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달러와 유럽의 유로 지폐, 러시아 루블 동전이 함께 놓여 있다. 타스 연합뉴스
위기 때 더 빛나는 달러.
세계 대전 이후 영국 파운드로부터 기축통화 지위를 물려받은 미 달러는 이후 70년 남짓 동안 유로와 엔(일본), 위안(중국) 등 숱한 도전자들을 물리치고 세계 금융시장에서 가장 강력한 화폐로서의 위상을 잃지 않고 있다. 21세기 들어 러시아가 별도의 결제 시스템을 구축하는 등 ‘탈달러’를 위해 수년 간 준비했지만 최근 우크라이나 사태를 계기로 달러 패권만 재확인되고 있다. 달러가 강한 이유는 뭘까.
“다른 통화를 쓰고 싶어도 상대방이 받아주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기축통화의 힘이다.” 지난 대통령 선거 기간 기축통화가 논란거리로 부상할 당시 경제부처 당국자가 꺼낸 말이다. 기축통화의 핵심은 다름 아닌 ‘신뢰’라는 얘기다. 또다른 전문가는 같은 맥락에서 “전 세계가 큰 위기에 빠졌을 때 거래가 가능한 유일한 통화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라”고 반문한다. 실제 올해 들어 세계 경제의 고물가, 경기 침체 우려가 커지자 달러 수요는 더 커지고 있다. 안전자산으로서의 달러 매력이 부각됐기 때문이다. 주요 6개국 통화에 대한 달러의 상대 가치를 보여주는 달러인덱스는 지난 28일 99선을 돌파하면서 코로나19 초기인 2020년 5월 이후 최고치를 찍었다.
우크라이나 사태에서도 달러의 저력은 재확인된다. 러시아는 2014년 크림반도 병합 이후 탈달러화에 공을 들였다. 그런데도 러시아 금융기관 외환 거래의 약 80%는 달러로 이뤄지고 있었으며, 지난달 미국이 달러 거래를 차단하자 금융시장이 크게 흔들렸다. 러시아와 중국이 달러를 겨냥해 만든 대체 국제 거래 결제망도 예상보다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분위기다. 위안화 국제결제시스템(CIPS)은 달러가 아닌 위안화 결제만 가능해서다. 한 정부 관계자는 “국제 거래에서 달러 대신 위안화를 준다고 하면 누가 선뜻 반기겠는가. 시아이피에스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독보적 신뢰를 받는 달러 패권의 배경에는 오랜 기간 여러 요소가 결합해 형성된 전 세계인의 암묵적 동의가 깔려있다. 무엇보다 미국이 경제력은 물론 정치·군사적으로도 강대국이라는 점이다. 미국이 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덕택에 달러에 대한 신뢰도 유지되고 있다. 세계 패권의 역사와 기축통화의 역사가 일치하는 이유다.
달러는 유동성 측면에서도 다른 화폐를 뛰어넘는다. 전 세계인이 달러를 자유롭게 쓰려면 그만큼 공급량이 많아야 한다. 미국은 수십년째 상당한 무역적자를 감내해가며 이 기능을 유지해오고 있다. 또한 달러에 기반을 둔 미국 국채도 발행량이 많음에도 가치가 떨어지지 않으면서 ‘안전 자산’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여기에 미국은 1970년대 중반부터 사우디를 군사 지원하는 대가로 오직 달러로만 원유를 결제하는 ‘페트로 달러’의 지위도 가진 상태다.
준기축통화로 불리는 유로, 파운드, 엔, 위안 등은 이러한 조건에서 볼 때 달러를 대체하기에는 역부족이다. 2002년 도입된 유럽연합(EU)의 화폐 유로의 국제 결제 비중이 올해 2월 기준 37.79%로 그나마 달러(38.85%)를 추격하고 있으나 단일 국가가 아닌 탓에 국채 발행 등 유동성 공급에 한계가 존재한다. 엔은 일본의 완화적 통화정책 지속, 역성장 우려 등으로 올해 들어 달러 대비 가치가 6년 만에 최저치까지 추락하면서 불안정한 모습이다.
중국은 지난 15일부터 사우디와 석유 대금을 위안으로 결제하기 위한 협의에 나서면서 ‘페트로 달러’에 도전장을 내민 상태이나 실제 합의로 이어지질 가능성은 낮은 분위기다. 사우디가 미국에 불만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정치적 행위에 그칠 여지가 크다는 얘기다. 중국 위안은 국제 결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23%에 불과한 상황이다.
성태윤 연세대 교수(경제학)는 <한겨레>에 “기축통화가 되려면 화폐 물량이 풍부해 거래에 불편함이 없어야 하며, 상당한 양의 국채를 발행해도 국가 신인도가 영향을 받지 않아야 한다”며 “이러한 조건을 가진 기축통화는 사실상 지금 미국 달러밖에 없다”고 말했다. 달러 패권이 영원하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쉽게 깨지지도 않을 것이란 뜻이다.
전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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