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3월, 정몽구 현대그룹 공동회장은 자동차 계열사들을 이끌고 현대그룹으로부터 계열분리를 해 현대차그룹을 만들었다. 당시 현대그룹에서 분리될 계열사는 10개, 자산은 약 31조700억원으로 자산 규모가 재계 5위였다. 이후 정몽구 회장은 세계 자동차 산업에서 전례가 없는 최단기간에 글로벌 생산판매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홀로서기 20년 만에 현대차그룹은 계열사 54개, 자산 234조원(2019년 기준)으로 국내 재계 2위에 올랐다. 현대·기아차는 글로벌 완성차 판매량 5위다. 한겨레 아카이브(기록보관소)를 통해 정몽구 회장의 삶을 들여다봤다. 해설 김선관
2000년 현대그룹 ‘왕자의 난’은
정몽헌의 승리로 마무리되고
정몽구는 현대차그룹 만들어 분리
20년만에 계열사 54개
글로벌 완성차 판매량 5위
곤혹스러운 비자금 사건도
1988년 12월14일치 <한겨레> 12면 현대자동차 광고. 프레스토는 포니의 후속 차종으로 출시된 1세대 엑셀의 세단 타입이다. 1986년 현대차는 엑셀과 프레스토로 미국 진출 첫해 16만8천대를 팔았을 만큼 인기를 누렸다. 이 기록은 미국에 첫 진출을 한 자동차 회사 중에서도 가장 높은 기록이다. 하지만 잦은 고장과 열악한 애프터서비스(AS)로 판매가 감소하며, 현대차에 대한 이미지를 떨어뜨렸다.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1997년 현대그룹 창립 50주년 행사 모습이다. 정주영 명예회장과 정몽구 그룹 회장이 축하 케이크를 자르고 있다. 이때만 해도 정몽구 회장은 정주영 명예회장의 후계자로 거의 확정적이었다. 활짝 웃는 정몽구 회장의 표정이 그때의 분위기를 말해주는 듯하다. 김진수 기자가 찍었다.
1988년 5월27일치 7면, ‘정몽구’라는 이름 석 자가 <한겨레>에 처음 등장했다. 기사는 한국청소년연맹에서 대기업 사장 등을 이사로 위촉하는 방법으로 120억원의 각종 기부금을 받아왔다는 내용이다. 당시 정몽구의 직책은 현대정공 회장이었다. 현대정공은 정몽구에게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가 현대정공에서 거둔 성공을 바탕으로 지금의 현대자동차그룹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몽구는 1970년 현대자동차 서울사업소 부품과 과장으로 현대그룹에 입사해 현대건설 자재부 부장, 현대차 서울사업소 이사 등을 거치다가 1977년 컨테이너와 H빔을 제조하는 현대정공의 초대 사장을 맡았다. 그의 아버지인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에게 경영 능력을 보여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고, 정몽구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세계 컨테이너 시장의 주도권을 일본에서 뺏어오는 데 성공하고, 1985년에는 현대차량을 흡수·합병해 철도차량 부문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하기도 했다.
정주영 명예회장은 정몽구의 능력을 알아보고 현대차를 그에게 넘겨줄 생각을 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세간에 현대차는 정세영 회장이 키운 이미지가 너무나 짙었기 때문에 동생이 키운 기업을 빼앗는다는 부정적인 여론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자동차공업 통합 조치가 해제된 1980년대 후반 현대차를 꽉 잡고 있던 정세영 회장을 견제하기 위해 정주영 명예회장은 현대정공에 완성차 사업 분야를 위한 신규 투자를 지원했다. 이때 정몽구는 아버지의 지원에 힘입어 네바퀴굴림 스포츠실용차(SUV) 개발에 착수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사람들의 삶이 향상되면서 레저활동 붐이 일어나는 시대적인 흐름이 주된 이유였지만, 당시 현대차는 네바퀴굴림 에스유브이 제작 계획이 전혀 없어 형제 기업끼리 다툼의 여지가 없다는 점도 꽤 큰 구실을 했다.
1995년 3월2일치 <한겨레21> 현대차 갤로퍼 광고. 갤로퍼는 현대정공에 있던 정몽구 회장을 현대차로 이끌어준 매우 중요한 차다. 출시 3개월 만에 3천대를 넘게 판매하며 네바퀴굴림 자동차 시장에 파란을 일으켰다. 1992년에는 2만4천대를 판매하며 국내 네바퀴굴림 자동차 시장의 50%를 넘게 차지했다.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정세영 회장은 정주영 명예회장의 셋째 동생으로 1967년 현대차를 설립하고 초대 사장을 맡았다. 1976년 국내 최초의 독자 생산 모델 포니를 만들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때 붙은 별명이 ‘포니정’이다. 32년간 자식처럼 키워온 현대차를 정주영 명예회장의 한마디에 포기했던 정세영은 회장 이임식에서 회사 노래를 부르다가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1999년 5월 곽윤섭 기자가 찍었다.
정몽구는 미쓰비시 자동차 파제로(1세대)의 기술을 받아 1991년 갤로퍼 생산에 성공한다. 갤로퍼는 출시한 지 3개월 만에 3000대가 팔렸고, 이듬해엔 국내 네바퀴굴림 에스유브이 시장의 50% 이상을 차지했다. 정몽구는 정주영 회장에게 역량을 인정받아 1995년 현대그룹 회장에 오른다. 갤로퍼의 성공은 현대차의 경영권이 정세영에서 정몽구로 넘어가는 명분이 됐다. 결국 1999년 정세영도 모르게 이·취임식이 거행됐고, 정세영은 현대차 명예회장이, 정몽구는 회장이 됐다. 현대정공부터 현대차 회장에 오르기까지 정몽구는 정주영 명예회장의 엄청난 총애를 받은 것으로 알려진다. ‘현대는 이제 정몽구 시대’, 1996년 1월18일치 <한겨레21> 기사 제목이다. 당시 기사만 봐도 정주영 명예회장의 뒤를 이을 사람은 정몽구가 유력시됐다. 게다가 현대그룹은 철저한 장자 상속 법칙을 고수했다. 정몽구는 차남이지만 장남의 사망 후 실질적인 장남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정몽헌(5남)이라는 변수가 나타났다. 정주영 명예회장이 현대건설과 현대전자에서 경영 능력이 두드러졌던 정몽헌을 그룹 공동회장으로 올린 것이다. 당시 거의 모든 미디어는 현대그룹의 후계구도 향방에 포커스를 맞췄다. <한겨레>와 <한겨레21>에도 누가 현대그룹 후계자가 될 것인지를 다룬 기사가 꽤나 많이 실렸다.
1995년 3월 주간지 <한겨레21>의 표지. 당시 현대그룹의 ‘왕자의 난’은 모든 미디어의 관심을 끌었다. 그들이 집중한 것은 누가 정주영 명예회장의 후계자가 되느냐였다.
1997년 정몽구 공동그룹회장과 정몽헌 공동그룹회장이 현대 창사 50주년 기념식장에 함께 앉아 있는 모습이다. 당시 사람들은 정몽헌 회장이 후계자 싸움에서 승리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대그룹의 모기업인 현대건설이 2000년 10월 1차 부도를 맞고 휘청거리다 2001년 8월 채권단에 넘어갔다. 박승화 기자 촬영.
1998년 1월 정몽구 회장이 현대그룹을 대표해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와 조찬을 함께 하며 기업구조조정 방안을 협의하고 있다. 곽윤섭 기자 촬영.
1999년 기아차를 찾았던 정주영 명예회장과 정몽구 현대그룹 회장의 표정이 상당히 굳어 있다. 2년 전 현대그룹 50돌 행사장 때의 표정과는 사뭇 다르다. 이정우 기자 촬영.
그리고 2000년 3월, 현대그룹의 경영권을 놓고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 정몽구는 현대차, 기아차, 현대정공, 인천제철, 현대강관, 현대우주항공을, 정몽헌은 현대건설, 현대전자, 현대종합상사, 현대상선, 금강기획 등 계열사와 대북사업을 맡고 있었다. 자동차만으로 후계자 경쟁에서 밀릴 것으로 생각한 정몽구는 현대증권을 노리고 정몽헌이 해외 출장 간 사이 그의 측근인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을 고려산업개발로 전속·보직시켰다. 출장에서 돌아온 정몽헌은 이익치 회장의 인사 발령을 무효화하고 정몽구를 그룹 공동회장에서 박탈했다. 하지만 정몽구는 정주영 명예회장에게서 회장직 복귀 명령을 받아내지만 몇 시간 뒤 정몽헌이 명예회장을 만나 그 명령을 무효로 만들었다. 당시 정주영 명예회장은 고령으로 판단력이 흐렸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결국 정주영 명예회장이 현대경영자협의회에서 정몽헌 단독회장 체제를 공식 승인하며 왕자의 난은 정몽헌의 승리로 마무리됐다. 정몽구는 2000년 9월 자동차 계열사들을 이끌고 현대그룹으로부터 계열분리를 해 현대자동차그룹을 만들었다. 12월엔 서울 서초구 양재동으로 사옥을 옮기며 현대차의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렸다. 2000년 12월28일치 18면 <한겨레> 기사에 이러한 내용이 자세히 실렸다. 정몽구 회장은 인사말을 통해 “사옥 이전을 계기로 미국·유럽 등 선진국과 일본·중국·러시아 등 미개척 시장을 적극 공략해 수출 확대로 국민경제 재도약에 앞장서겠다”고 말했다.
2000년 6월26일 오전 서울 현대 계동 본사에서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과 디터 체체 다임러크라이슬러 아시아·남미 담당 사장이 두 회사의 전략적 제휴에 대한 기자회견을 마친 뒤 악수하고 있다. 김정효 기자가 찍었다.
2004년 사진. 자동차업계에서 친환경차 이슈가 스멀스멀 나올 때였다. 후에 정몽구 회장은 하이브리드뿐 아니라 순수전기차, 수소차 등을 연이어 내놓으며 내연기관차에서 전기차로의 전환을 준비했다. 김종수 기자 촬영.
정몽구 회장의 경영 전략은 ‘빠른 추격자’였다. 독일이나 미국의 선진 자동차 제조사들을 벤치마킹(혹은 제휴)해 그들과의 기술적 격차를 줄였다. 그리고 2002년 중국, 2004년 미국, 2010년 러시아, 2012년 브라질 등에 공장을 세우며 생산 물량을 빠르게 늘려나갔다. 현재 세계 8개 나라에서 총 13곳의 완성차 생산 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미국 시장에서의 ‘10년, 10만마일 보증 실시’는 현대·기아차가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는 데 토대가 되기도 했다. 20년 만에 현대차그룹 수준의 글로벌 생산판매 네트워크를 구축한 것은 세계 자동차 산업에서도 전례가 없는 속도다. 어느 외국 매체에서는 이 같은 정몽구 회장의 추진력을 ‘현대 스피드’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비자금 조성’은 대기업 총수들이 법정에 서는 단골 죄목이다. 정몽구 회장 역시 6개 계열사를 통해 수백억원대의 비자금을 조성했다. 이 일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사회봉사명령 300시간을 선고받으며 실형을 피할 수 있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2008년 삼성 이건희, 2003년 에스케이(SK) 최태원 등 다른 재벌 회장들도 모두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받아 실형을 면했다는 것이다. 2008년 김진수 기자 촬영.
과거 현대차는(지금도 어느 정도는 이어지지만) 같은 값이면 더 큰 차, 같은 크기면 더 다양한 기능들로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반면 제네시스는 기본 성능(움직임, 승차감, 안전성, 핸들링, 내구성 등)과 디자인에 집중했다. 결실을 맺기까지 오래 걸리진 않았다. 2019년 미국 <모터트렌드>는 ‘올해의 차’로 G70을 선정했고, 2019년 미국 시장에서 제네시스가 71만대 넘게 팔리며 역대 최고 판매량을 경신했다. 2009년 서울모터쇼에서 이정아 기자 촬영.
양적 성장에만 집중한 건 아니었다.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에 세계적 규모의 연구개발(R&D) 센터를 설립하고 독자 엔진과 수소연료전지 파워트레인에 집중했다. 그리고 2013년 정몽구 회장은 또 하나의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현대차그룹의 고급차 브랜드를 론칭하는 것이다. 이는 대중차만 만들던 현대차가 글로벌 고급차 시장에 진출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정몽구 회장의 마지막 숙원 사업이었다. 일단 제네시스라는 자동차를 내놓은 다음 독립적인 고급차 브랜드로 키운다는 장기적인 계획이었다. 2013년 11월25일치 19면 <한겨레> 기사처럼 제철소를 직접 방문해 강판 생산라인까지 챙길 만큼 애정을 쏟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빠른 성장엔 그늘도 있었다. 2006년 4월26일치 <한겨레> 기사를 보자. 정몽구 회장이 2002년부터 현대차그룹 6개 계열사를 통해 조성한 수백억원대의 비자금 중 20억여원을 개인적으로 사용한 것이다. 그리고 2008년 6월3일 법원은 환송심에서 정몽구 회장에게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하고 300시간의 사회봉사를 명령했다. 비자금 조성에 대해서 개인적 이익 추구가 아닌 사회적 여건과 관행에서 기업 생존을 위해 사용한 것이라고 재판부는 판단했지만, 당시 사람들의 여론과 시민단체들은 ‘전형적인 재벌 봐주기 식’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정 회장은 환송심에서 사회공헌기금 8400억원을 매년 1200억원씩 사재로 7년간 헌납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현금과 계열사 주식을 합쳐 약속한 금액의 일부를 출연하였으나 여전히 미흡하다는 시각이 있다.
지난 2월24일 정몽구 회장은 현대모비스 주주총회에서 등기이사직을 사임하고 그룹 경영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 정몽구 회장의 삶이 현대차그룹이 걸어온 길이었다. 몇몇 과오와 논란 등에도 불구하고, 시대를 앞선 그의 통찰력과 전략적인 결단은 자동차업계에서 평가될 것이다.
▶ 해설자인 김선관은 자동차 전문 잡지 <모터트렌드> 에디터입니다. 사람들과 모여 작당모의하는 걸 즐겨 대학 때는 영화를 제작했고, 지금은 잡지를 만들고 있습니다. 관심사는 사람, 방향, 풍류이며, 속이 꽉 찬 한량을 꿈꾸고 있습니다. <한겨레> ESC, <노블레스맨>, <아레나>, <에스콰이어> 등에 글을 썼습니다.
▶ 팩트스토리는 전문직·실화 소재 웹소설·웹툰 및 르포 논픽션 기획사입니다. 저널리즘 바깥으로 확장하는 실화를 추구합니다.
<한겨레>가 지령 1만호를 맞아 그동안 ‘시간의 극장-한겨레 아카이브 프로젝트’를 매주 선보였습니다. 33년 사진, 기사, 지면 이미지 등의 아카이브를 활용하여, 중요 사건과 인물을 현대사 콘텐츠로 재탄생시킨 작업입니다. 해당 주제를 잘 아는 해설자가 관련 한겨레 사진과 기사를 선정하고 독자에게 해설했습니다. 소개된 적 없는 비컷(B-cut) 사진도 발굴하여 공개했습니다. 르포, 전문직 소재 웹소설 기획사 팩트스토리가 기획하고 한겨레와 공동으로 제작했습니다. 시즌3인 25~36화는 주로 기업·기업인 이야기로 꾸몄습니다. ’시간의 극장’은 한겨레출판에서 단행본으로 출간될 예정입니다. 그동안 애독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