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 사태를 계기로 법 절차를 무시한 채 제왕적 경영방식을 고수하고, 합리적 승계 프로그램 없이 총수 일가 간 경영권 다툼을 벌이는 재벌의 행태가 비판받고 있다. 이와 달리 3대째 70년 가까이 가족경영을 이어오면서도 다툼 없이 안정적 승계를 이루고,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해 지배구조 개선을 이룬 사례도 있다. 재계 4위의 엘지그룹이 대표적이다.
엘지는 해방 뒤인 1947년 구인회 회장이 락희화학공업사를 설립한 뒤 2대인 구자경 명예회장을 거쳐 3대인 구본무 회장까지 68년간 3대째 경영을 이어오면서도 장자승계 원칙을 지키며 경영권 분쟁을 한번도 겪지 않았다. 구 명예회장이 70살 때인 1995년 명예회장으로 물러난 것은 재계에서는 획기적인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당시 옆에서 지켜본 엘지의 한 전직 임원은 “다른 그룹의 분란을 많이 지켜보면서 건강할 때 물러나는 것이 좋겠다고 결심한 것으로 안다”며 “이를 통해 창업 세대의 동반퇴진과 세대교체를 자연스럽게 이룰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신동빈 롯데 회장도 평소 친분이 있는 이웅열 코오롱 회장이 부친인 이동찬 명예회장으로부터 일찍 경영권을 물려받은 것을 부러워했다고 한다.
엘지 경영 후계자들은 승계 이전에 최소 20년 이상 경영수업을 받는다. 선진국 기업의 엄격한 내부검증과는 다르지만, 장자승계가 존중되는 한국 문화 속에서 나름의 검증과정으로 볼 수 있다. 엘지는 세대를 거치며 여러 형제간 분가도 별 잡음 없이 마무리했다.
또 구씨-허씨 간 3대에 걸친 57년 동안의 동업을 끝내고 2004년에 허씨가 지에스그룹으로 분리할 때도 평화롭게 끝내 ‘아름다운 동행, 아름다운 이별’이라는 말이 회자됐다. 이를 지켜본 한 전직 임원은 그 비결에 대해 유교적 전통에 기반한 절제와 장자승계 가풍, 인화 존중의 기업문화, 엄격한 후계자 교육, 구씨와 허씨 간 창업 이후 재산 비율(65 대 35) 준수 등 네가지를 꼽았다.
엘지는 국내 재벌 최초로 2003년 지주회사 체제 도입을 통해 소유지배구조도 개선했다. 롯데 등이 수많은 계열사 간 순환출자에 의존하는 것과 달리, 지주회사 체제는 총수→지주회사→자회사→손자회사로 이어지는 간결·투명한 소유지배구조다. 또 재벌의 경영총괄조직은 사령탑 구실을 하면서도 법적인 실체를 못 갖춰 어정쩡한 모습이지만, 엘지는 총수가 지주회사의 등기임원(대표이사 회장)을 맡아 권한 행사만큼 법적 책임을 지는 구조다. 엘지 홍보실은 “구본무 회장이 지주회사의 대표이사를 맡아 사업 포트폴리오 결정, 사장단 인사, 경영이념과 기업문화 구축 등의 대주주 구실을 하고, 계열사 경영은 전문경영인이 중심”이라고 말했다.
엘지에서 분리된 재계 7위의 지에스도 지주회사 체제를 채택했다. 또 13명에 이르는 허씨 대주주들이 유교적 전통 속에서 일종의 ‘신라식 화백회의’ 방식과 유사한 만장일치제라는 독특한 경영방식을 시행하고 있다. 김진방 인하대 교수는 이와 관련해 “대주주와 경영자 역할을 제대로 구분하고, 후계자 선정·해임 과정을 총수 집안 문제가 아니라 이사회와 주총 등 회사의 공식적 의사결정구조 안에 자리잡도록 하는 게 과제”라고 말했다.
곽정수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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