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총수 전횡 방지와 기업 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상법·공정거래법, 금산(금융-산업)분리 원칙과 금융소비자 보호 강화를 위한 금융그룹통합감독법·금융소비자보호법·금융회사지배구조법 등 경제민주화 법안들의 연내 국회 처리가 모두 무산됐다. 자유한국당의 강한 반대와 정부·여당의 소극적인 태도 탓이라는 지적이 지배적이다.
12일 정치권에 따르면, 여야는 지난 9일 정기국회가 끝난 뒤 12월 임시국회 개회 문제를 협의하고 있으나, 경제민주화법 개정안은 소관 상임위원회에서 논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데다 더불어민주당과 한국당이 의지를 보이지 않아 연내 처리가 물 건너간 분위기다. 여권 관계자는 “민주당은 유치원법 처리, 김상환 대법관 후보자 표결 등을, 한국당은 취업비리 국정조사 채택 등을 위해 12월 임시국회를 열 필요성이 있으나, 경제민주화법 처리는 한국당이 반대하고 민주당은 의지가 없어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지난달 27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법안심사소위가 열려 상법 개정안 상정이 논의됐으나 한국당이 반대하고 민주당이 소극적이어서 성사되지 않았다. 법사위 소속인 채이배 바른미래당 의원은 “한국당이 상법은 논란거리가 많아 처리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라며 반대했고, 민주당은 이를 수용해 법안 상정조차 안 됐다”고 전했다.
민주당·한국당의 이런 태도는 지난달 5일 청와대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여야 원내대표가 만나 여야정 상설협의체 구성과 12개항의 합의문을 채택하며 상법 등의 처리를 약속한 것과도 배치된다. 여야정은 일곱째 항목에서 “불공정을 시정하고 공정경제의 제도적 틀을 마련한다”고 합의했고, 부대조항에서 “상법 등 관련 법안의 개정을 위해 노력한다”고 밝혔다.
재벌 총수 전횡 방지와 소수주주권 강화를 위한 상법 개정안의 경우 2016년 총선 직후 여야 의원들이 앞다퉈 발의했고, 2017년 대선에서도 여야 후보 모두 공약으로 제시했다. 특히 문 대통령은 이중대표소송제 도입, 집중투표제 도입, 감사위원 분리선출(대주주 의결권 제한) 등을 대선 공약으로 내세웠으나 집권 이후 지금까지 2년 동안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상법 개정은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도 경제민주화 일환으로 약속했다가 이행하지 않았다. 이은정 경제개혁연구소 정책위원은 “이미 오래전부터 국민적 합의가 형성된 사안으로 한국당 등 모든 정당이 2016년 총선 이후 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상법 개정안을 발의했고 그동안 수차례 협의도 진행됐던 사안인데 법안 심의조차 거부하는 것은 비겁하다”고 지적했다.
공정거래법 개정도 2017년 대선에서 여야 후보들이 공통적으로 약속한 총수 일가 사익편취(일감 몰아주기) 규제 강화 등을 담고 있다. 하지만 한국당이 반대하고, 정부의 법 개정안도 정기국회 막바지인 지난달 30일에야 뒤늦게 국회에 제출돼 제대로 논의조차 안 됐다.
한국당이 경영권 방어장치를 도입해야 한다는 ‘맞불작전’을 펴고, 민주당도 벤처기업에 국한해서 차등의결권(일부 주식에 특별히 많은 의결권을 부여) 도입에 동조하는 것에 대한 우려도 높다. 전성인 홍익대 교수는 “현 분위기라면 상법 개정이 이뤄지더라도 한국당이 요구하는 경영권 방어장치 도입과 함께 처리돼 개악 위험성이 높다”며 “정부·여당이 경제민주화법 처리에 의지를 보이지 않는 것은 문재인 정부의 경제개혁 후퇴와 같은 맥락에서 봐야 하기 때문에 남은 임기 중에도 성과를 거두기 어려울 것”이라고 지적했다.
금융 분야 경제민주화법도 애초 기대감이 높았으나 청와대와 여당 지도부가 정기국회 때 인터넷전문은행 은산분리(산업자본의 은행지분 소유 제한) 완화 등 규제완화에 사실상 ‘올인’하면서 뒷전으로 밀려났다.
문 대통령이 지난 4월 금융개혁 필요성을 강조할 때만 해도 금융 분야 경제민주화법은 탄력을 받는 듯했다. 최종구 금융위원장은 당시 금융회사지배구조법안은 올해 9월 정기국회 통과를, 금융그룹통합감독법안은 정기국회 전 신속한 제출을 추진하겠다고 콕 짚어 말했다. 하지만 이후 청와대와 여당 지도부 기류가 바뀌자 금융위도 법 논의 지연에 소극적 대응으로 일관했다.
금융회사 대주주 적격성 심사 강화 등이 담긴 지배구조법은 정부안이 9월 중순에야 국회에 제출됐고, 정기국회 통과는커녕 여야가 1차 논의를 시작하는 국회 정무위원회 산하 법안소위로 넘어오지도 않았다. 삼성·한화·현대차 등 금융사를 계열사로 둔 재벌의 건전성 감독을 강화하는 내용의 통합감독법도 사실상 정부안으로 불리는 이학영 민주당 의원 제정안이 금융위와의 협의 지연으로 지난달 중순에야 국회에 제출돼 단 한차례 논의조차 안 됐다. 금융위 고위 관계자는 “대기업들의 이해관계와 야당 반대를 고려하면 (통합감독법) 제정에 2~3년이 걸릴 수도 있다”고 전했다. 금융소비자 피해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제와 집단소송제 도입을 위한 금융소비자보호법은 지난해 정부안이 제출됐지만, 지난달 법안소위 논의에서 여야 간 견해 차이만 확인했다.
결국 올해 정기국회에서는 경제민주화법 처리가 모두 무산된 반면 청와대와 여당 집행부가 강행한 인터넷전문은행 은산분리 규제완화, 혁신사업자에게 임시로 규제를 면제해주는 규제샌드박스법들만 통과됐다. 국회 정무위 소속 여당 관계자는 “홍영표 원내대표가 국회 하반기 정무위를 재편할 때 은산분리 규제완화법 통과에 초점을 맞춰 진용을 바꾸는 등 여당 내부도 경제민주화법 추진 동력이 많이 떨어졌다”고 말했다. 정무위 소속 야당 관계자도 “금융소비자보호법은 법안소위에서 논의가 있었지만 아직 합의할 수준에는 도달하지 못했고, 쟁점이 더 많은 지배구조법이나 통합감독법은 통과 여부를 전망할 수 있는 단계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곽정수 선임기자, 정세라 박수지 기자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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