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 9월16일(현지시각) 워싱턴DC 백악관에서 ‘인플레이션 감축법'에 서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미국이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을 통해 전기자동차 공급망에서 중국을 배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가운데, 중국 기반 배터리 업체가 미국 현지에 대규모 투자를 하겠다고 발표해 눈길을 끈다.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 시행으로 미국 전기차 배터리 시장이 국내 업계로 고스란히 넘어올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 많았는데, 이런 예측과 반대로 움직인 사례라서다.
6일 배터리 업계에 따르면, 중국에 본사를 둔 배터리 업체 고션하이테크가 독일 완성차 회사 폴크스바겐와 합작법인을 설립한 뒤 23억6000만달러(약 3조1천억원)를 투자해 미국 미시건주에 배터리 소재 공장을 세우기로 했다. 고션하이테크는 중국 전기차 배터리 회사로, 2020년 폴크스바겐이 이 회사 지분 26%를 사들여 최대 주주가 됐다.
국내 배터리 업계에선 고션하이테크와 폴크스바겐 합작법인의 대규모 미국 현지 투자 결정을 놓고 다양한 해석이 나온다. 고션하이테크와 합작법인을 중국 기업으로 봐야 하는지, 독일 기업의 중국 현지법인으로 봐야 하는지에 대한 잣대가 불분명해서다. 인플레 감축법에 따르면, 중국 기업은 미국 현지 생산 등 법안에 명시된 조건을 충족시켜도 보조금을 받지 못한다.
미국 제네럴모터스(GM)와 LG에너지솔루션의 합작법인 ‘얼티엄셀즈’의 미국 오하이오주 제1공장 모습. 얼티엄셀즈 제공
박재범 포스코경영연구원 수석연구원은 “법안 적용 범위에 대한 해석의 여지가 있어 향후 추이를 지켜봐야 한다”면서도 “중국 쪽이 일부 지분을 갖고 있는 기업들이 합작법인을 설립하는 방식으로 북미시장 진출을 추진 중인데, 인플레이션 감축법 취지를 고려하면 해외 우려 단체(foreign entity of concern) 규정의 적용을 받아 이 기업들이 생산한 배터리를 장착했거나 소재를 사용한 전기차는 보조금 혜택을 받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이 주목하는 부분은 미국 연방정부와 주정부 간 이해관계가 다르다는 점이다. 미시간주는 고션하이테크에 1조원 가량의 인센티브를 주기로 했다. 현대자동차그룹이 전기차 공장을 짓기로 한 조지아주의 연방 상원의원 라파엘 워녹이 현대차그룹에 유리한 수정법안을 내놓은 것 역시 같은 흐름이다. 천서형 엘지(LG)경영연구원 연구위원은 “일자리 창출을 희망하는 주정부와 연방정부의 입장이 다를 수 있다. 주정부들이 연방정부의 큰 지침을 공통적으로 따르지만, 자신의 주에 이익이 되는 상황이라면 그에 상응하는 인센티브를 줄 수도 있다”고 말했다.
한덕수 국무총리가 지난 10월15일(현지시각) 미국 애틀랜타 웨스틴호텔에서 전기차·배터리 관련 한국 기업 초청 좌담회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중국 업체들이 미국 정부의 보조금을 받지 않고도 가격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내비친 것이란 의견도 나온다. 국내 한 배터리 제조사 관계자는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이 회사가 원가 경쟁력을 바탕으로 보조금을 받지 않아도 미국 현지에서 사업이 가능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다른 제조사 관계자는 “중국 현지법인에서 중국 배터리 제조사들이 보조금을 받지 않는 걸 전제로 미국 진출을 준비하고 있다는 동향보고가 자주 올라온다”고 전했다.
전문가들은 중국 업체들의 이런 움직임을 들어,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 덕에 한국 배터리 제조사와 소재 업체들이 미국시장을 독식할 수 있을 것이란 장밋빛 전망을 거둬들여야 한다고 조언한다. 익명을 원한 배터리 전문가 ㄱ씨는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한국 배터리 업체가 미국 시장을 독식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팽배해지며 법 통과 이후 너도나도 미국 투자를 발표하고 있다”며 “미국이 하나의 국가에만 이득이 되는 상황을 그대로 둘까 하는 의문이 든다. 아직 법안의 구체적인 내용이 나오지 않아 불확실성이 큰 터라 신중함을 기할 필요가 있고, 보조금 정책은 정책 기조에 따라 쉽게 철회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안태호 기자
ec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