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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경제일반

이세돌 새로운 문명사를 쓰다

등록 2016-03-14 19:33수정 2016-03-14 21:00

기고 l 오귀환
러시아의 수학교수 라자레프(Lazarev A. V.)는 2001년 발표한 ‘고대 바둑이 현대과학과 경제학에 미친 영향’이라는 논문에서 바둑은 “솔직히 과학으로 취급할 수 없다”고 고백한 바 있다. 바둑이 자연의 연구에도 도움을 주지 못하고, 인간의 일상생활에도 이용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비록 바둑을 둘 때 최적의 연속수를 두었다고 할지라도 바둑판 이외에는 어디서도 그 수가 쓰이지 않고 있지 않는가?”

2016년 3월13일 한국의 바둑기사 이세돌 9단이 바둑의 운명을 겨냥한 라자레프의 준렬한 문제제기에 대해 명쾌하게 답변했다. 세계 최강기업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수백여명의 컴퓨터 전문가들이 달라붙어 1,200대의 컴퓨터 능력을 종합해 고도화시킨 인공지능의 약점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바둑이 과학의 발전에 결정적으로 기여하도록 이끈 것이다.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결 제4국은 인공지능 과학의 관점에서도 정밀하게 재해석(복기)할 만하다. 이 9단은 이 대국을 통해 인공지능의 과학계에 3가지 명제를 던지는 데(교훈을 공유시키는 데) 성공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알파고 프로그램의 논리적 기초를 이루는 확률(빅데이터)에 내재한 치명적 함정을 열어젖혀 보여주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그 수는 바로 백 78이다. (기보 참고) 이 9단이 상변 흑세력에 침투시킨 백 3점(백40, 백44, 백46)이 이번 바둑시리즈에서 맹위를 떨친 알파고의 3차원적 기하학에 고립돼 버렸을 때, 제4국의 전망은 암담했다. 백70의 깊은 삭감수, 백72의 필사적인 차단, 백74의 강렬한 젖힘수를 통한 약점 만들기...이 9단의 처절한 몸부림이 이어지는 데도 별 희망이 보이지 않는 듯할 때 백78 끼움수가 터져나왔다. 이 끼움수가 이 9단의 승착이지만, 인공지능의 과학이라는 보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면 ‘위대한 한 수’로 기록될 만하다.

이 수의 가치는 알파고가 이 수를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 의미를 9수 뒤 흑87 때에야 비로소 깨달았다는 데서도 여지없이 증명된다. 그때서야 스스로 추정 승리가능성을 70%에서 50%로 낮췄다. 이렇게 추정할 수 있다. 알파고가 확보한 10만건에 이르는 사람들의 바둑 데이터, 나아가 알파고2를 비롯해 다른 바둑 프로그램과 대국하며 축적한 데이터에 이런 수는 없거나, 있어도 그렇게 둔 거의 모든 사람이 진 것으로 파악되고 입력됐던 것이다. 수백만, 수천만 건의 바둑에 나온 수십, 수백억수의 효율과 인과관계를 최종승리와의 연관성에서만 파악하는 확률론의 치명적 약점이 열어젖혀진 것이다. 호구 앞에 자기 머리를 대는 듯한 기이한 수의 데이터는 확률론의 효용 앞에서 사실상 폐기돼 있었다는 사실을 이 9단이 드러내 보인 것이다.

나아가 이 9단은 알파고를 그로기 상태에까지 몰아붙이는 데 성공함으로써 인공지능이 예기치 못한 비상상황에 빠졌을 때 얼마나 비논리적이고, 비정상적인 행위를 장시간 지속할 것인지 여실히 보여주는 데도 성공했다. 그가 승세를 놓치지 않자 알파고는 논리적 패닉상태를 거침없이 드러냈다. 인간의 바둑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흑159, 흑171의 1선 젖힘 악수가 이어졌다.

알파고가 어떻게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는지, 승세를 놓친 이후에 비정상 작동상태에 이르는지 드러나면서 결과적으로 모든 인공지능은 앞으로 반드시 비상상황에서의 구조계획를 의무적으로 프로그램하도록 강제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 역시 이세돌 9단이 이룩한 업적이 아닐 수 없다. 앞으로 인공지능은 스스로를 업그레이드시켜 다시금 이세돌과 같은 창의적 고수의 검증과정을 거쳐야만 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오귀환 '한겨레' 전 편집국장
오귀환 '한겨레' 전 편집국장
2016년 3월13일 바둑은 이세돌에 힘입어 바둑판에서 ‘해방’돼 ‘과학발전의 소중한 파트너’라는 지위를 얻었다.

오귀환 '한겨레' 전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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