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12월3일 임창열 경제부총리(가운데)가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협상 타결을 발표하고 있다. 왼쪽부터 이경식 한국은행 총재, 임 부총리, 미셸 캉드쉬 국제통화기금 총재. 한겨레 자료사진
심상민(가명·31)씨는 지난 7월 보험회사 정규직 사원과 공공기관 인턴사원 채용 전형에 지원해 두 군데 다 합격했다. 공공기관 인턴 3개월 뒤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조건이었지만 탈락 가능성도 열려 있었다. 실제로 인턴 동기 7명 중 1명이 탈락했다. 정규직으로 전환되더라도 보험회사 월급에 비교하면 3분의 2밖에 되지 않는데다, 연고도 없는 지방으로 내려가야 했다. 그런데도 심씨는 공공기관을 택했다. “큰 사고 치지 않으면 정년(60살)이 보장되잖아요. 대기업 다니면 50살을 넘기기 힘들다는 얘기가 많고요. 보험업계는 수명이 더 짧다고도 하고요.”
1997년 아이엠에프(IMF) 외환위기가 한국 사회 전반에 드리운 가장 큰 상흔은 역동성의 저하다. 더이상 위험을 안고 새로운 시장, 새로운 분야에 뛰어들지 않는다. 외환위기 직후에 겪은 기업 도산과 실업의 고통이 깊이 새겨진 탓이다. 1997년 12월부터 1998년 4월까지 월평균 3천곳 이상 기업이 문을 닫았다. 종전보다 두 배 이상 많아진 수치였다. 실업률도 1998년 7월에 역대 최고인 7.7%까지 치솟았지만 해고된 노동자 중 4분의 1만이 실업급여를 받았다.
지난 20년간 노동시장의 이중구조는 더 고착화됐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임금 격차가 날로 커졌고 그 결과로 고용이 불안하거나 저임금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의 비중이 적지 않다. 반면 사회안전망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들에 견줘 취약하다. ‘괜찮은 일자리’의 비중은 늘지 않는데 사회안전망이 깔리는 속도는 더딘 탓에, 냉혹한 현실에서 낙오하지 않으려는 치열한 몸부림이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다.
9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25살 남승훈(가명)씨의 원래 꿈은 임상심리사가 되는 것이었다. 우울증을 앓던 친구의 자살을 옆에서 지켜본 일이 계기가 됐다. “(꿈을 이루려면) 석사 학위를 취득해야 하고 그 뒤에도 3년간 수련기간을 거쳐야 하더라고요. 그렇게 10년간 공부해도 초봉은 2천만원대 초반이에요.” 오랜 기간 공부만 하기엔 집안 사정이 넉넉지 않은 남씨는 ‘대세’를 따라 안정적 일자리인 공무원으로 ‘꿈’을 갈아탔다. 25살 함수현(가명)씨도 군대를 다녀온 뒤 7급 공무원 시험 준비에 뛰어든 경우다. “월급은 안정적으로 나오는데 장시간 노동, 치열한 경쟁이 없더라고요. 또 공무원은 대한민국이 망하지 않는 한 잘리지 않잖아요. 연금제도가 잘돼 있어 노후 걱정도 없고요.”
언제 직장에서 밀려날지 모른다는 불확실성에 대한 우려는 ‘공시생’ 열풍을 낳았다. 공시생이란 임용고시, 5급 이상 공무원, 일반직 공무원을 준비하는 청년을 말한다. 한국노동연구원의 ‘가구소득계층별 미취업 청년 특성’을 보면, 지난해 미취업(실업+비경제활동인구) 졸업생 가운데 공시생은 28만1천명으로 미취업자의 21.2%를 차지했다. 특히 대졸 이상 미취업자 10명 중 7명(68.7%)이 공시생이었다.
전반적으로 미래 소득에 대한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소비는 부진하고 저축률은 오르는 추세가 이어져왔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이런 불안감은 부동산 투자 열기에서도 엿보인다. 대기업 과장인 최민수(가명·43)씨는 지난 5월 빚을 내어 4층짜리 다가구주택을 지었다. 최씨와 아내, 아이 셋은 40평 규모인 꼭대기층에 살고 1~3층은 임대해 월세를 받는다. 1층은 상가, 2~3층은 투룸으로 만들었다. “아직 아이들이 어려서 단독주택에 살며 뛰어놀도록 하고 싶었는데 노후가 불안하잖아요. 임원이 되지 않으면 회사 계속 다니기도 만만치 않고 55살까지 버틴다고 해도 그 이후는 막막할 수밖에 없죠.”
박형준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연구원은 “부동산 투자로 벌이들이는 소득은 늘어나는 데 견줘 비정규직과 영세 자영업자로 살아가면서 버는 돈은 거의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장보형 하나금융경영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기업대출에 쏠렸던 금융권 대출이 외환위기 이후 가계대출이라는 대안을 찾고, 정부나 가계는 부동산 가격 상승으로 소득 부진을 메우려 하면서 가계부채 급증이라는 중병이 생겼다”고 진단했다.
정은주 허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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