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는 학부(서울대 자원공학과) 때 ‘메이드 인 아메리카(Made in America)’(1988) 란 책을 읽고 기술정책에 관심을 갖게 됐다. 매사추세츠공대(MIT)가 미국 산업의 경쟁력이 일본에 뒤처지는 이유를 신랄하게 비판한 책이었다. 이 책에 충격을 받은 그는 한국의 산업에 대해서도 그렇게 할 수 있는 눈을 키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축적의 시간’ ‘축적의 길’ ‘최초의 질문’ 시리즈는 그의 오랜 고민을 담은 결과물이었다. 사진은 지난달 9일 서울대학교 연구실에서 이 교수 출국 전에 미리 찍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한국 산업의 미래 기술과 혁신 동력 찾기에 매진해온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는 한국이 ‘중진국의 함정’에 빠져있다고 진단했다. 그 대표적인 현상으로 의사와 변호사로의 우수 인재 편중을 들었다. “말기적 증상”이라는 표현까지 썼다.
공대에 입학하자마자 의대를 가려고 반수를 하는 학생, 1학년 때부터 로스쿨 준비를 시작하는 학생에 관한 이야기는 더이상 ‘뉴스’가 아니다. 그 오랜 시간 동안 우리 사회는 구조적 문제를 알면서도 개혁에 실패했고, 시간에 비례하여 성장 잠재력을 잃어가고 있다. 이 교수는 “우리가 지금 이만큼 살고 있는 것은 1970년대 가장 우수한 인재들이 전자과와 화공과, 기계과를 갔기 때문”이라며 “지대구조를 타파하지 않으면 한국 사회 미래가 없다. 안정적인 라이선스 직업군의 인센티브를 낮춰야 한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축적의 시간’(2015)과 ‘축적의 길’(2017), ‘최초의 질문’(2022) 등의 저서로 한국 사회에 큰 울림을 줬다. ‘남의 것을 가져와 빠르게 흉내내는 것으로 큰 성공을 거뒀으나, 성장의 한계에 부딪힌 한국의 산업이 세계를 선도하는 기술을 가지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라는 화두를 던졌다. 그의 문제의식으로 볼 때 현재 한국은 어떤 상태일까? 유럽에서 장기 출장 중인 그를 지난 28일 화상으로 인터뷰했고, 서면 등으로 보완했다.
―‘축적의 시간’과 ‘축적의 길’이 나온 지 각각 8년과 6년이 흘렀습니다. ‘축적의 길’에서는 한국경제가 1단 엔진 분리에 실패했다고 비유하면서 혁신역량의 양극화와 투자 성향 보수화, 제조업 기반 붕괴 등을 지적하셨습니다. 앞으로 5년 후의 미래가 더 걱정이라고 하셨는데, 그 5년이 지났습니다. 지금 우리는 교수님이 걱정하신 대로인가요, 아니면 괜찮은 편인가요?
“지난 5년간은 팬데믹과 미-중 기술패권 분쟁으로 인류사에 전대미문의 기간이었습니다. 모든 국가가 긴급재정투입을 하는 등 단기적으로 위기에 대응하는 데 역량을 집중했습니다. 단기대응력과 회복력이 누가 뛰어난가에 따라 위기대응과 위기 후 회복의 정도도 달라졌습니다. 한국은 비교적 선방했는데, 가장 중요하게는 제조업 기반이 강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국제적으로 보면 경제성장률이 가장 적게 하락한 국가가 제조업 기반이 강한 국가들이었습니다. 한국도 그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장기적인 성장잠재력, 혁신잠재력 부족의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있습니다. 단기적인 대응에 묻혀, 보이지 않는 것일 따름입니다. 혁신과 성장의 잠재력이 살아나려면 미래를 향한 도전적인 투자가 얼마나 많은가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팬데믹 시기는 물론이고, 올해 들어서도 기업들의 미래투자가 늘어날 전망은 보이지 않습니다. 대기업 투자는 물론이고 벤처기업에 대한 투자도 눈에 띄게 얼어붙고 있습니다. 미래를 향한 장기적이고 도전적인 투자의 붐을 살려야 진정한 혁신국가로서 세계에 내놓을 혁신을 창출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교수님께서 축적의 길로 제시한 ‘고수를 키우는 문화’와 ‘시행착오를 용인하는 사회’는 여전히 요원한 것 같습니다. ‘암기식 교육’과 ‘인내심 있는 금융’도 여전하거나 답보상태입니다. 위험공유가 아니라 위험회피·위험전가 사회라는 지적이나 중간혁신함정(중간소득함정)에 빠져있다는 지적도 여전히 유효한 것 같은데요.
“‘고수를 키우는 문화’ ‘시행착오를 용인하는 사회’ ‘위험전가 사회’ ‘중간소득 함정’ 등은 모두 한가지 현상에 관한 진단과 해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한 가지 현상이란 바로 도전의식이 줄어드는 것을 말합니다. 기업들도 신사업에 도전하기보다 기존 사업을 유지하는 데 골몰하고 있습니다. 위험을 최소화는 데 집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회 전반의 위험회피 성향이 심각하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우수 인재의 의대와 로스쿨 쏠림 현상을 보면 됩니다. 의대 진학생들에게 물어보면, 더 큰 꿈이나 더 큰 도전의 리스크를 감수하기보다 안정적으로 소득을 벌 수 있기 때문에 진학했다고 대답을 합니다. 로스쿨 학생들의 대답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세계은행이 발표한 중간소득함정에 관한 연구 가운데 인적자원과 관련된 연구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핵심은 간단합니다. 라이선스로 보장받는 안정적인 직업에 우수 인재가 몰리는 것이 중진국 함정의 원인이자 전형적인 현상이라고 지목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이 오늘의 산업과 기술 수준에 오른 것은 1970년대 가장 우수한 인재들이 전자과와 화공과, 기계과를 졸업해서 산업현장과 연구현장에서 활약했기 때문입니다.
우수 인재의 편중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한국 사회 비전은 전혀 없습니다. 정말 우수한 공대 입학생들이 입학하자마자 의대와 로스쿨 가려고 반수를 합니다. 말기적 증상입니다. 요즘 변호사들이 형사와 가사 사건을 전담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형사는 성범죄가 많아서고 가사는 이혼이 많아져서입니다. 어렵게 키운 인재들이 이런 일을 하는 국가에 십년 이십년 뒤를 보장할 수 있을까요. 입시가 아니라 우리 사회 인센티브가 문제입니다. 지대구조를 타파하지 않으면 한국 사회 미래가 없습니다. 안정적인 라이선스 직업군의 인센티브를 낮추어야 합니다. 반대로 기업가적 도전을 하는 데 대해서는 사회가 더 적극적으로 위험을 공유해줘야 합니다. 도전적 시도에 대한 국가적 투자도 더 과감하게 늘어야 합니다. 미국의 방위고등연구계획국(DARPA·다르파) 프로젝트들이 이런 위험을 사회가 공유하고자 하는 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국가의 혁신투자는 민간과 반대 사이클이어야
기업 투자 줄이는 지금 오히려 더 투자 필요
―‘최초의 질문’으로부터도 1년이 지났습니다. 혁신적인 질문자이자 최초 구매자로서 정부 역할의 중요성에 대해 지적하셨는데 지금 정부의 산업정책을 어떻게 평가하시나요?
“현 정부의 산업정책은 전략산업 및 전략기술 지원법 등에서 보듯이 특정 영역 육성 정책에 가깝습니다. 유럽, 일본, 중국 등의 글로벌 산업정책 추세, 즉 선별적 지원·육성정책과 유사합니다. 세계무역기구(WTO)에서 금지하는 규정과 관련해서 걱정할 만한 부분이 없지 않지만, 모든 국가가 사실상 다 쓰고 있으니 우리라고 안 쓸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런 정책이 잘 작동하려면 몇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첫째, 전략기술 및 전략산업에 대한 분석역량, 소위 테크 인텔리전스 역량이 정말 중요합니다. 미국의 경우에도 미국연구재단(NSF) 산하에 국가전략기술을 지원·육성하기 위한 조직을 만든 후 곧이어 국가전략기술평가단(National Alliance for Critical Technologies Assessment)이라는 프로젝트를 발주해서, 어떤 기술이 미국의 입장에서 중요한지, 현재의 경쟁력 상황은 어떤지 등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습니다. 의지를 증거 기반의 인텔리전스로 뒷받침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둘째, 반드시 국제적으로 개방된 협력전략을 기반으로 해야 합니다. 국내의 시각에만 갇혀서는 이류 기술만 양산하게 될 것입니다. 셋째, 객관적인 성과지표에 근거하여 일몰 규정을 두는 것이 중요합니다. 넷째, 정보를 공개하고, 민간과 정부가 협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원칙들이 지켜진다면, 부작용 없이, 도전적인 일을 추진해나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윤석열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시나요?
“기술혁신의 문제에 한정하여 재정정책을 논의한다면, 기술혁신을 위한 국가투자는 지금이 더 늘어나야 하는 중요한 시기입니다. 민간의 혁신투자가 줄어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혁신투자에서 국가와 민간은 반대의 사이클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경기가 어려울 것으로 전망하고 기업들이 투자를 줄이고 있는 이 시점, 특히 중장기 기술혁신에 대한 투자를 줄이고 있는 바로 이 시점이 국가의 기술혁신에 대한 투자가 보완적 역할을 해야 하는 중요한 시기입니다.”
―공격적인 감세로 올해 약 40조원의 세수펑크가 예상되는 등 곳간이 비어있는 상태입니다. 투자하고 싶어도 투자할 돈이 없는 상태입니다.
“중요한 일과 급한 일이 섞이면 중요한 일이 급한 일에 밀리는 것 같습니다. 어렵지만 중장기 과제를 먼저 챙겨야 합니다. 민간과 안티 사이클로 가야 합니다. 요즘 나오는 조사 결과들 보면 기업들이 연구개발(R&D)을 줄이거나 부서를 없애고 있거든요. 소나기가 지나가도록 공공투자가 우산을 받쳐주지 않으면 어렵습니다. 기업들이 투자를 줄인다면 제일 먼저 줄이는 게 연구개발입니다. 인력 안 뽑는다고 하면 제일 먼저 연구개발 인력부터 안 뽑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카르텔과의 전쟁을 벌이고 있는데, 예를 들어 연구개발도 나눠먹기 한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정부 연구자금을 부당하게 수령하거나 낭비하는 건 막아야겠지만, 대통령이 이렇게 공개적으로 언급하면 부정적인 영향이 클 것 같은 우려가 있습니다.
“연구개발 분야의 연구윤리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카르텔이 있다는 문제의식이 혹시나 연구개발 투자의 가시적인 성과가 없다는 등 비효율성 문제로 흐를 경우 도전적 연구개발을 구조적으로 가로막을 가능성이 큽니다.”
mRNA는 DNA를 코딩하듯이 20~30년 동안 연구
R&D 성과 따졌다면 전 세계 백신 못맞았을 것
―현장에서 정부의 연구개발 투자가 줄어들거나 위축되는 현상은 없나요?
“이제 연말에 성과 내야 하고 기술이전 성과 내놔야 하니까 걱정하기 시작하겠죠. 돈 1억원 썼으면 그만큼 효과가 나와야 하는 거 아니냐는 건 전형적인 예산당국의 사고방식입니다. 성과없이 연구개발만 퍼부었다는 건데요. 그렇게 치면 몇조원씩 쓰는 미국의 연구재단은 다 문 닫아야 합니다. 성과를 묻는 순간 단기과제만 하게 됩니다. 6개월 만에 성과 나오는 연구도 할 수는 있어요. 그런데 합성생물학이라는 분야를 예로 들어보죠. 컴퓨터와 생물학이 만난 분야거든요. 디엔에이(DNA)를 코딩하듯이 설계해보자는 겁니다. 말도 안 되는 얘기였죠. 근데 이 연구를 못했다면
mRNA 연구도 없었을테고, 그럼 전세계가 코로나 백신 못 맞았을 겁니다. 그 황당한 연구를, 20~30년 동안 말도 안 되는 연구를 미국에서 홀대받고 비웃음 사면서도 계속한 겁니다. 앞으로는 모든 신약 개발 패러다임이 그쪽으로 가게 될 겁니다. 이런 도전적 연구를 해야 하는데 단기적으로 성과가 있냐고 묻기 시작하면 못 버팁니다. 새로운 거 못하는 거죠.”
―문재인 정부 청와대 경제과학특별보좌관을 지내셨지요. 그땐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제가 하고 싶은 일의 1단계 정도가 이뤄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혁신조달이라는 정책인데요. 모든 선진국이 하고 있습니다. 정부가 물건 구매할 때 저가로 아무거나 사지 말고 혁신벤처 제품을 사는 게 좋겠다는 취지입니다. 정권이 바뀌었는데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서 문제 출제 역량을 키워야 합니다.
미국의 코핀이라는 회사는 마이크로 디스플레이 핵심모듈을 만드는 회사인데, 1980년대 후반부터 벤처로 출발한 엠아이티(MIT) 출신들이 만든 회사입니다. 미국 국방성이 이 회사에 계속 문제를 냅니다. 시제품을 30년간 만들었어요. 기술의 절대 강자가 되었죠. 에프(F)-35 조종사가 머리에 쓰는 디스플레이 모듈이 코핀이 만든 겁니다. 국방에서 문제를 내고 새로운 산업을 장악하는 겁니다.
다르파(미 국방부 산하 방위고등연구계획국)는 연구가 아니라 문제 출제 기관입니다. 군이 문제의식을 던지면 기술적으로 미래에 동원 가능한 수단이 뭔지 질문으로 바꾸는 일을 합니다. 최근에는 미국 에너지부가 다르파를 갖고 와서 다르파-이(E)로 스핀오프가 생겼습니다. 공공의 필요를 문제로 바꿀 수 있습니다. 부처마다 적용 가능합니다. 미국의 국토안보부도 국토안전 관련 문제를 기술적인 문제로 바꿀 수 없을까 하는 고민을 합니다.
저는 우리나라도 국가 행정 전반에 걸쳐서 일종의 특공대 같은 걸 만들면 어떨까 합니다. 국민과 국가 미래라는 관점에서 인프라, 환경, 보건복지, 도로교통, 감염병 등 혁신적 기술의 해법을 구하는 종합문제 출제 기관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너무 쉽게 만들 수 있습니다. 부처마다 에너지기술평가원이나 산업기술평가관리원, 국토교통과학기술진흥원 같은 곳에 수천 명이 일을 하는데, 파견받아서만 운영해도 충분히 가능할 겁니다. 모든 분야에 적용할 수 있어요. 예를 들어 교육부가 지역 학교들에 적용할 수 있는 친환경적이고 도전적인 문제를 내서 벤처기업에 풀게 하는 거죠. 싱크홀을 최첨단 기술로 사전감지할 수 있는지 판교 벤처들에 문제를 내보세요. 다들 달려들 겁니다. 레퍼런스(실적)가 되니까요. ”
―최근 타다 경영진이 대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습니다. 그런데 타다의 서비스는 이미 괴멸 상태입니다. 국회는 사후적으로 이른바 타다금지법을 만들었습니다. 이른바 타다 사태를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알고 보면 기술혁신 성공을 위해서 금융만큼이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곳이 국회입니다. 기술이 사회 속으로 들어와서 효과를 발휘하기까지 탄생, 육성, 규제 등 모든 단계와 영역에서 법제도가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진흥을 위해서도 의회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현재 미국이 하는 기업대상 직접 보조금 지원정책은 미국이 대외적으로 다른 국가들에 하지 말라고 하던 산업정책들입니다. 이런 정책들을 심지어 미국 의회가 주도해서, 특히 초당파적으로 만들어내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첨단 기술과 관련된 규제도 마찬가지입니다. 타다법이 대표적입니다. 신기술 규제는 금지와 허용의 두 극단적 선택이 아니라 조금씩 시험해가면서 수정해나가는 업데이트 시스템이 중요합니다. 최근에는 글로벌 규제와의 정합성도 중요합니다. 유럽의회는 유럽연합 기준의 데이터법 초안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을 위해 의회 차원에서 첨단기술의 미래에 대해 많은 공부를 하는 것은 물론입니다. 우리 국회는 첨단산업육성법의 사례에서 보듯 속도가 늦습니다. 규제 업데이트가 아니라 정파적 이해에 따라 전면 허용과 금지 양극단을 왔다 갔다 하면서 사회갈등을 오히려 부추기고 있습니다. 글로벌 규제와의 정합성은 큰일입니다. 어쩌면 기업들은 우리나라 국회가 그냥 가만 놔두었으면 하고 바랄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국회의 기술혁신에 대한 이해의 수준을 높이는 일이 정말 중요합니다.”
―“4차 산업혁명이라는 키워드가 시들해지고 다른 키워드가 떠오르면, 지금까지의 일들은 없던 것으로 하고, 위의 여러 가지 일들을 새로운 키워드에 맞추어 다시 반복할 것이다”라는 교수님의 문장은 우리 사회 문제를 날카롭게 드러냅니다. 지금은 4차 산업혁명은 흔적도 없고 모두 챗지피티(ChatGPT)만 이야기합니다.
“챗지피티도 4차 산업혁명 기술의 일종입니다. 계속 물결처럼 왔다 갔다 하면서 조금씩 밀려들어 올 것입니다. 조용하던 세상이 챗지피티 때문에 통째로 뒤집힐 것처럼 너무 흥분할 일은 전혀 못됩니다. 챗지피티는 하나의 비즈니스 모델로서 놀라움을 주고 있지만, 곧 여러가지 한계가 드러날 것입니다. 특히 신뢰성(할루시네이션과 편향성) 문제 때문에 규제와 타협하면서 안정적인 비즈니스 모델을 찾아 나가려 노력할 것입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면, 인간의 지능을 자동화하기 위한 노력은 계속될 것입니다. 특히 다양한 신호를 학습하는 멀티모달 기능이 향상되고, 또한 로봇 그러니까 물리 세계와 결합할 경우 새로운 패러다임이 열릴 것으로 예상합니다. 챗지피티가 돈이 될 것이냐, 우리도 개발해야 하느냐라는 질문보다, 챗지피티를 위시한 4차 산업혁명 기술이 범용기술로서 어떤 파급효과를 미칠 것이냐에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참고로 챗지피티의 GPT는 Generative Pre-Trained의 약자이지만, 범용기술을 의미할 때의 GPT는 General Purpose Technology입니다. ChatGPT라는 말을 듣고 GPT를 범용기술의 약자로 착각한 사람들이 많았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만큼 챗지피티 혹은 챗지피티로 대변되는 4차 산업혁명 기술은 범용기술로서의 잠재력이 큽니다. 범용기반기술은 산업과 사회 전반의 틀을 바꾸는 기술이며, 새로운 범용기반기술의 시대에는 필요한 핵심능력의 종류가 달라집니다. 쉽게 말해서 일자리의 지형도가 달라지고, 기술실업의 위험이 급격하게 커지게 됩니다. 그래서 로톡의 사태에서 보듯이 기존 업역에 있는 사람들이 격렬하게 반대하는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그래서 범용기술이 본격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면 사회적 갈등도 커질 것입니다.
말이 투표할 수 있었으면 자동차는 등장하지 않았다는 표현도 있지 않습니까? 이럴 때 국가의 일이 정말 중요합니다. 퇴출당할 수밖에 없는 산업과 그 산업의 종사자들이 새롭게 만들어지는 산업에 참여할 수 있도록 전환을 해주는 일이 정말 중요합니다. 여러가지 일이 있지만, 무엇보다 평생학습이 중요합니다. 평생학습은 1960년대 미국에서 기계화에 따른 실업에 대한 문제가 본격화되기 시작했을 때부터 가장 강력한 사회적 처방의 하나로 추진됐습니다.”
―평생학습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초·중·고교 지방교부금은 70조원이 넘는다는데 평생학습은 3조원 남짓으로 알고 있습니다. 완전 거꾸로 된 거죠. 초중고에 초점을 두는 교육 정책에서 빨리 벗어나야 합니다. 첨단산업 육성한다고 학과를 만드는데 4년 배우고 밖에 나오면 산업 트렌드가 바뀌어 버립니다. 대학을 졸업하면 23살인데 이때부터 진짜 교육을 해야 합니다. 지금 일하고 있는 사람들을 재교육해야 합니다. 반도체산업협회와 정부가 돈을 내서 만든 반도체아카데미라는 게 있더군요. 연령 관계없이 들어갈 수 있고, 교육을 받으면 반도체 전문가로 만들어 줍니다. 이런 사례들이 일반화해서 모든 분야에서 북적북적 국가적 붐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직업교육 담당이 고용노동부인데 여기 맡겨놓을 일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나라 노동자가 2700만명인데 이 사람들이 언제 어디서라도 교육받을 수 있는 코리아 아카데미 혁명이 필요합니다.”
―마지막으로 하시고 싶은 말씀은?
“우리나라 벤처기업이 구글에 팔렸다고 하면, 구글이 지분을 갖게 됐다고 성공사례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국내 대기업이 인수하면 문어발이나 기술탈취라고 합니다. 그래서 국내 기업들은 투자를 해외에 합니다. 역차별입니다. 아까워요. 원래는 국내에서 자본을 받고 힘을 키워서 밖으로 나가야 하거든요. 돈을 돌려야 합니다. 기업들 어렵다고 하지만 사내 유보금 제법 되거든요. 돈이 벤처로 돌아가게끔 고리를 풀어줘야 합니다. 사회문화적으로 대기업벤처투자(CVC, Coporate Venture Capital) 활성화가 안 돼 있어요.
또 하나, 협력적 기술주권에 관한 이야기인데요.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 집행위원장이 유럽판 반도체, 유럽판 데이터 얘기 많이 하는데요. 리투아니아나 체코, 프랑스, 스페인 모든 나라가 기술주권 이야기하면서 다 똑같이 에이아이(AI), 백신, 양자 얘기합니다. 말투가 똑같아요. 우리가 개발해야 한다, 이렇게요. 이러면 이류짜리 기술만 양산됩니다. 서로 협조하고 태피스트리처럼 아름답게 모아나가야죠. 현미경 10억원짜리 10대와 100억원짜리 1대 중 뭘 선택해야 할까요? 당연히 100억짜리 1대 사야죠. 해상도가 비교가 안 되잖아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글로벌 협력이 기본이 돼야 합니다.
한국이 글로벌 선진국이라면 남들이 존경할 만한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중의 하나가 글로벌 협력입니다. 이렇게 미친 듯이 다들 문 닫아걸고 있을 때 중진국 넘어선 어젠다를 던져야 합니다. 기후변화가 혼자 되겠냐, 인류가 바뀌어야 한다, 팬데믹처럼 국경을 넘나드는 환경이나 보건문제를 크게 내걸고 제발 협력하자, 좀 고매하게 수준높은 레토릭으로 인류를 위해 협력하자는 거룩한 이야기를 한국도 하면 어떨까요.”
s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