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케이션 컨설팅 기업인 스트리밍하우스의 신동훈 대표가 19일 제주시 구좌읍 세화 해변 인근 카페에서 업무를 하고 있다.
에메랄드빛 바다가 펼쳐진 제주 세화 해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업무를 시작한다. 회사 팀장과 모바일로 업무 메시지를 주고받고, 사내 직원들에게 법정 의무교육 안내 메일을 보내다 보니 점심시간이 됐다. 고민 끝에 고른 메뉴는 현지인 친구가 추천한 접짝뼈국(제주식 하얀 뼈해장국). 점심 뒤 팀 화상회의에서 팀장에게 잔소리를 들었지만 창가 너머 바다를 보며 언짢던 기분을 가라앉힌다. 얼른 잔업을 마치고 칼퇴근해 숙소 주변 성산일출봉 맛집 탐방을 할 생각을 하니 절로 힘이 솟는다.
지난 19일 제주시 구좌읍 질그랭이센터(제주 세화마을협동조합)에서 만난 전자상거래 기업 티몬 피플실(인사팀) 조승현(37) 씨의 하루 일과다. 그는 회사가 직원 복지를 위해 도입한 ‘워케이션’(일+휴가, Workation)을 떠난 ‘1호 직원’이다. 컨설팅 회사에 다니다 지난해 이직해 새 회사 적응과 폭풍 업무에 지칠 무렵, 팀장의 추천으로 워케이션을 오게 됐다. 8개월 된 딸과 아내를 집에 두고 오기 미안해, 가족들과 함께 제주행 비행기에 올랐다. 항공편과 숙소 비용은 회사에서 지원받아 지갑 걱정을 할 필요도 없었다.
워케이션은 일(Work)과 휴가(Vacation)를 합친 신조어다. 집이나 사무실이 아닌 장소에서 업무와 휴가를 동시에 할 수 있는 새로운 근무제도다. 2015년 전후 디지털 기기를 활용해 장소 제약 없이 자유롭게 일하는 ‘디지털 유목민’들의 휴가지 이색 근무 모습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됐다. 시간이 지나면서 글로벌 항공사와 여행 관련 기업들이 휴가 상품 개발 등의 목적으로 워케이션을 활용했지만, 코로나19 확산과 함께 비슷한 제도들이 종적을 감췄다. 이후 일상회복 시기에 맞춰 정보통신기술(ICT) 기업을 중심으로 워케이션 도입에 다시 관심을 보이면서 ‘포스트 재택근무’의 새 문화로 주목받고 있다.
티몬 직원 조승현씨가 딸과 함께 제주에서 워케이션을 즐기고 있다. 조승현씨 제공
조씨는 “오기 전 걱정과 달리 휴가지에서 일하는 게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고 했다. 지난 3년간 코로나19 재택근무로 원격 근무가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회사 업무 공유 플랫폼에 한 주간 할 업무계획을 미리 적어두고, 필요할 때 메신저와 화상회의를 할 수 있어서 업무에 별 차질이 없다. 머리가 복잡할 땐 문밖 해변을 잠시 걸으면 스트레스를 날린다. 집에서 하는 재택근무 때처럼 업무와 휴식 공간이 분리되지 않아 피로도가 높았던 문제도 해소됐다. 그는 “가족들과 퇴근 뒤 여행을 즐기려면 집중력을 높여야 해 업무 능률도 두배는 높아진 것 같다”고 했다. 무엇보다 함께 온 워케이션을 계기로 가족들의 회사에 대한 호감도도 상승했다.
정보통신기업들이 워케이션을 도입하는 배경에는 빠르게 늘어난 엠제트(MZ·밀레니얼+제트)세대 직원들 영향이 크다. 코로나19 확산 전후 입사해 재택근무를 경험한 엠제트세대 사원들에겐 사무실 근무가 퇴사를 앞당기는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실제로 취업포털 잡코리아가 재택근무를 시행해 본 기업 395곳을 상대로 재택근무가 직원 채용이나 퇴사 예방에 효과가 있는지를 물었더니, 2곳 중 1곳(50.9%) 꼴로 ‘그렇다’고 답했다. 지난달 경기연구원이 도 관할 사업체 노동자와 인사담당자 400명을 설문조사한 결과에서도 ‘노동조건이 같다면 재택근무하는 기업에서 일하겠다’고 답한 응답자가 85%로 훨씬 더 많았다.
티몬은 전체 직원 850여명의 평균 나이가 31살이다. 20대가 40%, 30대가 50%인 전형적인 엠제트(MZ) 기업이다. 코로나19 대유행 3년 사이 새로 입사한 직원 비율도 40%를 넘는다. 엔데믹(감염병의 풍토병화)에 맞춰 서울 본사 규모를 대폭 줄이는 대신 성수·홍대·을지로 등에 거점 사무실을 마련해 자유롭게 일하는 스마트 앤 리모트워크(smart & remort work·TSR) 시스템을 도입했지만, 엠제트 사원들 앞에 닥친 포스트 재택근무 시대를 대비하는 방책도 시급했다.
워케이션에 대한 직원들의 반응은 뜨겁다. 이수현 티몬 피플실장은 “지난주부터 직원 50명을 제주도, 남해, 부산에 보냈는데 참여 직원들의 만족도가 아주 높았다”고 말했다. 이 실장은 “3년 전을 돌이켜보면, 팀원들이 책상 앞에 없으면 불안한 마음도 컸지만 막상 재택근무를 해보니 오히려 업무 성과가 더 좋았다”며 “근무 공간을 집에서 휴가지로 바꾸는 것만으로 젊은 직원들의 창의적인 발상도 끌어낼 수 있어 제도가 더 확대될 것 같다”고 했다.
제주 세화마을협동조합이 운영하는 질그랭이센터 안에 워케이션 직원들을 위한 공유오피스가 마련돼 있다.
일본의 경우, 인구 감소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지역을 살리기 위해 2017년 전후부터 정부가 나서 기업들의 워케이션 정책을 장려하며 관련 산업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일본 야노경제연구소 조사 결과, 2020년 기준 일본 워케이션 시장은 699억엔(약 7천억원) 규모로 성장했고, 2023년엔 1077억엔까지 커질 것으로 예상됐다.
워케이션 컨설팅 기업 ‘스트리밍하우스’ 신동훈 대표는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젊은 기업들이 새 근무 방식을 고민하고 있고, 추가 관광수요 유치에 적극적인 지방자치단체들의 이해관계가 맞물리며 국내 워케이션 산업도 빠르게 커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주중 관광수요를 늘리기 위해 워케이션 유치에 적극적인 지자체들의 지원금을 보태면, 기업들은 직원 1인당 하루 5만원 정도의 비용으로 워케이션 추진이 가능하다. 기업 쪽에선 큰 비용을 쓰지 않고 추가 복지를 제공하면서 창의성을 높일 수 있고, 직원 쪽에선 휴가를 쓰는 부담을 줄이면서 휴가지로 떠날 수 있다”며 “회사와 직원 모두에게 ‘윈윈’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많은 기업이 워케이션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시제이이엔엠(CJ ENM)은 지난해 말부터 제주시 월정리에 거점 오피스를 만들어 매월 직원 10명에게 한 달간 제주 근무 기회를 주는 제도를 운용 중이다. 한화생명도 그룹사가 운영하는 강원도 양양의 브리드호텔의 한층 전부를 원격근무 공간으로 만들어 워케이션을 시행하고 있다. 여행숙박 플랫폼 야놀자와 푸드테크 스타트업 야맘마, 핀테크 기업 토스·핀다 등도 젊은 직원들을 위해 워케이션 제도를 도입했다. 재택근무가 자리 잡은 정보통신업을 중심으로 워케이션이 도입되고 있지만 향후 직원 복지 차원에서 서비스업과 유통업까지 제도가 확대될 가능성이 크다.
워케이션 직원들에게 공유오피스, 숙소, 카페 등의 공간을 제공하는 제주 징그랭이센터에선 티몬·폴라리스오피스 등의 직원 10여명을 만날 수 있었다. 워케이션 현장에서 만난 직원들은 “어디서 일하느냐보다 어떻게 일하는 지가 중요하다”며 “휴가와 재택근무를 합친 워케이션 문화가 널리 확산했음 좋겠다”고 입을 모았다.
제주/글·사진 옥기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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