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우의 경제이야기
[열려라 경제] 이정우의 경제이야기
며칠 전 10월17일은 빈곤에 대해 큰 의미가 있는 날이었다. 1987년 10월17일 대규모의 인파가 파리의 트로카데로에 모였다. 이곳은 1948년 ‘세계인권선언’이 발표되었던 곳이다. 여기 모인 10만이 넘는 사람들은 빈곤, 폭력, 기아의 희생자들을 기렸다. 이들은 인간이 빈곤의 공포에서 해방되는 것만큼 중요한 인권은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 행사가 촉매가 되어 1992년 유엔(UN) 총회는 매년 10월17일을 ‘국제 빈곤퇴치의 날’로 정했다.
경제가 아무리 성장해도 빈곤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소득이 1인당 3만 달러가 넘는 선진국에도 여전히 빈곤이 남아 있다. 다만, 빈곤의 정도는 나라에 따라 큰 차이가 있다. 복지국가가 발달한 북구에서는 빈곤률이 5%, 유럽대륙이 9%인데 비해, 시장만능주의를 취하는 영미형 국가에서는 13%다. 복지를 경시하고 성장을 중시하는 나라일수록 빈곤에 빠질 위험이 크다.
제3세계의 빈곤은 선진국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심각하다. 세계은행은 1인당 하루 소득 1달러 미만을 ‘극빈’, 2달러 미만을 ‘빈곤’으로 정의하는데, 세계의 극빈 인구가 13억명이고, 빈곤 인구는 28억명이나 된다. 오드리 헵번이나 김혜자 같은 스타들이 빈곤 퇴치에 앞장섰지만 여전히 세상의 절반이 빈곤인구다.
2002년 2월 관리비를 못 내 단전, 단수된 대구의 한 영구임대아파트에서 정신질환을 앓던 중년 여성이 장기간 외부와 단절된 채 굶어 죽은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을 신고한 사람은 학교도 못 다닌 채, 정신질환 엄마와 함께 오래 굶주리던 14살의 딸이어서 더욱 충격적이었다. 그보다 좀 전에는 아버지를 여의고, 카드 빚에 시달리던 엄마마저 가출해서 혼자 살던 15살 소년이 학교 텃밭에서 옥수수를 입에 문 채 숨진 모습으로 발견된 적도 있다. 레 미제라블! 이토록 비참한 일이 잘 산다는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다.
1916년 일본에서는 교토대학 경제학 교수 가와가미 하지메(1879~1946)가 쓴 <가난 이야기>가 베스트 셀러가 되었다. 빈곤의 실상을 알리고, 사회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 쓴 이 책은 당시 수십만 독자의 심금을 울렸고, 일본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가와가미는 “참으로 돈 있는 사람에게는 오늘날의 세상만큼 편리한 곳이 없겠지만, 돈 없는 사람에게는 오늘날의 세상만큼 불편한 곳도 없을 것”이라고 썼다. 이념의 덫에 빠져 분배, 복지를 백안시하고 오직 ‘성장, 성장’만을 부르짖는 오늘날 한국에 그대로 들어맞는 말이 아니겠는가.
경북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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