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26일 대구 달서구 성서산업단지에서 열린 규제혁신전략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윤석열 대통령이 26일 대구 달서구 호림동 성서산업단지 내 반도체 설계 중소기업인 아진에스텍에서 새 정부의 첫 규제혁신전략회의를 열고 “경제 형벌 규정을 원점에서 과감하게 재검토해 나가야 한다”고 밝혔다. 공정거래법 등 경제 관련 법에 있는 징역·벌금 등 형벌 조항을 과태료 같은 행정 제재로 완화해 기업의 자유로운 경영 활동을 보장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야당 쪽은 이 같은 제재 수위 완화가 자칫 ‘재벌 특혜’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형벌을 완화하려면 야당 동의를 받아 법을 개정해야 하는 까닭에 실제 시행 여부도 미지수다.
윤 대통령은 이날 “정부의 중요한 역할은 민간이 더 자유롭게 투자하고 뛸 수 있도록 방해되는 제도와 요소를 제거해 주는 것이고 그 핵심이 규제 혁신”이라며 “새 정부의 진정한 혁신은 자유와 창의에서 나온다”고 말했다. 새 정부의 ‘민간 주도 성장’을 재차 강조한 것이다. 그러면서 윤 대통령은 “기업인들의 경영 활동이 위축되지 않고, 우리나라에서 많은 투자와 양질의 일자리 창출이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며 경제 형벌 조항을 두고 “글로벌 기준이나 시대 변화와 괴리된 부분은 원점에서 과감하게 재검토해야 한다”고 했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이날 윤 대통령에게 경제 형벌 규정 개선 추진 계획 및 1차 개선 과제 32개를 보고했다. 1차 개선 과제 32개는 지난달 구성한 정부 태스크포스(TF)가 17개 법률에서 개선이 시급하다고 판단한 것을 중심으로 선정했다. 예를 들어 지금은 공정거래법상 지주회사 설립·전환 신고 의무를 위반하거나 주식 소유 현황 등의 신고를 위반하면 1억원 이하의 벌금을 부과하지만, 앞으론 과태료(기업의 실질적 지배자인 동일인 1억원, 임직원 1천만원 이하)로 완화하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단순 신고 누락을 무거운 범죄처럼 제재하는 건 과도하다는 판단에서다.
이번에 정부 주도로 발굴한 1차 과제 32개엔 사회적으로 큰 논란을 빚을 만한 내용은 담기지 않았다. 그러나 앞으로의 사정은 다르다. 기재부와 법무부는 올해 4분기(10∼12월) 중 재계 등 민간단체가 요구하는 형벌 완화 방안을 집중적으로 검토해 개선안을 마련할 계획이다.
여기엔 기업이 공정위 조사 등을 방해할 때 가하는 제제 수위를 기존 징역·벌금형에서 행정 제재로 완화하는 방안도 검토 대상으로 포함돼 있다. 현행 공정거래법은 폭언·폭행, 고의적인 현장 진입 저지·지연 등을 통해 공정위 조사를 거부·방해하거나 기피하면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2억원 이하 벌금에 처하도록 하고 있다. 자료를 은닉·폐기하거나 접근을 거부하고 위·변조해 조사를 거부·방해하거나 기피하면 2년 이하 징역 또는 1억5천만원 이하의 벌금을 과한다.
공정거래법에 이런 처벌 규정이 생긴 건 삼성 등 대기업 집단(재벌) 때문이다. 앞서 지난 2011년 3월 삼성전자의 휴대폰 가격 부풀리기를 조사하기 위해 공정위 조사관들이 삼성전자 수원사업장을 찾아갔을 때, 삼성 쪽 고위 임원들의 지시로 조사관 정문 출입 저지, 조직적 증거 자료 폐기, 조사 대상자 컴퓨터 바꿔치기 등이 이뤄지며 사회적 파장을 낳았다. 이 같은 일은 당시 삼성뿐 아니라 에스케이(SK), 엘지(LG) 등에서도 반복됐다. 기업 쪽이 공정위 조사를 방해해도 과태료만 부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공정거래법 개정을 통해 2012년 5월부터 폭언·폭행 등을 통한 조사 방해엔 3년 이하 징역 또는 2억원 이하 벌금을, 2017년 7월부터는 자료 은닉·폐기 등에도 2억원 이하 징역 또는 1억5천만원 이하 벌금을 과하는 형벌 조항이 신설됐다.
그러나 현재 정부는 기업 쪽이 위계·폭행 등 불법 행위 없이 공정위 조사를 단순 거부할 경우엔 벌금이나 징역형을 부과하지 않고 행정 제재로 마무리하는 법 개정을 검토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경제통’인 이용우 의원은 이날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현재 범죄로 규정하고 있는 공정위 조사 방해 행위의 제재를 과태료로 되돌려놓으면 기업 입장에선 ‘그거 내고 말지’라고 생각할 수 있다”며 “다른 경제 형벌 규정의 경우 정비가 필요하다면 대신 기존 과태료와 과징금 한도를 대폭 높이는 등 행정 상의 제재를 징벌적 수준으로 함께 강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기재부 쪽은 “정부 내에서도 공정위 조사 방해 행위의 처벌 완화는 좀 더 신중하게 검토하자는 분위기”라며 “형벌 완화로 대기업보다 중소기업, 소상공인들이 혜택을 보는 부분이 더 크다”고 했다.
박종오 기자
pjo2@hani.co.kr 배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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