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일 전남 여수시 여수엑스포역에서 20대 젊은 여행자들이 열차에서 내려 들어오고 있다. 상당수가 방학기간에 판매되는 ‘내일로 패스’ 이용자들로, 여름과 겨울 전국의 중소도시 역은 배낭여행을 하는 패스 사용자들로 붐빈다. 사진 서재철 녹색연합 전문위원
▶ 청춘이 철도로 질주하고 있습니다. 20대 전용 자유석·입석 철도패스 ‘내일로’ 때문입니다. 이 패스를 들고 여행하는 청춘을 ‘내일러’라고 합니다. 도전적이고 진취적인 여행문화를 형성하면서 국내 배낭여행의 대명사로 자리잡았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가난한 여행자들이 뿌린 씨앗이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경북 안동과 전남 순천은 도심 재생과 지역상권 활성화 조짐도 보입니다. 지방 출장 때 철도를 애용하며 ‘내일로 현상’을 지켜본 서재철 녹색연합 전문위원이 글을 보내왔습니다.
반바지와 반팔 차림에 슬리퍼를 신은 젊은이들이 경북 안동시 안동역으로 쉼없이 들고 나간다. 플랫폼과 대합실이 20대 배낭을 멘 여행자들로 꽉 찼다. 지난 7월25일, 안동역은 ‘청춘역’이었다. 매년 여름과 겨울 안동역을 오가는 사람들의 대다수는 젊은이들이다.
낯선 풍경은 ‘내일러’들의 발걸음 때문이다. 내일로는 만 28살 이하만 이용할 수 있는 자유석·입석 전용 무제한 철도패스다. 2007년 코레일에서 내놓은 내일로는 지난해까지는 25살까지만 살 수 있었는데, 올해부터는 28살까지 가능해졌다. 일정 금액을 주면 유럽 전역을 기차를 타고 돌아다닐 수 있는 유레일 패스와 비슷하다. 내일로 패스를 들고 전국여행을 하는 젊은이들을 ‘내일러’라고 부른다.
게스트하우스로 바뀌는 순천 모텔들
안동역은 원래 붐비는 역이 아니었다. 청량리역(서울)과 정동진역(강릉), 동대구역(대구), 부전역(부산) 등의 대도시를 오가는 무궁화호와 새마을호가 잠시 쉬었다 가지만 승객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이날 안동역 직원들은 기차에서 쏟아져 나오는 젊은이들을 맞느라 분주했다. 내일러들을 위한 편의 제공과 안내가 이들 업무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다. 안동역 구내에는 내일러들이 배낭과 가방을 넣어둘 수 있는 물품보관함이 마련되어 있었다. 적게는 수십개에서 많게는 백여개가 보관된다고 했다. 역무실 바로 옆에는 열차를 개조해 만든 내일러 전용 무료 숙박시설인 ‘퇴계학당’이 있었다. 역 건물의 한쪽 방은 카페처럼 만들어 영화와 음악을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
안동역을 통해 들어온 내일러들은 안동 시내의 풍경도 바꾸었다. 하회마을과 서원 등 조선시대 유교 문화 유적이 즐비한 안동은 과거 젊은 여행자들의 방문이 적었다. 그런데 지금은 안동 어디엘 가도 젊은이들이다. 관광용 시티버스도 젊은이들이 메웠다. 임오영 안동역 팀장은 “안동역에서도 내일러들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모색하는 중”이라며 “내일러의 방문으로 안동역과 안동이 활기차졌다”고 말했다. 안동 시민들도 내일러들의 방문으로 인한 도시의 변화를 실감하고 있었다. 안동에서 태어나서 대학을 다니는 이소라씨는 “여름철과 겨울철에는 안동에 젊은이들이 많아진다. 안동역 앞에 ‘맘모스 빵집’이라고 오래된 제과점이 있는데, 내일러들 사이에 알려지면서 줄을 서서 빵을 산다. 안동 사람들에게 일종의 문화적 충격”이라고 말했다.
청량리에서 중앙선을 타고 내려가다 보면, 소백산을 넘기 전에 나타나는 충북 단양도 내일러들이 몰리는 곳이다. 내일러들은 여기서 패러글라이딩을 한다. 단양군청 문화관광과 조재인 팀장은 “단양군에서 내일로 패스를 소지한 학생들에게 1박에 1만원씩 숙박비를 지원한다. 학생들의 홍보 전파력이 상당해서 관광객 유입 효과가 크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최근 5년 사이 단양에는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저렴한 숙소인 게스트하우스가 네 곳이나 새로 생겼다. 내일로 이용자가 가장 선호하는 숙박시설이 게스트하우스다. 여행자들이 도미토리 형태의 방에서 자면서 휴게실과 식당을 공유한다. 자연스럽게 여행 정보를 나누고 동행을 만난다. 유럽 배낭여행객이 묵는 호스텔이나 게스트하우스 같은 곳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배낭여행용 숙박시설이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내일로가 일으킨 변화는 남도에서도 꿈틀거리고 있었다. 지난 8월1일 오후 3시 전남 순천역. 밀물과 썰물처럼 들고 나는 20대 젊은이들이 유난히 많았다. 내일로 패스를 소지한 승객이 어느 정도냐는 질문에 역무원은 “20대는 95% 이상이 내일로라고 보면 된다”고 말한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대합실에 앉아 있는 승객의 3분의 2 이상이 젊은이들이었다.
전국 역 중에서 순천역은 ‘내일러의 성지’로 꼽힌다. 서울에서 꽤 멀어 장기여행의 묘미를 즐길 수 있는데다 전라도 맛집이 있고 순천만 등 볼거리가 풍성해서다. 그래서인지 전남 순천은 역세권 전체가 내일로 붐으로 요동치고 있었다. 마치 서울의 신촌이나 혜화동 대학로를 걷는 것처럼 느껴졌다. 순천역 앞 골목 곳곳에 게스트하우스가 생겼다. ‘길건너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는 이원기 대표가 이날 말했다.
“올 들어서만 모텔 일곱 곳이 게스트하우스로 바뀌었어요. 순천역을 중심으로 지난 2년 사이에 게스트하우스만 15개 이상 생겼고요. 지금도 모텔에서 게스트하우스로 리모델링 공사를 하는 곳이 있습니다. 모텔과 여관이라는 폐쇄적 숙박시설에서 게스트하우스라는 개방적이고 열린 숙박시설이 늘어가는 것은 지역의 상권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건강한 모습입니다.”
개인택시를 운전하는 조조익씨도 내일러들이 반갑다고 말했다. “여행하는 학생들이 순천에서는 효자입니다. 자동차 끌고 오는 사람들은 훌쩍 지나가거든요. 기차 타고 온 학생들은 순천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시내 곳곳을 오가요. 젊은이들이 뿌리고 가는 돈도 무시할 수 없어요.”
순천역 주변 거리는 과거 역 앞의 칙칙한 구도심 풍경에서 다양한 기호와 문화가 교차하는 젊음의 거리로 변해가고 있었다. 영동선의 정동진역(강릉), 묵호역(동해), 태백선의 태백, 영월역, 중앙선의 제천, 단양, 영주역, 동해남부선의 경주역, 해운대역(부산), 부전역(부산), 전라선의 전주, 곡성, 여수, 보성역 등도 내일러들이 꼭 챙겨 들르는 여행지다. 이 중에서도 안동역과 순천역은 역세권과 상권 자체가 변하고 있었다.
만 28살 이하만 이용할 수 있는
무제한 철도패스 ‘내일로’ 들고
전국을 여행하는 ‘내일러’들이
지방 소도시 풍경을 바꿔간다
올해 6~8월 패스 10만장 팔려
입석이라 ‘집 떠나면 개고생’ 실천
화장실 앞에서도 퍼질러 앉아
서너시간 이동해야 하는 현실
아무리 젊어도 힘든 여정이지만
고달프다는 친구들 거의 없었다
‘내일로 패스’. 사진 서재철 녹색연합 전문위원
7일권 6만2700원, 매력은 “싸다”
철도할인 패스가 지역경제를 살리는 건 물론이고 도심 재생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건 흥미로운 대목이다. 외국에서만 향유됐던 배낭여행 문화가 5만~6만원짜리 철도패스를 통해 국내에 정착되는 점도 그랬다. 이에 대해 박주봉 순천역장은 지난 8일 “내일로는 철도에 잠재된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줬다. 철도역은 문화교류의 공간으로도 발전할 수 있다. 지역사회의 건강한 발전 기반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순천역이 보여주고 있다”고 지적했다.
전라선에서 내일로 열풍은 순천에서 보성과 곡성으로 확산되는 중이다. 보성역은 과거 한산함 그 자체였는데, 이제는 여름과 겨울이 되면 하루 300~500명이 내일로 패스를 들고 쏟아진다. 곡성역도 마찬가지다. 곡성군 관광과의 최영수 주무관은 올여름 3000명 이상의 학생들이 곡성역을 통해 들어왔다며 좋아했다.
“지역에서 내일로의 파급 효과는 무시할 수 없어요. 요즘 젊은이들은 자기 자랑 하는 것을 어찌나 좋아하는지, 어디 다녀오면 사진을 찍어서 인터넷에 올리잖아요. 그럼 일파만파로 퍼집니다. 홍보 효과 만점이에요.”
청년들이 너나없이 내일로를 사들고 열차에 몸을 맡기는 이유는 단순하다. 패스 요금이 저렴하기 때문이다. 내일로의 최대 강점이다. 내일로 패스 5일권은 5만6500원, 7일권은 6만2700원이다. 케이티엑스를 제외한 전 열차를 무제한으로 탈 수 있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은 20대 초중반에게 닷새나 일주일 동안 전국 어디든지 갈 수 있다는 것은 큰 매력이다. 전국의 주요 열차 역에서 만난 청년들에게 내일로의 장점이나 매력을 물어보면 단박에 나오는 답이 “싸다”였다. 솔직한 답변이다. 넘치는 기운으로 여행을 가고 싶은데 주머니가 허전할 때 혜성처럼 등장한 것이 내일로였다.
2007년 내일로 패스가 나온 뒤 입소문이 퍼지면서, 내일로 패스로 여행 경로를 짜는 인터넷 커뮤니티들이 생겼다. 기존 이용자들이 기록하고 올린 경험들이 인터넷과 에스엔에스(SNS)에서 꾸준히 축적됐다. 젊은이들은 내일러 선배들의 여행기를 참조해 자신의 기호와 관심에 맞게 경로를 짠다. 전국 역과 기차에서 만난 내일러들과 이야기해보니, 거개가 전국여행은 태어나서 처음이라고 했다. 부모나 보호자가 인솔하는 여행에서, 스스로 계획해 내용을 만들고 자신의 힘으로 나서는 최초의 여행인 셈이다. 내일로 이용자들은 닷새간의 여행에 내일로 패스, 숙박, 식사, 각종 프로그램 참여비 등을 합해 적게는 20만원에서 많게는 40만원 정도 쓰고 있었다. 일주일권 패스 이용자 중에는 50만원 가까이 쓰는 경우도 있었지만 많지는 않았다. 대부분 둘 또는 셋의 동성이 한 팀을 이뤘고, 남녀 커플도 간간이 보였다. 넷 이상은 드물었다. 가장 많은 경우는 7명까지 봤다. 강원 삼척 도계역에서 경북 봉화 분천역으로 가는 열차에서 만난 일곱 명의 인천 친구들은 중학교 동창들로 직장에 휴가를 내고 나섰다고 한다. 이들은 “먹는 것이 제일 민감한 주제다. 뭘 먹을지를 놓고 싸울까봐. 식사는 무조건 방문지에서 가장 저렴한 백반으로 하기로 합의하고 출발했다”며 웃었다.
혼자 오는 이도 제법 있었다. 주로 학교 졸업 전후의 취업준비생이거나 직장인들이었다. 이들은 방문지를 미리 상세하게 계획해 다니기보다는 여유있게 일정을 잡고 좋은 곳이 있으면 머무는 방식을 선호했다. 여행을 통해 자신과 대화하고 길에서 길을 묻는 여행자들이었다. 순천에서 경남 밀양 삼랑진역으로 가는 경전선 열차에서 만난 한 친구는 ‘나홀로 천문대’라는 테마를 갖고 출발했다고 말했다. 내일로를 이용하여 경향 각지의 천문대를 섭렵하고 있었다. 경북 영주에서 봉화 분천으로 가는 열차에서 만난 승객도 “내일로를 이용하여 방문한 곳 중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 영월 천문대에서 본 밤하늘”이라고 말했다. 열차여행이 재발견되기도 한다. 영동선 봉화 분천역에서 춘양역으로 가는 열차에서 만난 부산의 직장인 황자경씨는 내일로 패스를 가지지 않았지만 기차여행을 좋아한다. “부산에서 강릉까지 기차로 여행하는 맛이 괜찮습니다. 기차가 주는 향수 같은 정서가 크죠. 시간은 오래 걸리지만 기차 또한 여행에 속하는 부분이라 친구와 기차 속에서 나눈 시간이 좋았습니다.”
부전역(부산)에서 정동진역(강릉)까지는 431.8㎞로, 출발에서 도착까지 7시간50분이 소요된다. 국내 철도 구간 중 가장 긴 시간이 걸리는 곳 중 하나다. 천천히 가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나름의 여행 방식으로 즐거움을 찾는 것이다. 혼자 다니는 내일러들은 이렇게 ‘느림의 미학’을 추구했다.
내일로는 생각보다 힘든 구석도 있다. 빈 좌석이 있으면 앉을 수는 있지만, 좌석표를 가진 승객이 오면 일어나야 한다. 패스 자체가 입석이기 때문에 ‘집 떠나면 개고생’을 실천해야 한다. 그래서 카페 열차가 달려 있는 열차에서는 카페 바닥에 거의 죽치듯 엉덩이를 붙이고 간다. 그뿐만 아니라 열차의 이동 통로나 좌석과 벽면 사이의 틈새에 조금이라도 엉덩이를 붙일 수만 있다면, 퍼질러 앉게 된다. 심지어 카페 열차칸 바닥에 쓰러지거나 누워 자는 이들도 봤다. 화장실 앞에서도 자리를 깐다. 아무리 젊은 기운이 넘쳐도 힘든 여정이다. 하루 종일 이글거리는 햇살과 더위 속에 돌아다닌 뒤 기차에서 서너시간 이동한다. 그래서 어디든 앉게 되고, 눕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지만 마음이 고달프다는 친구들은 거의 없었다. 전주에서 남원역으로 가는 전라선에서 만난 부산의 김세영(동아대)씨는 “동네 친구 셋이서 군대 가기 전에 추억을 만들기 위해 내일로를 선택했다. 고생도 되고 몸이 힘든 건 있지만 즐거움과 함께 보람도 있었다”며 만족을 표시했다.
내일로 패스 여행자인 ‘내일러’들이 지난 2일 경전선 열차카페칸 바닥에 앉아 있다. 사진 서재철 녹색연합 전문위원
열차 혼잡, 일반 승객들은 짜증 날 수도
문제는 내일러들이 아니라 일반 승객들의 불편함이었다. 일반 승객에게 내일러는 ‘불청객 또는 열차난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일부 언론에서는 ‘피난열차’라는 표현을 붙이기도 했다. 내일로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에서 가장 큰 것이 열차 혼잡의 문제다. 경부선 서울~대전 구간 통근용으로 이용하는 승객들은 짜증이 날 법도 하다. 코레일의 적극적인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
내일로는 이번 여름만 판매량이 10만장을 돌파했다. 6월1일부터 8월18일까지 판매량이 자그마치 10만2001장이다. 첫해인 2007년 6452장 판매됐던 게, 2010년에 5만9128장으로 늘었고, 이듬해인 2011년에는 11만2113장으로 10만장을 돌파했다. 2014년에는 14만9503장으로 정점을 찍었다. 해마다 판매량은 늘고 있지만, 코레일의 내일로에 대한 관심은 부족해 보였다. 현장에서는 역무원들이 내일로 이용자들에게 성심껏 응대하는 모습을 대체로 확인할 수 있었지만, 본사 차원에서는 패스 판매에만 그치는 것 같았다. 공기업 코레일의 입장에서 내일러들은 ‘미래 고객’이다. 내일로가 가져온 긍정적 변화를 진지하게 인식한다면 ‘피난열차’라는 부정적 시선에 대한 대책도 세워야 할 것이다.
선진국의 교통 정책은 철도를 중심에 두고 발전해왔다. 역설적이지만 가장 싼 내일로 패스를 통해 철도가 지속가능한 교통수단이자 퇴락한 지방 소도시의 구도심을 재생시킬 수 있는 수단임을 우리는 확인하고 있다. 한국 철도는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졌지만 낙후를 거듭했다. 정부의 교통정책이 도로 중심인 탓도 있었지만 철도 종사자들부터 철도의 공공성과 지속가능성에 대한 인식이 미흡했던 탓도 있다. 내일로와 내일러는 철도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다. 진취적이고 도전적인 여행문화를 창출했고 지역 활성화의 씨앗이 되고 있다.
서재철 녹색연합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