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공장기계업체 트룸프에서 노동자가 모니터를 들고 자동화된 생산시설을 관리하고 있다. 트룸프 제공
독일인 옌스 마이어는 25살이지만 직장생활이 10년째다. 세계적인 공작기계·레이저가공기 회사인 트룸프의 게를링겐 공장에 수습으로 들어와 4년 동안은 창고에서 물류를 관리했다. 그 뒤엔 공작기계를 다루는 기술자가 되고 싶어 훈련을 받아 수치제어 기계를 다루게 됐다. 기계를 잡고 씨름하기를 3년, 회사에 큰 변화가 찾아왔다. 공장이 ‘산업 4.0’(디지털 기술을 생산 과정에 접목시킨 것)으로 지능화되면서 종이로 된 작업지시서가 자취를 감추는 등 공정이 크게 변했다. 마이어는 새 시스템에 맞는 교육을 따로 받았다. 새로 맡은 일은 예전보다 광범위해졌다. 표면가공, 레이저표식 등 자동화된 생산의 여러 공정을 모니터링하는 일이다. 쇠를 다루고 깎던 때와 달리 스캐너를 손에 쥔 시간이 많지만, 그는 지금 일도 “만족스럽다”고 지난 13일 공장을 방문한 기자에게 말했다.
그가 공작기계를 처음 배울 때 ‘사수’였던 베른트 헤겔레는 마이어처럼 부드럽게 스마트 변혁기를 넘어가지 못했다. 1970년대 중반 입사해 방전가공기를 30년 이상 다뤄왔기에 이 일만큼은 ‘장인’이라 생각했다. 어떤 공정에선 자신만의 노하우를 개발하기도 했다. 하지만 스마트공장에 새로 도입한 기계는 때로 직접 프로그래밍까지 해야 하는 등 도저히 헤겔레가 다룰 수 있는 도구가 아니었다. 그는 일할 의욕을 잃고 의기소침해하다 동료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다행히 헤겔레는 원료납품업체를 관리하고 고객에게 특급배송을 하는 새로운 일을 맡아서 하게 됐다.
두 노동자가 보여주듯 최근의 기술 변화는 직업, 노동의 형태와 조건을 급속히 바꾸고 있다. 전기차가 2020년대에는 내연기관을 추월할 것이란 예상이 나오는데, 이러면 자동차공장에서 컨베이어벨트식 조립 라인도 보기 어렵게 된다. 디지털로 연결된 생산과정은 노동의 시공간적 경계를 허물어 시도 때도 없이 노동자가 일을 하게 될 수도 있다. 여러 일을 동시에 처리해 작업 스트레스가 증가할 수 있고, 수많은 데이터가 만들어져 작업자가 감시받는 느낌이 들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지난 10여년간 지능화·자동화가 진전된 독일의 사업장에서 일자리의 감소나 질 하락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는 게 취재 과정에서 만난 기업인, 노동조합, 정부 관계자들의 한결같은 대답이었다. 독일에서 산업 4.0을 관장하는 민간조직 ‘플랫폼 산업 4.0’의 헤닝 반틴 사무총장은 “‘산업 4.0’을 통해서 제조업 일자리가 감소하기보다 오히려 늘었고, 이런 상황을 경영자들이 더 반기고 있다”고 말했다.
트룸프 게틀링겐 공장 노동자 얀스 마이어. 사진 이봉현 연구위원
독일이 ‘산업 4.0’을 시작했을 땐, 사람이 거의 필요없는 공장을 꿈꾸는 공학자가 이를 주도했다. 하지만 실상은 그게 아니었다. 게르하르트 보슈 독일 뒤스부르크-에센대 일숙련직업훈련연구소 연구위원은 “상호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생산공정은 오류와 고장이 잦고, 수시로 전문인력의 개입이 있어야 한다. 많은 경우 인간의 업무가 기계로 대체되지 못할 뿐 아니라, 인간이 투입되어야 하는 범위가 기계와 상호작용을 통해 확대된다”고 지난 3월 한국노동연구원이 발간하는 <국제노동브리프> 기고에서 밝혔다. 일부 일자리는 사라지지만 그에 못지않은 일자리가 생기는 것이다. 독일의 경우 제조업체가 고객의 빅데이터를 활용해 서비스로 업무를 확대하면서 컨설팅 인력이 필요해졌고, 비중이 커진 데이터를 관리하고 여러 대의 자동화된 기계를 모니터하는 일들이 생겨났다.
특히 규격품을 대량생산하던 시대를 지나 다양한 사양의 제품을 신속히 생산하는 쪽으로 경쟁력이 옮아가면서 현장에서 유연성을 발휘할 숙련된 노동은 여전히 중요하다. 결국 인간과 로봇의 협업을 어떻게 조직하느냐가 혁신의 성패를 가르게 되는 것이다. 독일이 산업 4.0을 곧 ‘노동 4.0’으로 보고 작업장별로 노사가 긴밀히 협의해온 것도 이 때문이다.
핵심적인 수단은 노동자들에게 새로운 직무 교육과 전직 훈련의 기회를 지속해서 제공한 것이다. 플랫폼 산업 4.0은 산하에 ‘일, 직업훈련 및 교육’ 작업그룹을 구성해 기업, 산업, 정부 차원에서 이런 교육을 강화하는 방안을 추진해왔다. 이들은 지난 3월 낸 보고서에서 이런 교육을 통해 “산업 4.0의 기술적·경제적 성취 또한 가능하다”고 밝혔다.
그렇다고 독일 산업의 디지털 전환 과정이 순조롭기만 한 것은 아니다. 노동 전문가인 하르트무트 자이페르트 한스뵈클러재단 선임연구위원은 “산업 4.0을 통해 어려운 작업을 쉽고 효율적으로 만들고, (일·가정 양립 등) 사회친화적으로 하자는 데 노사 간의 기본 공감대가 있지만,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생각의 차이가 크다”고 말했다. 그중 하나는 디지털화에 따라 핵심 이슈로 등장하는 노동의 시공간적 유연화를 바라보는 시각차다. 자동화된 공장은 데이터를 노동자의 스마트폰에 알리며 이는 시도 때도 없이 일하는 상황을 만든다. 노동자는 이를 최대한 규제하면서 일·가정 양립과 직업능력 개발이 가능하도록 시간과 장소에 더 큰 자율성을 갖기를 원한다. 독일 노사는 최근 노동자가 2년 동안 주 28시간 파트타임으로 일하고, 다시 주 35시간의 정규노동으로 돌아올 권리를 달라는 금속노조의 요구를 놓고 팽팽히 맞서고 있다.
독일의 경험은 4차 산업혁명이 곧 무인 자동화는 아니며 로봇과 인간의 협업을 조직해가는 과정일 수 있음을 말해준다. 독일이 이렇게 방향을 잡은 것은 사회적 대화의 오랜 전통, 회사 내 중대사의 공동결정제 등 노사 중 일방이 독주할 수 없는 제도 등과 연관이 있다.
국제로봇연맹(IFR) 자료를 보면, 한국은 노동인구당 로봇 대수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로봇의 나라’가 됐다. 현장의 노동자를 배제한 채 공학자 중심으로 자동화를 추진한 결과다. 이는 ‘빠른 추격자’로, 일정한 규격의 제품을 대량생산하는 제조업 체제에서는 통했지만, 유연화와 다양성, 전문성이 함께 필요한 시대에 와서는 ‘혁신의 지체’를 겪는 원인이 되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을 화두로 한 또 한 번의 큰 변화 앞에서 일하는 사람과 함께 가려 노력하는 독일이 참고되는 이유다.
베를린·게를링겐/글·사진 이봉현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시민경제센터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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