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도. 대한해협에 놓인 역사의 섬이자 쓰시마로 불리는 국경의 섬. 그 섬으로 가는 바닷길로 아침 8시30분 정기 여객선 씨플라워호가 부산항 국제여객터미널을 떠났다.
영도다리와 오륙도를 뒤로 하고 현해탄을 항해한 지 1시간반쯤 지났을까. 끝없이 펼쳐지는 망망대해가 단조롭게 느껴질 무렵 멀리서 점 하나가 눈 앞에 들어왔다. 여객선은 쓰시마의 북쪽 해안을 지나쳐서 남쪽 해안을 따라 1시간쯤을 더 항해한 뒤 이즈하라항에 한무리의 사람과 짐을 떨궈냈다.
국제여객터미널답지 않게 자그마한 항구를 빠져나오자 이즈하라 시내 들머리 도로 오른편에 400여년 전 조선통신사의 첫 기착지임을 나타내는 표지판이 눈에 띄었다. 조선통신사는 1607년 일본 에도 막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집권초기에 시작돼 1811년까지 200여년에 걸쳐 12차례나 이뤄진 한·일 문화교류 행사였다. 조선 최고의 예능인들로 구성된 대규모 사절단은 일본에 한반도의 선진 문물을 전했다. 이즈하라 시내를 가로지르는 하천 다리 난간에도 조선통신사의 행렬을 묘사한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또한 사찰과 관공서에는 조선통신사가 묵었다는 표석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이즈하라에서는 해마다 8월의 첫째 토·일요일에 조선통신사 행렬을 재현하는 아리랑마쓰리가 벌어진다.
이처럼 쓰시마 곳곳에는 조선통신사를 비롯해 우리 역사와 선조의 숨결이 배어 있는 유적들을 넉넉하게 간직하고 있어 일본 속의 한국을 느끼게 한다.
옛 이즈하라 성안에 자리잡은 나가사키 현립 쓰시마역사민속자료관을 찾았다. 민속자료관 입구부터 조선통신사의 비와 조선통신사를 맞이하기 위해 지은 고려문이 반긴다. 1977년 설립된 민속자료관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조선통신사 행렬을 묘사한 16.58m 길이의 두루마리 그림이었다.
민속자료관의 오모리 키미요시(62) 연구원은 “조선통신사는 도요토미시대가 빚은 잘못된 한·일간 관계를 개선하는 귀중한 행사”라면서 “행사를 준비하는데도 몇년이나 걸릴 정도였다”고 설명했다. 전시관에는 고려판 대장경·대반야경과 고려청자, 한반도에서 전래된 융기문·무문 토기, 팔찌, 조선 간행본 <훈몽자회> <첩해신어> 등 우리 유적들이 일본어와 한국어 설명과 함께 전시되어 있었다. 대부분 무로마치시대(1338~1578)에 소오가로 계승되어온 대마도주들이 한반도에서 가져온 것이다. 안내 팸플릿에도 “쓰시마의 문화사는 한반도와의 교류사 없이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쓰시마가 멀리 죠몬시대부터 조선과 구주 양쪽 모두와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입니다”라고 적혀있다.
쓰시마역사민속자료관 근처 이즈하라체육관 앞 소공원에는 고종의 외동딸인 덕혜옹주의 결혼기념비가 외롭게 서있다. 비문에는 ‘이왕가·소오가 결혼봉축기념비’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는데 일제에 의해 대마도주 아들과 강제 결혼한 뒤 정신병을 앓다가 숨져간 옛 왕가 여인의 비운을 보여주었다.
이즈하라체육관 돌담을 끼고 개울을 따라 5분쯤 서쪽으로 걷자 낮은 산 아래 고풍스런 사원인 반쇼인이 나타났다. 쓰시마를 지배해온 소오가의 19대 요시토시의 명복을 빌기 위해 만들어진 사원이다. 도쿠가와 역대 장군의 위패가 있는 일본 3대묘지 가운데 하나로 일본 국가지정사적 사료다. 오른편 돌계단에는 대마도주들의 묘석이 석문들과 더불어 줄지어 서있으며, 실내에는 조선 임금이 선린외교에 힘쓴 역대 대마도주의 죽음을 애도해 하사한 제기 삼구족이 보관돼 있다.
이즈하라는 특히 구한말 항일의병의 상징인 면암 최익현의 넋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시내 입구에서 오른편 주택가 골목길을 따라 5분여쯤 올라가자 백제의 사찰 슈젠지가 나온다. 면암은 74살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1906년 의병을 일으켜 항일 운동을 하다 일본군에 붙잡혀 쓰시마로 유배됐으나 뜻을 굽히지 않고 단식투쟁을 벌이다 그해 11월 순국했다. 면암의 주검은 이곳에서 장례를 치른 뒤 부산으로 이송되었으나 그의 꿋꿋한 기개는 1986년 세워진 ‘대한인최익현선생순국지비’로 남아있어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이즈하라항이 내려다보이는 왼편 언덕배기에는 조선통신사 일행이 묵었던 객관인 세이잔지가 있다. 절을 들어서자 조선시대 유학자인 학봉 김성일 선생 시비와 함께 첫 조선통신사 안내자로 임진왜란 때 고니시 유키나카의 선봉군 앞잡이였던 쓰시마 승려 겐소의 석탑이 있다.
이즈하라 마치에서 미쯔시마 마치를 거쳐 북쪽으로 가다 쓰시마 중앙부 토요타마 마치의 사시카 해안에서 와타즈미 신사를 만났다. 쓰시마의 대표적인 신사로 바다의 신을 모신 이곳에는 독특하게 바다에 2개, 육지에 3개의 신사의 문 ‘도리이’가 있다. 특히 도리이의 방향이 서쪽 바다, 곧 한국쪽을 향하고 있는 쓰시마 신사들의 특징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어 쓰시마 신사가 한반도에서 건너왔을 가능성을 점치게 한다.
카미아가타 마치의 서북쪽 해안로에 자리잡은 한적한 어촌인 미나토에서 신라의 충신 박제상 기념비석을 찾았다. 그는 일본에 볼모로 잡혀간 신라 왕자 미사흔을 구하고 자신은 붙잡힌 뒤 자신을 회유하는 왜왕에게 “나는 계림의 개 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는 되지 않을 것이며, 계림의 모진 종아리는 맞을지언정 왜국의 작록은 받지 않을 것이다”고 외치고 목숨을 잃었다.
카미쓰시마 마치의 최북단 포구 와니우라 언덕에는 조선역관사들의 넋이 서려있다. 1703년 2월5일 조선 역관사 108명을 태운 배가 와니우라 포구로 들어오다 기상악화로 조난을 당해 전원이 숨진 참사를 당했다. 1991년 양국 유지들이 ‘조선국역관사 조난 위령비’를 세웠으며, 1997년에는 그 옆에 한국전망대를 올렸다. 팔각정의 전망대에 오르자 서북쪽 아득히 수평선 너머로 부산항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옛 역사 속의 우리 땅으로 추정되고 있는 쓰시마는 불과 49.5㎞ 밖에서 가깝고도 먼 나라로 놓여있다.
쓰시마/정상영 기자
chung@hani.co.kr
|
가는 길 부산 국제여객터미널에서 대아고속해운이 대마도 남단 이즈하라 마치의 이즈하라항과 북단 카미쯔시마 마치의 하타카츠항으로 화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1회 왕복 운행한다. 요금은 왕복 13만원.
부산 →이즈하라=월·금·토요일 오전 10시30분, 목요일(둘째, 넷째) 오전 8시30분 출발. 이즈하라 →부산=월·금·토요일 오후 3시, 목요일(둘째, 넷째) 오후 4시 출발.
부산 →하타카츠=수·일요일 오전 10시30분. 목요일(첫째, 셋째, 다섯째) 오전 8시30분 출발. 하타카츠 →부산 오후 4시30분 출발
대아여행사 (02)514-6226.
대아고속해운 (051)465-1114, 이즈하라 지점 (81)9205-2-3138, 히타카츠 지점 (81)9208-6-3218.
잘 곳 대마도 이즈하라와 하타카츠에 대아고속해운과 대아여행이 운영하는 유일한 한국인 호텔 대아호텔이 있다. 1인 1조식 7500엔,
또 미쯔시마 마치의 아소만 해안에 한국인이 운영하는 민숙(민박) 오션베이(051-817-1819)와 재일동포가 운영하는 민숙 대마도(81)9205-4-5234, 친구 등이 있다. 1인 1조식 5000~6000엔. 식사와 함께 낚시를 비롯한 여행정보를 얻을 수 있다.
먹거리 대마도에서는 전복, 소라 등 해산물과 활어회를 값싸게 즐길 수 있다. 또 갓 잡은 생선과 어패류를 구운 이시야키, 대마도의 토종닭과 제철 어류, 특산 표고버섯 등을 이용한 전통적인 찌개요리인 이리야키 등을 비롯해 사슴 요리, 멧돼지 요리, 메밀소바 등도 있다.
여행정보 통화=쓰시마는 지역적 특수성으로 인해 엔화 이외에는 쓰이지 않는다. 또 신용카드로 결제되는 곳도 거의 없다. 따라서 출국전에 필요한 만큼 엔화로 환전해 두어야 한다.
국제전화=쓰시마에는 국제전화가 없으므로 호텔에서 한국교환원과 연결해 통화해야 한다.
자동차 렌탈= 대마도는 해안도로와 산악도로가 잘 발달하여 있고, 운행 차량이 적어 안전하게 드라이브를 즐길 수 있다. 반드시 국제운전면허증을 갖추고 있어야 하며, 운전석이 오른쪽에 있다. 1300~1600㏄ 소형 4인용 승용차를 1일(24시간) 빌리는데 7000~1만엔
특산물=일본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는 아소만 진주가 첫손에 꼽힌다. , 팥빵인 카스마키, 와카다강 유역에서 산출되는 돌로 만든 벼루와 깊은 산에서 자란 표고버섯, 대마도 특유의 팥빵인 카스마키 등도 유명하다. 이와 함께 자연산 전복과 가리비, 소라도 값싸게 사서 가져올 수 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