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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여행·여가

눈높이로 국경을 넘었다…우리는 섬사람이었구나

등록 2017-10-03 15:39수정 2017-10-04 09:55

이르쿠츠크역에서 동쪽으로 내달리자
객실에선 한국산 간편식 인기몰이
이광수의 꿈 간직한 도시 치타 거쳐
러시아국경역 자바이칼스크 도착

과거·현재 공존하는 중국땅 만저우리
‘동방의 모스크바’라 불렸던 하얼빈엔
청년 안중근과 음악가 정율성의 자취
단둥 앞 압록강엔 참게 잡는 북한 어부
러-중 국경역 자바이칼스크로 향하는 열차가 치타역 승강장에 서 있다. 시베리아 남동부 도시 치타에서 동쪽으로 가면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는 시베리아 횡단철도 본선이, 남쪽으로 가면 만주 횡단철도가 뻗어 있다.
러-중 국경역 자바이칼스크로 향하는 열차가 치타역 승강장에 서 있다. 시베리아 남동부 도시 치타에서 동쪽으로 가면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는 시베리아 횡단철도 본선이, 남쪽으로 가면 만주 횡단철도가 뻗어 있다.
[토요판] 르포
이르쿠츠크~단둥 철도기행

▶ 일제강점기까지만 해도 서울역(경성역)은 국제역이었다. 개성, 평양과 신의주를 거쳐 만주 횡단열차와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유럽대륙까지 내달렸다. 물리적 한계는 우리의 상상력마저 쪼그라들게 했다. 러시아 이르쿠츠크를 출발해 시베리아 횡단 노선과 만주 횡단 노선을 따라 중국 단둥을 거쳐 배편으로 인천에 되돌아오는 여정을 따라가보자.

밤 9시17분 이르쿠츠크역에서 동쪽으로 가는 열차에 올랐다. 열차는 바이칼 호수를 끼고 달렸지만 밤은 호수를 어둠 속에 숨겼다. 주기적으로 울리는 기적 소리와 열차 창에 반사되는 객실을 보며 시베리아를 내달렸다. 날이 밝자 승객들은 각자 준비한 아침을 먹었다. 가장 인기 있는 것 중 하나는 용기라면 도시락이다. 도시락은 러시아에서 보통명사로 쓰인다. 한국에서 수출된 간편식이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터줏대감이 됐다. 러시아 승객들은 라면 국물에 마요네즈를 듬뿍 풀어 먹었다. 열차가 정거장에 설 때마다 마을 사람들이 박스에 음식물을 담아와 팔았다. 튀김만두, 감자고로케, 삶은 달걀 같은 것들을 싼값에 내놓았다.

열차는 밤새 달리고 한낮을 또 달려 다음날 오후 5시40분 시베리아 남동부 도시 치타에 도착했다. 동쪽으론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는 시베리아 횡단철도 본선이, 남쪽으론 만주 횡단철도가 뻗어 있다. 7시30분에 출발하는 만주의 러시아 국경역 자바이칼스크행 열차로 갈아타기 위해 광장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치타는 춘원 이광수가 1914년 미국행 꿈을 키우며 여비가 오기를 기다리던 도시다.

당시 연해주와 만주에는 한인들이 몰려들었다.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조선의 해방을 위해 뛰었다. 이광수는 그중에서 치타의 민족주의자 단체인 대한인국민회에서 발간하는 <대한인정교보>의 주필이었다. 샌프란시스코행을 간절히 원하던 이광수는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유럽행 철도가 막히자 치타를 떠났다. 이광수가 치타를 떠날 때 탔던 노선이 바로 치타-만저우리-하얼빈으로 이어지는 만주 횡단철도 노선이다. 만저우리-하얼빈 노선은 동청철도라 불렸던 노선의 일부다. 러시아는 청일전쟁에 패한 청나라를 후견해 일본과 담판을 벌였다. 러시아는 배상금을 대폭 삭감해 청의 이익을 대변하는 듯했으나 그 대가로 만주를 횡단하는 철도 부설권을 챙겼다. 만저우리-하얼빈-블라디보스토크로 이어지는 동청철도는 시베리아 횡단 노선의 지름길이자 러시아와 중국, 일본의 이해관계가 얽힌 화약고이기도 했다.

국경 넘기 전 광궤에서 표준궤로 바꿔

저녁 7시30분. 열차는 남쪽을 향해 기적을 울렸다. 누군가 돌린 보드카 몇 잔을 기울이다가 2등칸 4인실의 안락함에 기대 잠을 청했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 몽상 속에 언뜻 눈을 감았다가 차장이 객실 통로를 돌며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을 깼다. 러시아 국경역인 자바이칼스크역까지는 러시아 관할 철도로 선로의 궤도 간격이 넓은 광궤다. 국경을 넘으려면 열차의 바퀴 모듈인 대차를 중국이 채택한 표준궤로 바꿔야 한다. 국경의 작은 역 대합실에서 4시간을 기다렸다. 마침내 국경 통과 열차 탑승 안내방송이 나왔다. 공항보다 엄격한 출국 수속을 마치고 승강장으로 나갔다. 딸랑 한 량의 객차가 소형 디젤기관차에 달려 있었다. 반사경이 달린 막대를 가진 경비대원은 열차 밑에 매달린 밀입국 시도자가 있는지 살피기 위해 기관차와 객차 밑을 검색했다.

오전 11시. 열차는 기적을 세 번 울리고 자바이칼스크역을 출발했다. 깔끔한 정복을 입은 중국 국경경비대가 객실을 순회했다. 출발한 지 5분도 안 돼 국경을 가로지르는 철조망을 지나 중국 지역으로 들어왔다. 승객들은 객실 통로로 나와 창밖을 바라보며 눈높이로 국경을 넘는 체험을 하고 있었다. 20분 만에 도착한 만저우리역은 지금까지의 풍경과 완전히 달랐다. 국경을 살짝 넘었다고 문자와 말, 음식 냄새조차 다를 수 있는지 신기했다. 작은 국제선 청사 옆의 국내선 역은 웅장하게 광장을 품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서울역(경성역)도 과거엔 국제역이었다. 서울역에서 단둥, 베이징, 하얼빈을 갈 수 있었고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통해 유럽으로 이어지는 강철벨트와 연결돼 있었다. 물리적 한계는 상상력조차 갉아먹었다. 우리는 대륙을 잊은 섬사람이 되어버렸다.

오후 5시10분에 출발하는 열차시간까지는 여유가 생겨 주변을 둘러봤다. 만저우리 번화가는 역 뒤편에 있다. 수십개의 선로 위를 가로지르는 육교를 넘으면 시가지를 향해 서 있는 동상이 보인다. 중국 혁명가 저우언라이다. 당연히 마오쩌둥 동상일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변경 만주에 서 있는 저우언라이는 오늘날의 중국을 어떻게 생각할까? 웅장한 건물들이 거인처럼 사람들을 내려다봤다. 1904년 개점했다는 식당도 보였다. 국경의 작은 마을 정도로 생각했던 만저우리는 20세기 역사를 품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도시였다.

하얼빈행 열차는 정시에 움직였다. 2등실 4인 침대칸은 안락했다. 바로 뒤칸은 침대차가 아닌 일반 좌석이 연결돼 있었다. 양쪽의 승객이 이동할 수 없게 통로문은 잠겨 있었다. 밤새 달리는 열차에서 좌석을 구하지 못한 입석 승객들은 좌석 사이에 서 있거나 통로에 쪼그려 앉았다. 열차는 만주 벌판을 기운차게 달렸다. 가끔씩 말 무리가 보이거나 소 떼가 풀을 뜯는 장면이 나타났다. 열차는 밀어내고 밀어내도 헤어 나올 수 없을 것처럼 광대한 벌판을 가로질렀다. 지평선은 끝없이 펼쳐졌다. 마침내 태양이 땅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벌판은 저문 태양이 쏟아낸 붉은 기운을 열차의 승객들에게 고스란히 반사했다. 광원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만주 벌판의 밤은 또 다른 선물을 선사했다. 하늘 가득 펼쳐진 별들이 열차를 따라 달렸다. 좀체 잠을 이룰 수 없었기에 2층 침대에서 내려와 창가에 이마를 바짝 대고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지평선 바로 위에 보이는 북두칠성이 반갑게 인사했다.

팔로군 행진곡 작곡한 정율성

12시간 넘게 달린 열차는 다음날 오전 6시 하얼빈역에 도착했다. 하얼빈은 ‘동방의 모스크바’로 불렸던 도시다. 동청철도를 얻은 러시아는 하얼빈을 중심으로 철도를 관장했다. 상허 이태준은 하얼빈을 가리켜 좋은 의미로나 나쁜 의미로나 종적을 감추려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던 도시라고 했다. 1909년 10월26일 청년 안중근은 하얼빈역 승강장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기다리며 외투 주머니의 권총을 만지작거렸다. 연해주 일대에서 조선 독립과 사회주의 혁명을 이끈 여성 혁명가 김 알렉산드라는 하얼빈에서 성장했다. 김 알렉산드라의 아버지는 동청철도에서 통역을 맡았던 지식인으로 딸에게 “조선인과 중국인 노동자들의 고통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이곳은 혁명에 반대하는 군부와 귀족, 부패한 성직자들이 몰려들어 반혁명군의 기지가 됐다. 일본군이 만주를 장악한 뒤에는 항일 무장세력과 토벌대, 밀정들이 뒤섞인 공간이었다. 일본군에 잡힌 항일투사들은 하얼빈시 외곽에 있는 731부대로 끌려가 생체실험 대상이 됐다.

하얼빈에는 안중근 말고도 또 한 명의 한인 기념관이 있다. 광주 출신 음악가 정율성이다. 조선 독립의 의지를 갖고 중국으로 간 정율성은 약산 김원봉 밑에서 활동을 하다 팔로군이 된다. 중국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대장정의 최후 기지 옌안(연안)에서 활동하던 정율성은 옌안송을 작곡해 스타덤에 오른다.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첩첩산중의 동지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만들었던 옌안송은 어디에서나 울려 퍼졌다. 이어서 만든 노래가 팔로군 행진곡이다. 전사들은 너도나도 팔로군 행진곡을 부르며 항일 혁명투쟁에 나섰다. 마침내 중국이 혁명에 성공한 뒤 팔로군은 정식 군대인 중국 인민해방군이 됐다. 정율성의 팔로군 행진곡은 중국 인민해방군가로 채택돼 지금도 인민해방군의 사열식에 제일 먼저 울려 퍼지는 노래로 자리잡았다.

같은 날 오후 4시44분 거대한 하얼빈 서역에서 단둥행 고속열차에 올랐다. 과거 중국 철도를 상징하는 것은 낙후성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세계 최고의 고속철도 노선, 세계 차량시장 점유율 1위. 중국의 철도 굴기는 현재진행형이다. 기술의 발전도 눈부시다. 하얼빈 서역을 출발한 고속열차는 흔들림 없이 선로 위를 미끄러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광판엔 시속 305킬로미터란 안내가 떴다. 장춘과 선양을 차례로 통과한 고속열차는 정시에 단둥에 도착했다.

눈을 떴다. 호텔 창밖에는 압록강 철교가 아침 안개에 덮여 있었다. 철교의 끝은 북한 땅 신의주. 국제역이었던 서울역에서 개성과 평양을 지나 한나절이면 다다를 수 있던 길이지만, 며칠을 들여 돌아왔다. 압록강을 따라 나 있는 단둥의 강변길은 잘 정비돼 있었다. 맑은 강에서는 사람들이 수영을 했다. 강 한가운데엔 고려 장군 이성계가 군대를 되돌렸다는 위화도가 있다. 위화도는 압록강을 따라 길게 펼쳐진 섬으로 북한 영토다.

단둥 시내를 벗어나 압록강변을 따라 달리다 보면 유람선 선착장이 하나 있다. 이곳에서 100위안(한화 1만7천원)을 주고 모터보트를 타면 압록강 북한 관리구역을 볼 수 있다. 압록강에서는 북한의 어부가 참게잡이를 하고 있었다. 중국인 모터보트 기사는 어부의 배 옆으로 다가가 엔진을 껐다. 어부는 두 사람이었고 부자지간이었다. 젊은 어부는 압록강의 참게는 맛이 별나다고 태양에 검게 그을린 얼굴에 어색한 웃음을 담아 말했다. 강둑에서 빨래하는 여성들도 보였다. 한 병사는 자동소총을 멘 채로 강변 자갈밭 위에서 무료한 듯 먼 곳을 바라봤다. 북한 지역 경비대 막사에는 붉은색 한글이 담벼락에 쓰여 있었다. 모터보트가 북한 관할지역인 섬 쪽으로 가까이 가자 인민군 병사가 보였다. 섬 기슭 경운기 엔진을 얹은 낡은 보트 위에 앉은 북한군 병사는 AK47 소총을 메고 있었다. 병사는 하루에도 수차례씩 경험하는 일인 듯 짜증이 묻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사진은 찍으시면 안 됩네다. 사진 찍지 마시라요.” 어부에게 했던 인사를 이 인민군 병사에게도 똑같이 해줬다. “남에서 왔습니다. 고생이 많습니다. 통일돼서 만납시다.” 모터보트는 선수를 돌리느라 물살을 크게 일으켰다.

3등 선실 마룻바닥의 피곤한 삶들

단둥항을 빠져나온 배는 압록강 하구를 벗어나 서해바다로 들어섰다. 갑판에 서 있으면 바닷바람이 머리카락을 일으켰다. 인천으로 향하는 배의 승객 상당수는 힘겨운 삶을 돌파해보려고 발버둥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전용 화장실과 욕실이 구비된 6인실 침대칸의 값을 지불할 생각이 없었다. 3등 선실 마룻바닥에 놓은 짐을 베개로 삼은 피곤한 삶들은 철야농성장 같은 풍경을 연출했다. 김정은과 트럼프의 전쟁 불사 언쟁과 소원해진 한-중 관계 현실은 한국과 중국을 오가는 사람들에게 반가울 리가 없다.

환상적인 서해의 일몰을 배경으로 갈매기들이 따라붙었다. 갈매기들을 보니 ‘중립국’을 외쳤던 소설 <광장>의 주인공 이명준이 문득 떠올랐다. 많은 이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간다. 다롄, 상하이, 톈진, 단둥…. 서해 뱃길을 탔던 수많은 사람들. 박헌영, 주세죽, 김원봉, 이동휘, 김구, 이광수, 정율성…. 서해바다는 이들이 품었던 꿈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밤이 깊어지자 바다는 짙은 암흑 덩어리가 되었다. 배가 바다를 갈라 일으키는 물보라만이 달빛을 받아 온통 어둠인 곳에서도 길이 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글·사진 박흥수 기관사·사회공공연구원 철도정책 객원연구위원

시베리아 횡단열차와 만주 횡단열차 노선의 갈림길인 러시아 치타역 승강장에서 열차를 타고 내리는 승객들.
시베리아 횡단열차와 만주 횡단열차 노선의 갈림길인 러시아 치타역 승강장에서 열차를 타고 내리는 승객들.
만저우리에서 하얼빈으로 가는 열차 차창으로 내다본 일몰 광경.
만저우리에서 하얼빈으로 가는 열차 차창으로 내다본 일몰 광경.

하얼빈 시내 정율성기념관에 전시돼 있는 정율성의 젊은 시절 모습.
하얼빈 시내 정율성기념관에 전시돼 있는 정율성의 젊은 시절 모습.

만주 횡단철도 침대칸 객실 내부 모습.
만주 횡단철도 침대칸 객실 내부 모습.

북한 국경경비대 병사들이 압록강변 기슭에 대놓은 보트 위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북한 국경경비대 병사들이 압록강변 기슭에 대놓은 보트 위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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