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롬 파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이사회 의장이 2022년 6월15일 기준금리 결정에 관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REUT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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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11월8일, 밀턴 프리드먼(노벨경제학상 수상)의 90살 생일을 축하하는 학술 행사가 열렸다. 이 행사에서 당시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 의장 벤 버냉키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겨 우리가 통화정책을 이해하는 데 프리드먼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보여줬다. ‘대공황에 대한 선생님의 지적은 옳았습니다. 우리(연준)가 대공황을 초래했습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하지만 선생님 덕분에 다시는 그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 것입니다.’” 최근 번역 출간된 <새뮤얼슨 vs 프리드먼>(원서 2021년)에 실린, 박기영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 위원이 쓴 추천서문의 한 대목이다.
“중앙은행이 대공황을 키웠다!” 프리드먼이 <미국화폐사, 1867~1960년>(1963년)의 백미로 꼽히는 제7장 ‘대공황, 1929~1933년’에서 한 주장이다. 그는 1920년대 말 세계 대공황이 연준의 통화량 관리 실수로 빚어졌다며 당시의 실물경제지표 대비 통화량 증가율 추이 등 실증데이터를 근거로 제시했다.
20년 전 버냉키의 말은 지켜지지 못한 약속이 됐다. 연준은 이번 글로벌 인플레이션 정책대응에서 ‘실기’했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이른바 ‘때늦은 판단과 행동’(behind the curve)인데, 통화긴축으로 방향전환해야 할 적절한 때를 놓치는 오판을 범했고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번진 뒤에야 행동에 나섰다. 미국 인플레이션율은 이미 2021년 6월에 전년 동월 대비 5%를 넘었고 연말에는 7%로 더 뛰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4조달러에 이르는 초대형 경기부양책을 내놓자 연준은 물가급등 지표가 이어지는데도 천문학적 규모의 재정지출에 보조를 맞춰 돈을 계속 풀었다.
또 시간이 지나면 수그러들 ‘일시적인 인플레이션’이라고 잘못 인식했다. 그사이 2022년 2월24일 우크라이나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 인플레이션율은 이미 8%까지 근접했다. 놀란 연준은 그제야(3월16일) 정책금리(연방기금금리)를 기존 제로금리에서 0.25~0.50%(목표범위)로 올렸다. 그러나 한참 늦었다. 경제전문가들은 “아마 미국 통화정책 역사상 최대 실수 중 하나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라고 말한다.
미국 소비자물가가 거의 15%까지 올랐던 1980~1981년에 폴 볼커 연준 의장은 정책금리를 연 21%까지 끌어올리는 ‘볼커 쿠데타’로 간신히 ‘가장 나쁜 경제적 질병’(물가)을 잡았다. 20세기 역사상 인플레이션에 가장 강력한 대응이었다. 이번 물가 국면에서 통화정책에 대해 시장과 경제주체가 얼마나 신뢰하느냐가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 한국은행이든 연준이든 물가를 진정시키는 임무를 달성할 수 있을지는 지금부터 향후 몇 개월간 경제주체가 “공세적인 금리 정책수단을 써서,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반드시 물가를 빠르게 잡아내겠다”는 중앙은행의 말을 얼마나 믿을 것인지에 달렸다.
연준에서 통화정책 방향을 결정하는 투표권을 가진 위원(12명)도, 한은 금융통화위원회 위원(7명)도 미래를 내다보는 수정구슬을 가진 건 아니다. 하지만 이들은 물가안정은 물론 고용·성장까지 고려해 금리를 1년에 8차례 최적의 속도와 폭으로 현명하게 변경하는 일을 떠맡은 ‘현자들’로 불린다. 프리드먼은 대공황 원인이 통화정책 실패에 있다고 분석한 또 다른 책 <거대한 위축>(1965)에서 “대개 신중하지 못하고 기만적인 이론가들은 사실을 부주의하게 선택하고 범주화하면서 선후 인과관계를 혼동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연준 현자들이 이번에 그런 이론가가 된 것일까?
한겨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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