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의 충격은 경제적 강자와 약자를 갈라놓았다. 경제주체간 조화와 균형을 위한 국가 개입은 축소되고, 약육강식의 논리가 판치는 시장은 확대됐다. 소수의 강자들이 지배하는 ‘기울어진 시장’에서 다수의 경제적 약자들은 계속 구석으로만 내몰리고 있다.
외환위기 이전에는 대기업에 국가 자원을 몰아주고 대기업이 성장을 주도하는 발전모델이 유효했다. 대기업의 투자 확대가 위계적 분업구조에 있는 중소기업의 성장과 일자리 창출을 유발하고, 이를 통해 가계소득을 증가시키는 선순환이 이뤄졌다. 그러나 외환위기를 계기로 선순환의 고리는 약화하는 반면 대기업 위주의 성장은 양극화와 고용 부진만 부추기고 있다.
부와 성장의 과실이 한쪽으로만 쏠리는 현상은 여러 지표로 확인된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30대 그룹의 자산총액 비율을 연도별로 보면, 1998년 85.3%에서 외환위기의 충격으로 2003년 51.7%까지 떨어졌다가 그 이후에는 계속 높아져 2012년(93.5%)부터는 90% 이상으로 굳어졌다. 자산 배분의 편중은 생산능력의 격차와 시장 독과점의 심화로 이어진다. 국내 제조업에서 매출 상위 100대 기업의 시장점유율은 외환위기 이전 40% 안팎에 머물던 것이 2008년 이후에는 안정적으로 50%선을 웃돌고 있다.
외환위기에 따른 구조조정이 일단락된 다음에는 대기업 안에서도 쏠림 현상이 심해졌다. 특히 삼성·현대차·엘지(LG)·에스케이(SK) 등 4대 재벌로의 경제력 집중이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공정거래위원회에 따르면 2012년부터 30대그룹 전체의 자산과 매출은 줄어들거나 횡보하는 추세이다. 하지만 4대재벌은 다르다. 자산, 매출, 순이익, 시가총액 등 모든 분야에서 비약적인 성장세다.
30대 그룹 자산총액은 2011년말 1642조5천억원에서 지난해 1317조8천억원으로 24.6% 줄어든 반면에, 4대 그룹은 647조6천억원에서 864조9천억원으로 33.5% 급증했다. 이에 따라 30대 그룹 자산총액에서 4대 그룹이 차지하는 비중은 지난해 52.7%로 절반을 넘었다. 순이익은 30대 그룹의 72.4%를 차지하고, 매출 비중도 5년 새 3%포인트 높아져 56.2%에 이른다. 4대 그룹이 전체 국민경제를 쥐락펴락한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 수준이다. 그만큼 경제지표가 조금 나아지더라도 사실은 ‘그들만의 잔치’로 끝날 공산이 커진 셈이다.
시장경제에서 발생하는 불평등과 독점의 심화는 법과 제도로 제어돼야 한다. 특히 국내 재벌처럼 폐쇄적인 소수집단 중심으로 형성된 시장권력은 다른 경제주체들의 노력과 성과까지 빨아들일 위험을 키운다. 이런 ‘빨대효과’를 차단하지 않으면 불평등은 더욱 심화하고 지속가능한 성장기반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외환위기 뒤 역대 정권의 통제력은 ‘자유화’와 ‘세계화’의 논리 앞에 무기력했다. 새로운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재벌 대기업의 부당한 시장지배력을 억제하고 공정한 거래질서를 확립하겠다고 약속했으나 결과적으로 모두 공수표만 날렸다. 헌법재판소장까지 나서 경종을 울려야 할 상황이 됐다. “경제력 집중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고전적 의미의 자유시장경제를 해야 할 단계가 아니다.” 이진성 신임 헌법재판소장이 최근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한 말이다.
경제력 집중의 심화에서 비롯된 문제 가운데 가장 시급한 해결과제는 대·중소기업간 임금격차다. 1997년 중소기업 노동자의 평균임금(상용직)은 대기업의 77.3%였는데 2016년에는 62.9%로 지난 20여년 동안 격차가 14.4%포인트나 더 벌어졌다. 그러면서도 같은 기간 중소기업의 고용비중은 80.3%에서 84.6%로 높아졌다. 성장은 대기업 중심인데 고용은 중소기업과 소상공인 중심이다. 그만큼 대기업 중심의 성장에 따른 고용유발 효과가 떨어졌음을 보여준다.
대·중소기업 임금격차는 일차적으로 지불능력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보다 깊은 원인은 경제력 집중의 심화와 공정하지 못한 경쟁질서에 있다. 노민선 중소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세계시장의 치열한 경쟁환경에 직면한 대기업들이 불확실성 증대에 따른 위험과 비용 부담을 중소기업에 전가하는 불공정한 거래 관계가 지속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중소기업의 저임금 고착화는 전체 산업의 성장잠재력을 떨어뜨리고 우리 경제의 고용기반을 약화시킨다. 중소기업의 저임금은 인력난을 심화시키는 동시에 생산성과 혁신역량을 떨어뜨려 다시 더 낮은 임금 수준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에 빠지기 때문이다. 한정화 한양대 교수(경영학·전 중소기업청장)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임금격차가 지금보다 더 커지면 중소기업은 만성적인 인력난 심화와 생산성 저하에 허덕이면서 더 깊은 늪에 빠지게 된다. 그러면 청년일자리 전망은 더욱 막막해지고 우리 경제의 활력도 계속 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박순빈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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