다. 눈으로 본 전쟁 장면의 생생한 묘사만이 아니라 스탈린을 비롯한 실재 인물도 다수 등장한다. 주인공들인 샤포시니코프 집안의 삼 세대 사람들은 유대계인 탓에 나치스 점령지역에서 강제수용소나 절멸수용소에서 지내야 하는 가혹한 운명을 벗어날 수 없다.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나치 수용소만이 아니라 반체제파를 섬멸하기 위한 소련 수용소도 있다. 소설에 나오는 나치친위대 소령이 말하듯이 나치즘과 스탈린주의는 서로에게 거울이다. 스탈린과 히틀러는 형제다. 두 체제 모두 개인에게서 자유를 빼앗고 인간을 근본적으로 부정한다. 10년 동안 집필하여 1960년에 완성했으나, 이듬해 옛 소련의 국가보안위원회(KGB)에 압수된 뒤 1988년까지 출판이 금지된 이유를 작품 자체가 설명해준다.
2013년 러시아 연방보안국(FSB)은 비밀기록보관소에 보관된 <삶과 운명>의 원고 원본을 러시아 문학기록보관소에 넘겨 학자들이 연구할 수 있도록 했다.
나치와 스탈린주의 모두 비판
그러나 작가가 처음부터 반체제였던 것은 아니다. 도리어 그는 스탈린 시대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의 친체제 작가로 출발했다. 1905년 우크라이나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모스크바대학에서 화학을 공부하고 광산에서 엔지니어로 일하다가 1930년대부터 작가로 글을 썼다. 초기 작품은 소비에트 권력에 유익한 작품들이었고, 그 시대에 많은 작가들이 수난을 겪었어도 그는 체제에 봉사해 출세했다. 제2차 대전이 터져 종군기자로 쓴 글도 대부분 그러했다. 그러다가 복종에서 반역으로, 맹목에서 각성으로 바뀌는 근본적인 전향을 경험했다. 그야말로 노예의 죽음과 자유인의 부활이라고 하는 완전한 변신이었다.
전향의 계기는 1953년에 스탈린이 죽고 난 뒤의 소위 해빙기에 찾아왔다. 세상이 변해서 그도 변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로스만의 작품들은 흐루쇼프 시대에도 검열을 면하지 못하고 작가는 1964년 암으로 죽었다. 죽기 직전 작가는 흐루쇼프에게 “내 책에 자유를 주십시오. 국가보안위 요원이 아니라, 편집인들과 내 원고에 대해 이야기하고 논쟁하길 바랍니다. 내 일생을 바친 책이 투옥된 지금의 상황에서 나의 육체적 자유는 아무런 진실도, 의미도 없습니다”라고 간청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로스만 친구가 소지한 원고 복사본 덕분에 1980년 스위스에서 러시아판 소설이 출판되고 곧이어 불어 번역본이 나왔다. 3부로 이루어진 소설은 각각 74, 64, 63개의 작은 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하나의 장이 독립된 이야기여서 그 내용을 요약하기란 쉽지 않다. 주인공인 핵물리학자 빅토르 시트룸은 공산주의 이념과 무관하지만, 아인슈타인의 20세기가 히틀러의 세기이기도 했음을 안다. 게슈타포와 과학르네상스는 같은 시대에 태어났다. 개성을 갖는 인간을 거부하고 거대한 통합의 전체를 지향하는 파시즘은 핵융합의 개념에 기초한 물리학의 법칙과 유사하다.
시트룸만이 아니라 모든 등장인물은 전체주의에 포위된다. 헌신적인 공산주의자도 노동수용소에 갇힌다. 나치 강제수용소의 히틀러 친위대(SS) 장교가 러시아인 죄수에게 나치는 스탈린으로부터 배웠다고 말한다. “한 나라에 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농민의 자유를 파괴해야 한다. 스탈린은 주저하지 않고 수백만의 농민을 숙청했다. 히틀러는 유대인들이 독일 국가사회주의 운동을 방해하는 적임을 알았다. 그래서 수백만의 유대인을 청산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두 개의 전체주의, 즉 파시스트 나치와 스탈린주의 공산당의 싸움이다.
소설의 압권은 제2부 15장에서 작가가 인간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제시하는 부분이다. 그는 먼저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인 선이 존재하는지 묻고, 선의 이상이 인종과 종교에 따라 어떻게 바뀌는지 설명한다. 특히 기독교를 비판하면서, “그 교리는 그 자체로 악을 행한 사람들의 모든 범죄보다 더 많은 고통을 초래했다”고 한다. “하나님이나 자연에서 선을 찾는 것에 절망한 뒤 나는 친절에 대해서까지도 절망하기 시작했다. … 인간의 역사는 악을 극복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선의 싸움이 아니다. 거대한 악마가 인간의 친절이라는 핵심을 분쇄하기 위해 싸우는 전투다.” 그는 생명 자체가 악한 것임을 보여주는 여러 예를 제시하지만, 삶 자체 안에 좋은 점이 있다고 믿는다. 거대한 악에도 불구하고 인간성과 선은 궁극적인 승리자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아무리 작은 자선 행위라도 선이 살아 있고 정복할 수 없는 것임을 반영한다고 본다. 악이 아무리 커도, 이 선의 기본 핵심은 인간 본성의 핵심 부분이며 결코 부서지지 않는다고 봤다.
러시아 문학의 전통을 계승
<삶과 운명>의 마지막에서 작가는 전쟁, 대량 학살, 상상의 영역을 넘는 고통, 그리고 완전한 멸망에도 불구하고 삶은 계속된다고 한다. “햇볕이 잘 드는 평원보다 시원한 숲에서 봄을 더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이 침묵에는 가을의 침묵보다 더 깊은 슬픔이 있다. 그 속에서 당신은 죽은 자에 대한 애도와 삶 자체의 격렬한 기쁨을 들을 수 있다. 아직도 차갑고 어둡지만 곧 문과 셔터가 열릴 것이다. 머지않아 이 집은 아이들의 눈물과 웃음으로 가득 차고, 사랑하는 여자의 급한 발걸음과 집주인의 걸음걸이로 가득 찰 것이다. 그들은 조용히 가방을 들고 거기에 서 있다.” 인생을 움직이고 되찾는 것을 상징하는 행위에서 작가는 미래와 미래의 희망을 찾는다. 우리는 항상 고통을 겪지만, 결국 삶은 항상 계속되고 행복과 평화는 결국 돌아온다는 것이다.
그로스만은 <삶과 운명> 외에도 <올바른 일을 위하여>와 같은 소설을 비롯하여 많은 작품을 썼다. 59년의 짧은 생애에 압제하에서 그렇게도 많은 작품을 쓴 점이 놀랍다. 특히 <삶과 운명>은 <전쟁과 평화>보다 더 방대하고 심오하다. 그로스만은 톨스토이의 서사만이 아니라 체호프의 휴머니즘과 도스토옙스키의 논쟁적 대화까지도 계승하는 점에서 러시아 문학의 전통을 잇는다. 그러나 19세기보다 20세기는 더 어둡다. 19세기에는 전쟁의 영웅들이 승리하고 평화가 왔지만, 영웅이 사라지고 평화도 없는 20세기의 삶은 운명적이다.
21세기는 어떨까? 아마도 더 어두울 것이다. 그래도 그로스만의 주인공들처럼 운명을 선택하는 결단을 내리고 죽음에 이르러서도 결코 인간다움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인 저항과 투쟁이다. 살아남는 대신 소년과 함께 가스실을 선택하거나 가스실 건설 현장의 투입을 거부하고 죽음을 선택하는 결단과 같이 운명을 스스로 선택하는 사람들의 거룩한 삶이다. 그로스만도 그렇게 살았음을 모스크바 서쪽 트로예쿠로보 공동묘지 구석에 버려진 듯한 그의 작은 무덤에서 느낄 수 있었다.
▶ 박홍규 : 영남대 명예교수(법학). 노동법 전공자지만, 철학에서부터 정치학, 문학, 예술에 이르기까지 관심의 폭이 넓다. 민주주의, 생태주의, 평화주의의 관점에서 150여권의 책을 쓰거나 번역했다. 주류와 다른 길을 걷고, 기성 질서를 거부했던 이단아들에 대한 얘기를 격주로 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